〈 32화 〉 던전 실습(3)
* * *
검은색의 바위에 그늘진 그림자가 갑자기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서서히 인간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색 가운에 애쉬 핑크색의 머리. 그녀, 아니 그가 잠시 학생들이 지나간 자리를 유심하게 쳐다보았다.
"재밌네. 저게 바로 세계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가."
터무니없군. 저게 고작 17세라고? 중격의 영웅이라 해도 믿을 수 있겠는데.
목소리가 바위산에 울렸다. 기를 이용한 특유의 음파를 이용하는 목소리.
스르륵.
애쉬의 그림자 위에서 머리만한 덩어리 같은 것이 솟구쳤다. 덩어리의 중앙에 붉은빛이 반짝였다. 흡사 검은색으로 덧칠된 머리에 눈만을 가리지 않은듯한 모습.
쌍둥이라고 했지? 다른 쪽은 저것에 뒤지지 않는가?
"뒤지기는커녕,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저것보다 몇 수 위야. 아마 너나 나도 홀로 싸운다면 그 녀석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걸?
……저 나이에 말인가?
17세. 고등학생의 나이. 그는 잠시 침묵하였다.
그들이 잠입과 음모, 계략과 함정에 능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 그들의 무력은 동격의 존재들보다 몇 수 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중격의 일각이었다.
아무리 전 세계에서 뛰어난 고등학생들을 모으고 세계 각지에서 뛰어난 교수들을 초빙했다고는 하나 '현재'는 결국 고등학생들일 뿐이다. 그런데도 저 성장 속도라니?
그는 침묵했다. 성장 속도가 말이 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라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워낙에 다양한 비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죽여야 한다. 저건 너무 위험하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10년 이상의 시간을 가진다면 우리들의 신의 목에 닿을 송곳이 된다...!
"허나 소교주께서 죽이지 말라 하셨다."
어째서지?
그는 잠시 자신들이 모시는 소교주를 떠올렸다.
교단.
마왕을 부활시키고자, 어둠 속에서 춤추는 자식들이 모인 곳. 그곳의 교주는 봉인된 마왕의 자아가 선정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의 교주는 불안정하다. 그렇기에 예비 교주. 소교주.
제멋대로 움직이며, 스스로를 혈마라고 칭한 자.
기분이 바뀌는 것이 갈대보다 심하며, 마인들이 뭉친 곳에서도 특별히 더 안하무인 한 존재.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만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17세에 중격의 영웅 중 한 명을 죽일 정도로 막대한 재능. 그리고 고귀하고 고귀한 피를 이은 존재.
애쉬는 상념을 털어냈다. 이 이상은 그가 생각할 것이 아니었으니까.
소교주께서 좋아하시겠군. 그간 무료하다 하셨으니까 말이야.
"생각만큼 좋지도 않아. 자칫하면 소교주님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군. 소교주님은 너무 충동적이시니.
애쉬의 말에 더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원래 사고를 치는 사람은 뒤처리를 하는 사람을 생각지 않으니."
그렇군. 그럼 슬슬 밑작업이나 할까? 아카데미의 개들이 오기 전에 말이야.
***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다들 표정이 굳어있다.
그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으며, 경외가 있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윤승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같이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저 걷고 있었다. 그 표정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
나는 잠깐 윤승하를 플레이했을 때를 떠올렸다.
날 때부터 온갖 정령의 사랑을 받은 그는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존재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견제하기도 했다. 질투, 질시, 부러움. 그딴 감정들을 보았다.
자라나면서 그의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점점 사라져갔다. 동갑들은 그를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가 힘을 내보낼 때마다 두려움이란 감정을 보였으며, 다른 누군가는 그를 경외하거나 동경하였고, 다른 누군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이로 보았다. 혹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그를 이용하려고만 할 뿐.
그의 마음은 정확하게 모른다.
