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은수아(3)
* * *
"내일부터 던전 탐사 체험을 진행하겠다. 다들 준비 잘하고 오도록."
강한자가 교탁에서 갑자기 선언하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준비는 어떻게 하라고?
원래 아카데미에서는 던전 체험을 갑작스레 해. 마인들이 올지도 모르니까.
던전? 아카데미의 던전이 몇 개 있더라?
좀 많지. 중소까지 다 합치면 아마 15군데 정도 될걸.
강한자의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는 던전 탐사를 갑작스레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혹시 모를 마인의 습격에 대비하거나 학생들이 미리 정보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게임에서 던전 탐사를 하는 것은 랜덤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다들 복습 잘하고 오도록."
강한자가 그 말을 하면서 앞문으로 나갔다.
슬쩍 시계를 확인해보니 오후 5시였다.
대충 훈련을 끝내고 저녁을 먹으면 될 시간이겠네. 나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긴, 다들 내일 던전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 나는 예외다.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15군데의 던전을 모두 꿰뚫고 있으니까.…정확히 모두를 기억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던전 내의 입장하면 대부분의 정보가 떠오를 정도는 된다.
오늘은 최유나가 가르쳐준 루틴에서 C 루트를 운동해야겠다. 최유나가 저번에 운동을 가르쳐주면서 루틴을 네 가지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운동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말에 현재 한 달 동안만 해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만큼 빡세기는 한데.'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운동이 잘 된다는 이야기였다.
한 시간 동안 운동하고 15분 쉬고, 한 시간 운동을 한다. 쉰다고 무조건 쉬는 것도 아니다. 틈틈이 현역에서 물러난 영웅들이 소일거리로 올리는 동영상을 보며 무기술을 익힌다.
오늘 보는 동영상은 단검. 기본적인 투척술을 보고 있다.
'정말 천수가 사기기는 해.'
그저 동영상을 보는 것 만으로도 무기술을 '이해'하려고 한다. 실전에서 바로 써먹는 것은 무리겠지만, 연습 몇 번을 하면 감이 올 것이다.
벌써 7시가 되었다. 저녁 먹을 시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저녁을 빼먹고 운동하기는 싫었다. 영양분도 보충해야 되고.
매점에서 콜라 한 캔을 고르고 제로 펩시 한 캔을 골랐다. 그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살짝 어두운 길을 따르다가 앞에 한 소녀가 보였다.
어깨 부근까지 내려오는 빛바랜 백발. 금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삐딱한 형태로 내 쪽으로 향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검은색 민소매 티. 약간 쌀쌀한 날씨라 그런지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의 웃옷. 거기에 반바지를 입은 여성이 쭈그려 앉은 채 츄파춥스를 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응, 뭘 봐?"
불량스러운 어조.
나는 뭐라 하려다가 말았다. 내가 뭐라 한다고 해서 바뀔 사람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나도 깝죽거려보겠는데 나랑 상성이 극악으로 안 좋기도 하고.
그러나 그녀는 일어서서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 미안. 방금까지 딴 놈들이 시비 걸어서 예민해져 있었거든."
츄파춥스를 입에서 꺼내며 말했다. 가느다랗게 침이 이어졌다. 뭔가 야한데.
그나저나 누가 시비를 걸어? 너한테?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학기 초반에 은수아에게 시비를 건 학생이 학생이었던 '것'으로 바뀐 이후로 그녀에게는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대충 건드리면 반죽음을 당한다던가, 뒷산에 몰래 묻힌다든가 하는 소문들.
"너한테 시비 거는 애도 있어?"
"상아탑의 허연 멀건 놈."
은수아가 까득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같은 여자애가 상아탑의 예비 탑주라며 믿을 수 없다고 시비 거는 3학년생이 있었긴 했었다. 은수아가 예비 탑주라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
아직 마탑주의 다섯 제자 중 한 명이니까. 그리고 나머지 네 제자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다가 은수아가 너무 뛰어나 합심하고 그녀를 견제한다. 그녀를 견제하는 네 제자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것을 밝혀 상아탑에서 추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1학년 2학기의 은수아 공략 루트였다.
