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은수아(1)
* * *
빠듯하게 임나연의 마수에서 빠져나와서 휴식의 가면을 쓰고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씨발."
'죽겠다.'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몸에 힘이 없었다. 월요일부터 이렇게 안 좋으면 일주일 동안 쭉 힘들 텐데. 땡땡이라도 칠까.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한계까지 쥐어짜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지아는 빠듯하게 버틸 수 있었는데 임나연은 그게 안 되었다. 거기다가 마지막에 보였던 살짝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힘들어.'
나는 머리를 굴렸다. 한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체력이 상상 이상으로 빠져나갔다. 이대로 있으면 내가 정한 일정에 크나큰 차질이 생긴다.
그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나라는 이레귤러에다가 용사까지 2명이어서 나비 효과가 어디까지 번질지 상상조차 안 가는데, 초반부터 애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후반에는 몰라도 초반에는 변수를 완벽히 통제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체력과 관련된 영약하고 유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일월의 영단, 세계수의 고목 뿌리, 천수의 만능 공구 키트, 영귀의 내단 이랑 불새의 정수.'
나는 입술을 물었다. 모두 하나같이 능력치 5 이상을 올려주는 영약과 유물들. 그러나 그걸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같이 기린의 던전 이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니까.
'남다윤한테 부탁해?'
남다윤한테 부탁해서 던전을 쓸어버린다. 괜찮은 생각이다. 한 번쯤은 괜찮을 거다. 어떻게든 속여넘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반복되면 의심을 하겠지. 그러니까 남다윤 찬스는 한 번만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일월의 영단은 좋지 않았다. 거기는 너무 위험했다.
세계수의 고목 뿌리. 말 그대로 세계수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이걸 얻으려면 요정측과 틀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의 교장은 요정족의 여왕이다.
파장이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눴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보자가 좁혀졌다.
사령 중 하나인 영귀의 내단.
체력을 올려주면서 특성을 만들어서 주는 몇 안 되는 영약.
'변강쇠였나.'
효과는 정력을 증진시키는 것.
내가 이 영단을 노리는 이유는 아이템의 설명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걸 먹으면 성행위 시 상대의 성장과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성장을 촉진시키는 지는 모른다. 온갖 히로인과의 썸씽이 있었던 남 용사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엔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려서 급진적으로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초반부터 성장률을 촉진시키면서 영약을 무더기로 몰아 주고 필요한 무공서를 건네준 임나연 정도면 나름 전력의 한 축을 차지할 거다.
나는 재빨리 계획을 적어놓은 노트를 꺼냈다.
***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돼지였다. 아기돼지. 발로 툭 차면 데굴데굴 굴러갈 것같이 생긴 비주얼의 소유자.
김호동.
김하린의 쌍둥이 동생이다. 특이사항으로는 아카데미에 친한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아카데미에 퍼져있는 진짜 최면어플을 가졌고, 고자라는 것.
성질 고약한 데다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며, 나름 중2병을 앓고 있는 김하린에게 항상 시달리는 녀석이었다.
'뭐, 금방 치유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은수아 때문이었다. 칠색의 소유자로 이름난 그녀 역시 중2병. 마치 거울을 보듯, 어느 순간부터 김하린을 조금씩 따라 하던 은수아를 보더니 김하린의 중2병은 금세 치유되었다.
'은수아는 치유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김하린의 원죄가 참 깊었다.
아무튼, 나는 김호동에 대해서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 히어로 아카데미에 합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체형. 그러나 그의 진가는 육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고유 특성 전자 정령.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자 세계에서 활동하는 정령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그는 해커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실력만으로 따져서 줄을 세워본다면 100명 내로 들 정도의 능력자. 전자로 만들어진 정령의 보조를 받으면 아마 20위권까지 들어갈 테지. 학생 주제에 말이다.
애니에서나 흔히 나올법한, 혼자서 나라를 전복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은 저지를 수 없지만, 그를 동료로 두면 일상생활에 굉장히 유용하다. 사람이나 물건을 추적하기 쉬워지니까 말이다.
"야, 저기 네 남자 친구 지나간다."
"지랄."
슬쩍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소곤거렸다. 하지만 김호동은 그들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하린에게 새겨진 뼛속 깊은 곳까지 새겨진 공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천적으로 여자 공포증에다 고자라니. 안타까운 녀석이었다.
"야, 저기 내 남자 친구 지나간다."
"지랄, 내 남자 친구거든. 내가 점찍었다."
"네가 그럴 깜냥은 되고?"
"……."
'관심, 곤란.'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여학생들을 무시하고 김호동에게 다가갔다.
김호동에게 다가가자 김호동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오마에와(너는)?"
'왜 일본어를 쓰는 건데.'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김호동의 말투에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갔다.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는 김호동에게 말했다.
"의뢰하고 싶어서 왔는데."
"의뢰?"
김호동이 눈을 빛내며 중지로 안경의 가운데 부분을 슬쩍 들어 올렸다. 스스로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김호동의 시그니쳐 표현이었다. 역겹다면서 고자로 만든 김하린의 심정이 10% 정도 공감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사람이 많아서 좀 그렇고. 나중에 이야기해도 될까?"