윤채린의 마음은 서술한 주제에 윤승하의 마음은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대략적으로 짐작하고는 있다. 그는 자신과 대등하게 자신을 그대로 바라볼 인물을 원하고 있다.
그가 히로인에게 엮였을 때,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전조만으로 공간을 뒤흔드는 은수아의 칠색을 보고 기뻐했으며, 김하린이 몬스터를 쓸어버리기 위해, 광익으로 빛의 폭격을 날리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이지아가 성장함에 따라, 희열을 느꼈다. 검주의 검이 그녀의 부름에 따라 천개의 검이 유성처럼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을 때, 환희하였고, 교단의 교주를 보았을 때, 교주를 적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슬퍼하였다.
자신과 동등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음에 기뻐하였다. 자신을 대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더 화났지.'
그런 주제에 그들과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숨기는 듯, 행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 세계는 윤채린이 있다. 최소한 이해받을 수 있는 이해자가 있다.
"……."
윤승하를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입 모양으로 왜? 라고 묻는 듯 하였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아주 작게. 그러나 나에게는 또렷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너는 내가 안 이상해?"
내가 두렵지 않으냐. 내가 이상하지 않으냐. 그는 자신의 힘을 개방할 때마다 이런 소리를 하였다.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것처럼.
실제로 저 미성으로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윤승하처럼 작게 말할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아, 미안. 너도 나랑 같은 과였지."
라고 말하며 윤승하가 슬쩍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응. 그 힘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좀 더 갈고닦으면 나만큼은 할 수 있을 걸."
확신에 차 있는 어조였다.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기는 했다. 천의 가면의 잠재력은 윤승하나 윤채린의 고유 특성 못지 않았다.
'이론상이다만은.'
그 이론대로 된다면 솔직히 너무 사기라서 기대는 하지 않았다.
***
이번 던전 체험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가 있던 바위산에 '정예'라 불리는 몬스터가 출현한 것 외에도 다른 장소에도 정예 등급의 몬스터가 등장했다는 것.
교수나 그들을 도와주는 조교들에게 연락이 중간중간 단절되어서 대처가 늦었다고 한다.
와, 그렇게 쌨어? 걔 결투할 때는 보통 마법으로만 상대하더니, 마법이 부전공이었다고?
어. 진짜 장난 아니더라. 정령을 뭔 열 네 채나 사역해.
네 채가 아니라 열 네 채?
어. 속성도 다 다르더라. 그러고 보니 윤채린은 어땠냐?
난 절대 걔한테 깝죽거리지 않으려고.
갑자기 뭔 소리야.
정예 몬스터를 만났는데, 걔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은색 기로 주먹을 감싸더니 한 대 후려치는데 10m 크기의 몬스터가 하늘로 날아 가버리더라고.
……뭐?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소란스레 떠들고 있었다. 교수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학생들을 찾아 떠났다. 조교들은 학생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쭈그려 앉은 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 쪽으로 오는 인물이 있었다. 이지아였다. 이지아가 우울한 표정을 짓다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시우야!"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가왔다. 그녀가 쪼그린 내 왼쪽에 쪼그려 앉으며 나한테 물어봤다.
"시험 어땠어?"
"나? 나야, 뭐, 버스 탔지. 윤승하 대단하더라."
"나도 들었어. 정령술이 주특기라 듣기는 했는데, 마법만 써대서 사실 마법이 주특기인 줄 알았거든."
이지아가 살짝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 쓸 때마다 정교해서 진짜 그게 주특기인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 정령술이 특기였다니."
이지아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지아의 특성은 역천. 그녀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함을 기초로 한다. 불안정함에서 나오는 출력. 그래서 정교한 마법을 쓰기 힘들어한다.
하지만 그 불안정함에서 나오는 출력은 평범한 마법을 아득히 상회한다. 그 출력을 부러워하는 마법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윤승하도 그렇고, 은수아도 그렇다. 은수아는 파괴력보다는 폭주를 연상시키는 점을 부러워하기는 한데.