"그런데 너, 남다윤님하고 친한 사이라는 게 정말이야?"
"응, 꽤 친하지."
남다윤을 누나라고 부르는 탓에 님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그런 내 반응을 모르는지 은수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지."
은수아의 말에 적당히 긍정해주며 답하자 은수아가 눈을 반짝였다.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그...엿들은 건 아닌데, 이지아가 임나연한테 말하는 걸 들었거든. 어쩌다가 들었거든. 어쩌다가. "
은수아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엿들었구나.
"아, 아무튼. 그렇게 친하다는 거지?"
"뭐, 그렇지. 다윤이 누나도 나를 동생으로 생각하니까."
"지, 진짜? 너 머리만 비상한 게 아니구나."
은수아가 안절부절못해 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 그러면 혹시 사인 좀 받아줄 수 있을까?"
"……사인?"
남다윤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나. 사인 받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고작 사인 하나로 은수아의 호의를 사는 거니까 이득이긴 한데.
"사인만 받아주면 돼?"
"어, 어? 진짜 가능해?"
"으응, 사인 정도야 뭐."
아마 흔쾌히 허락해 줄 것 같은데.
"고, 고마워!"
은수아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진짜 고마워! 꼭 받고 싶었거든!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뭐든, 나쁜 짓만 아니라면, 아니, 나쁜 짓도 어느 정도 도와줄게!"
은수아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면 한종우 그 자식과 패거리 좀 손봐줄까?"
은수아가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보랏빛과 남색과 노란색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형상을 갖추려고 하고 있었다. 칠색의 발현 전조였다.
"아니, 그건 좀."
진짜로 한종우를 족치는 날에는 그녀와 한종우의 관계는 최악으로 변한다. 한종우의 자존심을 밟아 뭉개는 짓이며, 그가 마인이 될 가능성이 열리니까. 그와 별개로 나를 왕따시킨 일 때문에 조져버리고 싶기는 한데.
"그건 내가 나중에 할 거니까,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오, 그렇지. 역시 자기 복수는 자기가 해야지."
그러면서 내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식하고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아파, 이것아.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부탁? 뭔데, 말만 해."
나는 내 부탁에 관해 설명했다. 은수아는 떨떠름해 하며 내 부탁을 수락해줬다.
"진짜? 그거면 돼? 아니, 애초에 그게 말이 돼?"
"어. 그거면 됐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내 말에 은수아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말한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할게."
***
은수아는 잠시 저 멀리 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태생부터가 잘난 놈.
은수아가 이시우를 보고 내린 평가였다. 8살 때, 상아탑에 들어가, 10살에 탑주의 제자가 되었다. 탑주의 제자가 되면서, 눈에 띄기 싫다고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세상 모든 마법사의 연합, 상아탑. 그곳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은 그녀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정치에 관여해야만 했다.
많은 파티를 다니면서 많은 미남미녀를 봤지만, 그중에서도 이시우는 특출났다.
'저 능력에 외모는 좀 사기지.'
185cm의 큰 키.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 사슴 같은 눈망울. 언뜻 보면 차가워 보이지만, 웃을 때는 화사한 봄에 피는 꽃과 같이 따스하기도 했다.
그가 가진 특성은 어떤가. 일개 생도라고 볼 수 없는 패링. 그와 무기를 맞댄 모든 사람은 알 것이다. 그와 무기를 맞대면 안 되는 것을. 무기를 휘둘렀음에도 자신의 신체가 무기에 휘말린다.
교수들조차도 생도의 수준이 아니라 동격의 영웅이라도 보는 것 같다고 극찬하는 무기술.
약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육체. 그의 육체는 너무 부실했다. 육체파가 보통 정, 기, 신의 합일을 이뤄 중격으로 승급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의 정신력은 못 해도, 중격이고 그의 기술은 못 해도 상격에 근접한다. 그러나 육체는 히어로 아카데미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할 정도로 낮았다.
그는 잠깐 이시우를 바라보며 그에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쉬는 날엔 하루종일 훈련장에 박혀서 운동한다. 그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미 많은 이들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근 두 달 만에 많은 능력치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이미 여기저기 퍼져있다. 그녀의 눈으로 봐도 그는 아카데미에 입학 전보다 훨씬 더 강맹해졌다.