"물론. 방과 후, 무명연합無名??으로 오면 된다."
무명연합은 해커들의 집단 어나니머스를 본떠 만든 거다. 후에 사회에 나가서 이 이름을 그대로 집단을 만드는데 중국의 개방과 미국의 유니온과 견주는 삼대 정보집단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이건 미래의 정보 수장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하지만 남들의 이목을 끌고 오면 곤란해. 알다시피 우리 무명연합은 히어로 아카데미의 '그림자'에서 일하니까."
'씨발.'
"물론 우리 무명연합을 잘 알고 있는 데다가…아카데미 '최고의 두뇌'라고 불리는 너라면 다 알고 있는 문제겠지."
'씨발아!'
"그럼 방과 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응."
나는 고개를 겨우 끄덕일 수 있었다.
***
딩동댕동.
수업 종이 쳤다. 나는 내 옆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임나연의 자리. 그 자리의 주인은 지금 없다. 얘는 또 왜 늦는 거지?
드르륵.
앞문이 열렸다. 보랏빛의 로브가 인상적인 여성이 들어왔다. 보랏빛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자색의 마녀로 유명한 송라희가 들어왔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학생들 사이에서 자그맣게 탄성이 일었다.
"오늘은 예고했던 대로, 마법 이론에 대해서 배우겠습니다.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법에 등한시하면 안 됩니다. 어떤 마법들은 대처법을 모르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교탁에 올라 말을 했다. 학생들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실제로 상급의 마법으로 유명한 라비린토스는 대처법을 모르면 최상격의 영웅들이라 할지라도 죽을 가능성이 컸다.
만들기 까다롭고 발현하기는 어렵지만 한 번 완성되면 대처법을 알지 못하는 결계 마법들은 한 단계 위의 영웅들도 죽일 힘을 가졌다. 다만, 반대로 알 수만 있다면은 어지간한 영웅들도 파훼할 수 있는 것이 결계 마법이었다.
"진행할 수업은 저번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그림자 장막의 파훼법이었죠?"
""네!""
송라희의 물음에 학생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주로 남학생들이.
"그림자 장막은 굉장히 희귀한 그림자 속성의 마나를 이용해야 하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마법이지요. 마나도 어지간한 중격의 영웅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잡아먹고요. 하지만 밤이나 어두운 곳에서 한 번 발현한다면, 그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륵.
그때 문이 열렸다.
송라희가 눈썹을 작게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임나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송라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임나연 학생? 왜 늦었지요?"
"그, 늦잠을 자서."
임나연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전부 예비 초인이기에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체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단적으로 육체를 이용하는 학생 중에서는 능력치가 가장 낮은 나조차도 이틀 밤샘은 무리가 아니었다.
즉, 변명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자리에 앉으세요. 오늘은 지각하였으니 벌점 1점을 부여하겠습니다."
송라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 그녀로서도 뭐라 더 말하기 곤란할 테지. 왜냐하면 임나연은 자색의 마녀, 송라희를 후원하는 가장 거대한 그룹, 임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기 때문이다.
임나연은 우울한 얼굴로 자리로 왔다.
그러나 우울한 얼굴은 곧 사라졌다. 나를 바라보자마자, 기쁜 듯 웃으며 앉았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이야, 시우야."
"혼났는데도 좋은 아침이야?"
임나연의 반응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임나연이 내 말에 헤헤거리며 웃었다.
"근데 진짜야? 늦잠 잔 거?"
사실은 알고 있다.
그녀가 진짜로 늦잠을 잤다는 것을. 다만 어젯밤에 나를 강제로 섹스하게 한 다음, 쥐어짜서 괴롭힐려고 물었다.
"으, 응. 좀 많이 피곤했었나 봐. 어젯밤에……그, 그게 저번 주에 임무 주간이었던데다가 훈련까지 했잖아."
그런 말을 하던 도중, 임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앞쪽, 한종우의 자리에서 굉장한 눈빛이 쏘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니, 착각은 아니네.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한종우를 보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애써 한종우를 무시하며 송라희가 말하는 걸 필기하는 척하며 계획을 적어나갔다.
[자라를 얻고, ☆는 포기?]
자라는 영귀. ☆는 초반에 내가 얻을 무기였다. 다들 초인인지라 시력이 좋아서 나름대로 생각해서 암호처럼 적어두었다.
나름 쓸만하기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초반부에 쓸만한 거라 포기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옆을 슬쩍 보니 임나연이 내가 쓴 글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 공책에 그대로 썼다. 그대로 쓰는 건가.
[임나연 바보]
조그맣게 썼다. 그러자 임나연이 그대로 바까지 쓰다가 멈칫하곤 나를 봤다.
볼을 부풀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피식거리며 웃고 칠판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송라희가 이쪽을 힐끔 하고 바라보는 눈짓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나연도 느꼈는지 공책에 머리를 묻고 필기에 집중하는 척 연기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