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성장(2)
* * *
토요일 아침.
워프 게이트로 서울에 도착한 나는 주소를 따라갔다. 시간이 조금 비어서 카페에 들렸다. 아메리카노 하나 주문했다. 진동벨이 울려서 카운터로 갔더니 조각 케이크가 있었다.
"저기 저 케이크는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내 말에 이쁘장한 여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서비스입니다, 손님."
"네, 감사합니다."
'이게 존잘남의 삶인가.'
자리로 돌아가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가는 길에 마카롱 가게가 있으면 마카롱이라도 사갈까. 비싸긴 했지만 내 지갑 사정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커피를 조금 마시고, 케이크를 빠르게 먹어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길에 마카롱 가게가 보여서 10개짜리로 하나 샀다.
뉴질랜드 버터로 만들었다는 수제 마카롱이었는데 10개짜리가 무려 23,000원이나 했다. 마카롱은 진짜 더럽게 비쌌다.
빌딩 숲을 지나니 한적한 공간이 나타났다. 대부분 3층에서 4층으로 이루어진 주택가가 나타났다.
"좋네."
고즈넉한 공간이었다. 나도 나중에 결혼하면 이런 데서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여자도 없었고, 돈도 없었고, 집값은 계속해서 천정부지로 올라서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했었지만.
"……."
아무튼.
나는 남다윤이 미리 찍어준 주소로 향했다.
주소를 따라가니 4층짜리 주택이 하나 보였다. 혹시나 해 주소를 확인해보니 주소도 맞았다. 나는 벨을 눌렀다.
딩동.
"우리 시우, 왔니?"
벨을 누름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남다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를 닮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나는 좀 당황했다. 남다윤의 의상이 생각보다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색과 어울리는 푸른색의 레깅스에 배꼽이 살짝 보이는 타이트한 긴팔티를 입고 있었다. 동생이 입는 혐오스러운 운동복과는 달리 색기가 가득했다. 그 녀석이 입으면 그만큼 끔찍한 게 없었는데.
"안녕하세요. 빈손으로 오기 뭐하길래 먹을 것 좀 사 왔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그녀가 내 선물에 환히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마카롱 10개가 들어간 백을 받아들고 나를 안내해 주었다.
"배고프지는 않고?"
"네. 오는 길에 케이크 좀 먹고 와서요."
"단 걸 좋아하는구나."
그녀의 안내를 받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깔끔했다. 하얀색의 타일이 밑에 깔려 있었고,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집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거실을 지나니 위층과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생각보다 넓었다. 대충 50평 즈음 돼 보이는 공간이었다.
"꽤 넓지?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거 엄청 비싸지 않아요?"
"별 거 아냐."
내 칭찬에 그녀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정말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훈련장으로 내려가 가운데로 향했다. 조명이 밝게 빛났는데 눈이 부시지 않았다. 이것도 마법적 처리를 한 걸까.
"일단 가볍게 대련을 해볼까? 목검이 좋아? 창도 쓴다고 들었는데."
남다윤이 내게 목검과 목창이 걸려 있는 쪽으로 가며 말했다.
"어? 제가 쓰는 무기도 아세요?"
"시우, 굉장히 유명해."
그녀가 살짝 쓰게 웃으며 말했다.
"히어로 아카데미 설립 이래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없었어. 그런데 만점을 받은 유일한 학생이 시우 너지. 얼마 전에 전당에서도 학술 기재한 거 골드 등급까지 받았잖아."
"아, 그거..."
"아마 관계자들 대부분은 다 알걸. 시우 네가 좋아하는 음식부터, 싫어하는 음식까지."
"와, 그건 좀."
나는 질린 기색이 되었다.
"어쩔 수 없어. 시우 네가 이대로 크면, 노벨상을 탈 학자가 될 거라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나오던걸. 임가에서 막아주지 않았으면 밖에 나올 때부터 온갖 스카우트들이 왔을걸."
임가는 임나연의 가문이었다. 아마 부모님이 전부 임가가 만든 길드에 몸담고 있어서 나도 갈 거로 생각하고 막아준 건가.
"그럼 목검으로 할게요."
내 대답에 남다윤이 목검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기 목검을 하나 챙겼다.
'지식 열람!'
▼
이름 : 남다윤
근력 : 41
민첩 : 45
체력 : 42
마력 : 45
고유능력 : 어검
특성 : X
괴물 같은 능력치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그녀의 옷깃 하나 스칠 수 없겠지.
"어디 한번 공격해봐."
그녀의 말에 나는 검을 들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내가 공격을 해서 틈을 만들어야지.
팟!
나는 땅을 박찼다. 목검으로 그녀의 목을 노렸다.
탁!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목검으로 내 목검을 막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다. 나는 천수를 이용했다. 경지에 이른 손재주가 펼쳐졌다.
패링.
아카데미에서 대련하면 항상 모든 학생들이 애먹었던 기술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녀의 목검은 자그마한 움직임만 보였다.
"시우, 벌써 패링도 써? 대단하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목검을 휘둘렀다. 탁! 탁!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지하에 울렸지만, 유효타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능력치의 차이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30분 동안 드잡이한 결과.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나이에 비해 엄청난 성취네."
그녀가 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나를 보며 칭찬했다.
"근력과 민첩이 엄청 낮지만, 기교는 중급의 영웅들조차도 애먹을 정도야."
그녀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기교만 높다. 좋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기교는 애매했다. 기교는 더 기교가 높은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며, 압도적인 힘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시우는 싸움을 뭐라고 생각해?"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싸움이라.