그래서 이상했다. 저렇게 훈련에 미친 인간이 이제 와서 육체 훈련을 한다? 어떤 가정사가 있다면 모를까, 그의 부모님들은 이미 중격의 영웅들이다. 그런 존재들이 그를 훈련시키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 때 김하린 처럼 실력을 숨기는 건가 생각해 봤지만, 실력을 숨긴다면 무기술까지 숨기는 게 정답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숨기지 않았다.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정신. 육체에 비해 너무나도 뛰어난 기술.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던 은수아는 얼마 전에 봤었던 만화의 내용이 떠올렸었다.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올 마신.
그에 대적하는 주인공과 그 동료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마인쪽에서도 안 좋은 소문들이 많다. 빌런들이 활개 치는 이유가 마인들의 집단이 그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많다. 이 바닥이 그렇듯, 이런 소문은 대부분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교단'들. 세계의 '미래'를 파는 것으로 힘을 탐하는, 반드시 멸해야 하는 존재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회귀.'
회귀자는 존재했었다.
인류가 쌓아온 역사가 그것을 가리킨다.
처음, 게이트가 열리고 그곳에서 온갖 몬스터들이 도시를 헤집었을 때.
인류가 쌓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었던 적이 있었다.
인류의 인구가 절반 가까이 축소되었으며, 사방에서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식량'이라는 가치가 인간들의 목숨보다 우선시 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나라 하나가 몬스터 하나에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몬스터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인류가 핵을 발사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세계는 인류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듯한 시대였다.
그러나 아무리 큰 절망이라도 빛은 있는 법.
인류는 마나를 각성하고, 반격에 나섰다.
많은 영웅이 별처럼 생겨났고.
많은 영웅이 별처럼 져버렸다.
그 시대의 회귀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회귀했음을 알리고 수많은 영웅들을 이끌었다.
게이트에서 넘어온 요정 여왕을 설득하여, 요정족이 인류의 편에 섰다.
다른 이종족들을 설득하여 다른 종족들이 인류의 편에 섰다.
지구가 멸망할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영웅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시대.
'회귀자.'
은수아는 확신했다. 이시우는 회귀자다. 그것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
처음으로 생긴 히어로 아카데미 필기 만점자.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술술 풀어간 이시우. 과거에는 없지만, '미래'의 지식을 이용한다면 가능하다. 그가 '전당'에 올린 정보도 미래에 있을 정보일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도 얼추 맞았다.
은수아는 생각을 이어갔다.
아마도.
마왕은 부활했을 것이다.
인류는 처음 게이트를 맞이한 날처럼 속수무책으로 밀렸겠지. 그곳은 절망뿐이었으리라.
어째서 이시우가 회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의 호의를 사고 싶었다. 그의 '부탁'은 그만큼 간단했다. 아마도, 자신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겠지.
자기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것이지만, 은수아는 객관적으로 봐도 뛰어났다. 윤승하, 윤채린 남매가 워낙 괴물 같을 뿐이지, 출력 하나만을 비교하자면 그녀는 그 둘마저도 뛰어넘는다.
'나를 동료로 원하는 것이겠지.'
은수아는 생각했다. 회귀자의 동료. 감미로운 울림이었다. 허나 회귀자의 동료가 된 이상 평범한 이명을 지녀서는 안 됐다. 회귀자의 동료나 가질법한 힘과 멋있음이 필요했다. 그녀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칠흑의 여제?'
좀 밋밋했다. 좀 더 멋있는 글자를 떠올려야 한다...!
자신의 특성이 칠색이니만큼, 색을 가리키는 영어는 필수였다. 자신의 주특기는 불꽃과 번개. 번개보다는 불꽃이 특기니까, 플레임.
'다크니스 플레임.'
꿀꺽.
멋있는 단어 두 개를 이어 붙이니 멋있는 문장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세 개는 얼마나 멋질 것인가. 자신이 상아탑의 탑주가 될 테니, 끝은 마스터라 붙이는 것이 좋겠지?
멋있는 단어 세 개.
'다크니스 플레임 마스터.'
완벽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