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조교남과 노예의 상하관계(1)
* * *
"씨이발."
낮게 욕을 내뱉으며 아령을 땅바닥에 대충 놓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이 절로 부들부들하며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근육을 쥐어짠 탓이었다. 주변에서 욕을 하는 모습도 섹시하다니 뭐니 하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진짜 죽을 만큼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식의 가면을 쓰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5분 즈음 천천히 호흡을 고르니 좀 살 것 같았다.
'아, 그냥 다 때려치울까.'
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내 루틴이 너무 살인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운동을 개시한다. 운동을 끝마치고 학교에 간 후, 의미 없이 공부하는 척하며 노트에 필기하고, 쉬는 시간마다 자투리 시간에 한숨 잔다. 점심은 대충 초코바 같은 거로 때우고 잠을 자거나 마나 연공을 한다.
하교하면 육체 단련을 시작한다.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4시간가량 단련을 하고 난 후 기숙사로 기어들어 와 새벽 2~3시까지 마나 연공.
"……."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게 선택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방탕하게 살다가 전 세계의 인구랑 같이 뒤지느냐, 이렇게 힘들게 단련하고 10년 후 편안하게 사느냐가 달린 문제니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휴식의 가면의 효과 덕분에 다시 운동해도 괜찮을 체력이 생겼다.
운동 대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까 전 이지아가 나를 부실로 초대한 것 때문에 여기서 더 무리하면 연기하는데 지장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블라우스와 넥타이 위에 검은색 카디건을 걸친 이지아가 보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양 갈래를 한 머리는 처음이라 평소의 이지아랑 뭔가 좀 색달랐다.
뭔가 새삼스러웠다. 처음 그녀를 보니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가 떠오른다. 여기저기로 뻗친 칠흑빛 머리카락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도대체 어디서 난 건지 묻고 싶은, 만화에서 볼법한 커다란 안경을 쓴 소녀. 지금은 임나연에게 집중 케어를 받고 자기도 열심히 가꿔서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엄청 열심히 네. 그사이에 훈련하고 있었던 거야?"
"응, 뭐. 할 것도 없고."
이지아가 나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눈은 힐끔힐끔 젖은 티셔츠로 향했다.
티셔츠 사이로 내 자랑스러운 식스팩이 비쳤다. 원래는 안 비치도록 까만 옷을 입는데 빨래를 까먹은 바람에 하나 남은 흰색 셔츠를 입게 되었다.
꿀꺽.
이지아가 침을 삼키며 내 식스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냄새나니까 너무 가까이 오지 마."
"따, 땀 냄새? 아, 아니, 괜찮아. 좋은 냄새가 나는걸. 오히려 좋아."
이지아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얘가 냄새 패티시도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헐, 이시우랑 이지아 사귀고 있었어?"
"이시우는 임나연이랑 사귀고 있던 거 아니야?"
"난 김하린하고 이시우가 사귀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일이 대꾸하기 귀찮아 이지아를 끌고서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사실 찔리는 말이기도 했다. 관계도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그것이 강해지는 수단이라면 나는 분명히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할 테니까.
문밖으로 나갈 즈음에는 그 잠깐의 사이 동안 소문이 확산하고 확산하면서 내가 어느새 열 명 이상의 여자와 사귀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으로 번지고 있었다. 진지하게 소문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때, 이지아가 내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애, 애들도 너무하네. 시우가 무슨 열 다리를 걸쳐."
"뭐, 학생이니까.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 열광하는 건 당연하지."
이지아가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말했다. 적당히 답해주며 우리는 길을 나섰다.
"그…. 혹시 진짜로 누구 사귀는 사람 있어?"
"없어, 없어. 지금 훈련하는 것도 바쁜데 무슨 여자야."
손사래를 치며 쓰게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이지아가 안심한 듯 웃었다.