"그래도 지아의 마법은 강하잖아. 승하도 부러워하던걸."
"지, 진짜?"
이지아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속에서 실제로 부러워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해?"
임나연이 실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지아의 반대편, 내 오른쪽에 쭈그리며 앉았다.
임나연이 다가오자 이지아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응, 윤승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윤승하? 본업이 사실 정령사 였다는 거?"
"응. 아까 봤는데 굉장하더라."
내 말에 임나연이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그래? 얼마나 대단했는데?"
"정령을 열 네 채를 불러서 싸우더라고."
"열 네 채...?"
임나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슬쩍 주위를 바라보았다. 남자들의 시선에 질투와 부러움이 있었다. 여자들의 시선에도 질시와 부러움이 담겼다.
'음.'
나는 좌우를 슬쩍 보았다.
왼쪽에서 이지아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었다. 오른쪽에서 임나연을 보자 헤실거리며 웃었다.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는 시선이 느껴져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고 익숙했다.
한종우.
그가 나를 강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 강한남 역시 마찬가지. 한종우의 파벌이 슬쩍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종우의 파벌이 강하다지만 임나연을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정도는 또 아니기 때문이다.
"여어."
블라우저의 윗단추를 하나 풀고, 넥타이를 늘리고, 교칙보다 조금 더 줄인 미니스커트에 검은색 스타킹. 재킷을 슬쩍 내려 입은 은수아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흔들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불량함을 목표로 조금 삐뚫어진 복장을 원한다지만 저건…….
'음.'
그래도 눈이 즐거우니 조용히 있자.
뭐야, 은수아 쟤 왜 저래.
시우에게 꼬리 치는 거야.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이쪽으로 한 발짝 걸어오려던 한종우도 멈칫했다.
"응?"
은수아가 다가오자 임나연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지아는 뜨악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안녕. 웬일이야."
"부탁했던 일을 끝내서 왔지."
"진짜? 그렇게 급하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은수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녀가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조그마한 검정 구슬 하나와 연락처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부탁하는 물건과 거래하는 건데 당연하지. 여기 네가 원했던 사람의 연락처하고, 물건이야. 뭐, 걱정 마. 네가 말하기 전까지 있는 줄 조차 몰랐는데 그런 장소에 있었던 구슬의 정체나, 아무런 연관 없는 인물의 정보를 캐는 것은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
은수아가 나에게 그것들을 건네주며, 다 안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굳이 말하지 않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마치 물어봐 달라는 말투여서 기분이 나빴다.
허나 내 부탁을 들어준 인물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노릇. 남다윤의 사인을 댓가로 하는 일이지만 굳이 은수아의 호감치를 깍을 필요는 없다.
"어? 어. 고맙다."
"응, 뭘. 이정도야."
은수아가 내 말에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은수아에게 구슬과 연락처를 받았다.
"다음에 또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너에게 진 빚은 이정도로 퉁칠 생각은 없으니까."
은수아가 말했다. 빚이라고? 댓가가 아니라? 그런 의문이 들자 은수아도 자기가 말 실수를 했단 걸 깨달았는지 귀가 살짝 붉었다.
"흠흠, 아무튼. 다음에 보자. 아, 그리고 누가 귀찮게 굴면 말해. 혹은 '우연히' 알게 된 던전이라던가,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빌런 놈들이 있다면 말해. 내가 특별히 도와줄 테니까."
그 말을 하며 은수아가 슬쩍 헛기침을 하고는 우연히 하고 반드시를 강조하며 말했다. 눈빚이 반짝거렸다. 굉장히 기대 하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미래에 필요한 '사람'을 구한다던가. 그런 것도 좋고. 아, 혹시 이명 같은 거라도 필요해? 내가 지어줄까? 온갖 무기를 잘 다루고, 기교가 뛰어나니까 웨폰……."
"아니. 필요없어."
나는 처음으로 정색하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