"나는 덜 맞고, 상대는 더 많이 때리는 거로 생각해요."
"맞아. 가능하면 상대의 공격을 모두 회피하고, 상대를 죽이거나 때리는 게 좋지만……. 상대도 멍청하지는 않지. 상대도 이기려고 온갖 수단을 쓸 테니까."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빌런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남다윤은 온갖 수단을 경험했겠지.
"그렇군요."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데 근접전의 싸움은 두뇌 싸움이야."
두뇌 싸움이라.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남다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찰. 상대를 관찰하고, 내 상태를 관찰하는 것. 상대의 수를 파악하고, 내가 쓸 수 있는 수로 상대를 압박하여 서로의 손 패를 겨루는 것. 아마 이게 내가 시우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로 생각해."
"다른 건요?"
내 물음에 그녀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검술은 내 고유 특성에 맞춰져 있어서 시우에게 가르쳐주기 힘들어."
검술까진 바라지 않았다. 뛰어난 검술들은 전부 그 자체만으로도 억 소리가 나오는 보물들이니까.
"아뇨, 이렇게 지도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검술까지 바라는 건, 좀."
"으흠. 아무튼 내가 시우에게 가르쳐 줄 건 관찰안이야."
"관찰안이요?"
"그래, 관찰안. 상대를 살피고, 내 상태를 살펴 승률을 점지하는 것이지.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 알지? "
그녀의 말에 불편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누나, 죄송한데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에요."
"뭣!"
그녀가 경악해 했다.
"아, 아무튼. '무예'를 단련하는 상격의 영웅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특성이야. 상급 영웅이 되고 싶다면 필요한 통과 의례기도 하고. 이게 없다면 '감각'을 깨운 거고."
제 6감. 혹은 초직감이라고 불리는 특성이었다. 게임에서는 치명타 확률, 치명타 피해, 회피율 등등 올라가는 종합 세트 특성이라서 반드시 올려야 하는 특성이기도 했다. 안법??은 치명타 확률과 피해가 높았고, 직감은 회피가 높았다.
직감을 수련하는 법은 아카데미 내에 있는 비밀 수련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불을 끄고 허수아비의 공격을 1,000회 회피하면 얻을 수 있었다.
안법을 수련하는 법도 그곳에서 공을 1,000회 피하면 되었다.
즉, 안법을 수련하려면 최소한 공을 한 번에 1,000회 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해낸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말이 좋아 1,000회지 중간에 한 번이라도 맞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만 여기에는 꼼수가 있는데 이 꼼수를 이용하면 쉽게 완료할 수 있어서, 나는 그것으로 안법과 직감을 올릴 계획이었다.
'근데 게임과 달라서 올라갈지 안 올라갈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수련으로 차근차근 올리는 게 아니라 버그 같은 방식이라 잘 모르겠다. 일단 배워두는 게 좋기는 했다.
"사자도 자기 새끼는 절벽에 떨어트려서 키우는 법. 이번엔 시우라도 좀 혹독하게 몰아붙일 거야."
남다윤이 굳게 다짐하듯 어디선가 가져온 야구공을 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 불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다윤이누나?"
"다, 다윤이누나? 응? 왜 그래 시우야?"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내 물음에 답했다.
"그거 잘못된 정보에요."
"뭣?!"
사자가 새끼를 절벽에서 떠미는 건 맞지만, 그게 자기 자식은 아니다. 새로이 우두머리가 된 사자가 '전' 우두머리의 사자 새끼들을 절벽으로 내미는 것이다. 사자가 제 새끼를 얼마나 이뻐하는데.
그걸 설명하니까 남다윤이 헛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없었던 일로 할 모양이다.
***
'살았...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남다윤이 봐준 이유도 있었다. 민첩을 올려주는 가면을 만들까 생각해 봤지만, 결국 남다윤이 더 빠르게 던지면 의미가 없었기에 헬창의 가면을 쓰고 열심히 트레이닝했다. 그래도 그동안 부진했던 민첩이 1 올라갔다.
"많이 힘들지? 자, 마셔. 원기 회복에 좋은 그린 캐럿을 갈은 주스야."
남다윤이 정체 모를 초록빛의 주스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린 캐럿. 초록색 당근이었다. 이것도 이 세계에서 나는 식물이겠지. 힘이 없는 나는 고맙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를 마셨다. 주스를 입에 넣으니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꿀을 넣은 건가.
"자, 이것도 꼭꼭 씹고, 삼켜."
주스를 삼 분의 일쯤 마시니 그녀가 엄지 두 마디만 한 크기의 단을 내게 내밀었다. 눈에 익은 아이템이었다. 훈련 후 복용하면 효과를 상승시키는 아이템. 이거 제법 비싼 건데. 나는 웬 떡이냐 싶은 심정으로 단을 향해 입을 벌렸다.
"자, 시우야. 입 벌려, 아앙."
남다윤이 내 입속으로 단을 넣어줬다. 으적으적 씹고는 삼켰다. 몸에 힘이 좀 더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벽 한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벌써 7시가 되었다.
오늘의 소득은 민첩 1. 나름 만족스러웠다. 남다윤과 더 친해지기도 했고.
'슬슬 가볼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남다윤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보자."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남다윤이 주말에 가르쳐주겠다고 내게 제안했지만, 그녀에게는 스케줄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오늘만 가르치기로 했다.
나는 남다윤의 집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