"그, 그래? 시우는 엄청나게 잘생긴 데다가 친절해서 여자친구가 있을 것 같았거든…. 친한 여자도 많잖아. 나연이라던가, 하린이라던가."
"나연이가 예쁘긴 해."
임나연을 칭찬하자 지아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가, 헛기침했다.
"흠흠. 아무튼 지금 여자친구는 없는 거야? 좋아하는 여자는...?"
"좋아하는 여자라."
나는 잠시 가면에 대해서 떠올려 보았다. 이지아에게 최면에 걸린 척을 하고는 그에 걸맞은 가면을 만들었었는데 하필 가면이 멋대로 말한 덕에 나는 지금 이지아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이지아를 슬쩍 보니 기대감 섞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연이의 무기를 막은 건 어떻게 한 거야."
노골적인 회피였다. 그러나 내 대답에 이지아가 귀엽다는 듯 나를 보며 실실 웃으며 말했다.
"좀 있다가 가르쳐 줄게. 부실에서. 둘이 있을 때."
이지아가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
학교에는 금방 도착했다. 애초에 바로 옆 건물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그래서 그때 나연이가..."
"시우야! 지아야!"
이지아가 즐겁다는 듯 나연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장발을 뒤로 묶어 넘긴, 임나연이 손을 흔들며 반갑다는 듯, 우리에게 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최유나가 비서처럼 반듯하게 있었다.
"뭐야, 지아 그새 머리 스타일 바꿨네. 양 갈래머리도 엄청 귀엽다! 완전 존예! 짱 어울려!"
임나연이 이지아에게 엄지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나연이도 포니테일 엄청나게 잘 어울린다!"
"그지, 그지! 이거 최 쌤이 해준 거다. 그런데 둘이서 어디 가는 거야?"
임나연이 해맑게 물었다. 아까 이지아에게 패배하고 침울해하던 표정과는 달랐다.
"지아의 부실에 가고 있었어."
"지아의 부실? 왱?"
"지아가 알려줄 게 있대서."
"응? 뭔데? 시우가 아니라 지아가?"
"그게……."
지아가 난처해하고 있었을 때, 저 멀리서 단체로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무얼 숨기랴. 한종우 일당이었다. 그가 언제나처럼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임나연에게 다가갔다.
"나연아 여기서 뭐해?"
"응, 지아랑 시우랑 이야기 중이었어."
임나연이 웃으며 말했지만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러니까 대충 딴 데로 꺼져줄래. 라는 말이 생략된듯한 분위기. 그러나 한종우는 이 정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포기할 남자였다면 이미 그는 옛날 옛적에 그녀를 포기했을 거다. 한종우는 꿋꿋하게 물었다.
"나랑 카페에 가서 이야기나 할까? 아, 그러고 보니 나연이, 네가 좋아할 법한 아이스크림도 새로 나왔으니 아이스크림 가게는 어때?"
"헉, 벌써 그게 나왔어? 시우야, 지아야. 너희도 같이 민트 초콜릿 칩을 얹은 민트 초콜릿 봉봉 먹으러 갈래?"
나는 임나연의 말에 경악했다.
왜냐하면, 내가 빙의되기 이전에 소식은 들었지만,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주말에 한 번 먹어보자 다짐했던 아이스크림이 아닌가.
한창 프로젝트를 실행하던 때라 저녁 10시에 들어와서 배달을 시킬 수 없었던 시간. 동생한테 부탁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100% 내가 먹기도 전에 먼저 동생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 뻔해 미리 시켜두는 것조차 못했다.
"민트 초콜릿 칩을 얹은 민트 초콜릿 봉봉이 나왔다고....?"
이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야 했다.
"가야지! 무조건 가야지!"
내 옆에서 이지아가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곤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민트 초코는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이지아가 민트 초코를 힐난했다. 나는 하수같이 민트 초코를 싫어한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뭐, 민트초코는 좋아하는 사람이나 먹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지아의 말에 정신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사실 차분히 생각해보니 배달시켜도 상관없지 않나. 배달 안 시키면 한종우 패거리가 끝까지 쫓아올 텐데.
나는 그런 뜻을 담아 임나연을 아이 콘택트를 보냈다. 임나연이 내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네놈..."
"지, 진정해 종우야."
그 반응에 한종우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한종우를 말리기 시작했다. 나답지 않게 너무 흥분한 것 같다.
이런 건 생각난 김에 바로 시켜야 했다. 마침 저녁 먹기 2시간 전인 완벽한 간식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배달 앱을 켰다. 베라 스킨스. 이름이 좀 웃겼다. 괜히 상표명 피하려다가 이상한 이름이 지어진 것 같은 상표.
나와 임나연이 먹을 민트 초코칩을 얹은 민트 초코 봉봉을 2인분 시켰다.
"지아랑 선배는 뭐 드실 거예요?"
"음…. 그럼 난 엄마는 외계인으로 고를게."
순간 패드립인줄 알고 흠칫했다. 엄마는 외계인이라는 아이스크림을 추가하고 최유나 선배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무거나 요."
"……."
아무거 나가 가장 어려운데. 눈을 감고 대충 눌렀다. 체리 주빌레가 걸렸다. 나는 배달 주문을 누르며 숟가락 4개를 요청했다. 배달 장소는 내 부실 위치를 대었다. 이 멤버로 이지아의 부실로 들어가서 응애, 나 아기 시우. 이럴 수 없으니까.
'…….'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절대 하지 말아야지.
"그럼 내 부실로 들어가서 먹을까?"
"그러자, 그러자."
"그러고 보니 시우의 부실은 처음이네."
"그러게. 나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네."
그러고 보니 내 부실에 누굴 초대한 적이 없기는 하다.
"쯧."
한종우가 혀를 낮게 쳤다. 책임감 있는 녀석이라 자기를 따르는 패거리를 버리고 나를 쫓아올 생각을 하지 않을 거다. 얘는 진짜 임나연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괜찮은 애인데.
한종우 일행을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내 부실로 향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올라가던 도중 급한 볼일이 생각나 일행에게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하고는 좀 멀리 있어서 제법 걸어야 화장실이 나왔다.
볼 일을 마치고 손을 씻던 도중,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 임나연이 서 있었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야...!'
당황했지만 반응할 수 있었다. 재빠르게 특성에서 천의 가면에서 조교남의 가면을 장착했다. 그와 동시에 마나를 이용해 주변을 훑었다.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노예 주제에 대단하더군. 주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기절을 하다니..."
가면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임나연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굳이 꿇을 필요는 없었는데.
무릎을 꿇은 임나연이 무릎을 꿇은 채로 내게 엉금엉금 기어들어 오며 말했다.
"사, 사죄의 의미로 주인님의 발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겁했다. 여기 화장실인데 입을 맞추겠다고? 거기다가 난 방금 볼일을 보고 왔는데? 이번만은 나와 동일한 생각인지 가면을 쓴 내가 움직였다.
"흥, 그딴 사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며 임나연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박력 있게 문을 열고 임나연을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휴지를 잔뜩 뜯고는 임나연의 무릎을 섬세하게 닦아주었다.
"주, 주인님...?"
임나연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임나연이 당황하건 말건 내 가면이 임나연에게 호통을 치며 말했다.
"명령을 하나 더 하지. 노예 주제에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말 것. 너는 내 노예야. 이딴곳에서 몸을 더럽히는 꼴을 보이면 전 세계로 임나연, 네 동영상이 퍼질 거야."
'스윗 시우…. 네놈...!'
내가 보기에는 처음으로 조교남이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임나연의 얼굴을 재빠르게 살폈다.
임나연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 아쉽다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화장실같이 더러운 장소에서 플레이하고 싶다니……. 냄새 패티시와 마마라고 불리고 싶어 하는 이지아가 갑자기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