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자들이 나에게 최면어플을 사용한다-9화 (9/298)

〈 9화 〉 이지아(4)

* * *

어둑해진 복도를 걸으며 훈련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문득 무언가를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심지만 남은 휴지를 본 기분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찝찝한 느낌.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느낌.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다가 임나연이 떠올랐다.

"……."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부실로 뛰어갔다. 어떻게 임나연을 잊어버릴 수 있지?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들키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세뇌에 걸린 척을 해야 할까? 임나연의 최면을 푸는 방법은 그녀의 박수 소리다.

재빠르게 부실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교실로 향했다. 가방을 챙기고는 부실로 향했다. 부실에 다가가니 무언가 역장 같은 것이 문을 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임나연은 아직 부실 안에 존재한다.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가면 창을 열었다.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레벨이 하나 올라, 레벨이 2가 되어버린 [관능 소설의 조교남의 가면]을 착용했다. 그리고 천수를 활성화했다.

손재주의 끝판왕인 천수?手.

온갖 무기를 다룰 때는 더 쉽고, 빠르고, 더 강하게 휘두를 수 있게 해주며, 숙련도를 높여줌은 물론이고 요리와 제작 같은 생활과 관련된 직종들과도 크게 연관이 있는 것이 손재주다. 천수?手는 관련 직종을 제대로 판 손재주보다는 못하지만, 폭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장점이 있는 특성이다.

딸칵.

천수의 힘으로 도적의 기술을 재현한다. 역장을 비집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모던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알몸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 내쉬는 임나연. 다행히도 아직 기절한 상태였다.

"...아름답구나."

임나연을 멍하니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와는 달리 별안간 내 가면이 중얼거렸다. 멋대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언젠가 밸런타인데이 때 선물이라며 선물로 받았던 하얀 고양이들이 그려져 있는 담요를 꺼내 들었다. 그 담요를 펼치고는 임나연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리고는 쭈그려 앉아 임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검은색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 조그마한 입술. 오뚝한 코. 학생, 이라고 보기보다는 연예인이나 배우에 어울릴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보니 또 천사같이 예쁘네.

"……."

내 가면이 임나연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람.'

10분 동안 임나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들은 생각이었다. 나는 일어섰다. 머리가 좀 차분해졌다. 임나연이 이렇게까지 기절해 있으니, 그냥 세뇌당한 채로 몰래 임나연하고 둘이 있을 때만 나쁜 척 연기를 하면 되겠지.

임나연이 대충 벗어둔 옷을 가지런하게 접어 두었다. 아티팩트는 그대로 두었다. 혹시 누가 임나연에게 나쁜 짓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럴 깡을 지닌 애가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나도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빠질 줄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나는 문을 나섰다. 이지아에게 다시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훈련소에서 체력을 단련해야 했다.

***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임나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마나로 느껴지는 그의 기척이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즈음이 흘렀을까. 임나연이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듯, 정신이 몽롱했다.

­아름답구나.

그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그 단어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미쳤어, 미쳤어!"

아름답구나. 이쁘다.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외모는 남달랐으니까.

남부럽지 않은 권력도 가지고 있었고, 어지간한 사회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많은 돈도 가지고 있었다. 권력과 돈과 외모. 거기다가 뛰어난 재능까지. 자연스레 그녀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노리는 날파리는 늘어갔으며, 나름 반반한 외모를 가지고 있던 애들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을 꼬시기 위해서 항상 자신에게 말했었던 단어.

"아으으으."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그녀의 가슴속에 와닿았다. 아름답구나. 그 한마디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단어 하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나름 시간이 지났건만 화끈한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선명해졌다. 아름답구나. 임나연은 몽롱한 표정으로 그 단어를 되새겼다. 그가 말한 것을 녹음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삐비빅! 삐비비빅!

그녀의 손목에 달려있던 스마트 워치가 울리기 시작했다. 임나연은 화들짝 놀라며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았다.

[최 쌤 : 임나연 님, 오늘 훈련은 쉬십니까?]

문자이건만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훈련도 있었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 30분. 훈련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바로 갈게요. 죄송해요, 잠깐 시우에게 개인 과외 좀 받느라]

문자를 보내고 몸을 일으켰다. 쉬고 싶지만 쉬어서는 안 되었다. 편의상 쌤이라고 저장했지만, 그녀는 임나연의 선배였다. 2학년 높은 3학년. 단련에 관한 고유능력을 개화한 사람이었다.

스카우트가 미리 접촉해서 그룹 단위에서 포섭한 인물. 그녀를 모시기 위해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가. 그 돈을 생각해서라도 그녀는 움직여야 했다.

[최 쌤 : 시우요? 이시우 말씀이신가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필기시험의 만점자라면 굳이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녕, 이미 공부 다 끝났어요. ㅎㅎ 바로 갈게요!]

[달려가는 토끼 이모티콘]

[최 쌤 : 네, 그러면 준비해 두겠습니다]

임나연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아티팩트를 회수했다. 그리고 개인 훈련실로 향했다.

****

영웅의 자질을 결정하는 것은 순도 100%의 재능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뛰어난 고유 특성과 스텟 성장률, 그리고 특성을 얼마나 '잘' 익히는가로 결정된다. 영웅을 목표로 한다고 가정하에 단련을 시작하면 보통 15세 전후로 고유 특성이 개방된다.

마나의 성질을 개변하며 평생을 함께할 능력. 그 능력은 가지각색이며 사람마다 달랐다. 그리고 피를 쏟을 정도의 노력이나 뛰어난 보물이나 신기로 등급을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비슷한 이름의 특성으로 변한다.

그 예가 바로 검술 완성자(A).

그리고 거기서 뼈를 깎는 노력과 피를 토할 정도의 시련, 혹은 죽을 위기. 어떤 신화의 잔재 등을 습득하게 되면 특성이 한 번 더 강화되며, S등급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유저들은 타이틀 칭호라고 부른다. 검귀(S), 검주(S), 천수(S)등...

'뭐, 어렵게 이리저리 설명했지만, 결국 직업 같은 거지.'

그러나 이것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고유적인 이름을 지닌 것들이 있다. 진화하지 않으며 오롯이 존재하는 특성. 내가 가진 천의 가면이나 지식열람, 천수같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특성들.

이지아가 가지고 있는 역천의 힘, 마도의 업.

용사들이 지닌 천상의 마?와 세계의 운명, 김하린의 광익과 중2병에 걸린 여자의 칠색七色같이 유저들 사이에서 고유 특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천의 가면은 이 특성들이 있는 인물과 어떤 관계를 맺냐에 따라 모방할 힘을 가지고 있고. 나는 마도의 업을 모방하는 가면을 썼다.

"생각보다 버틸 만하네."

가면을 쓰자, 마나가 역류하기 시작했다. 마도의 업이 가진 특성이었다. 역천의 성질을 가진 마도의 업은 사용자가 마나를 역류시킨다. 그렇기에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마법적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와는 크게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지아를 도와주면서 이것저것 알 수 있었고, 게임을 하면서 나름의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나는 바로 발동할 수 있었다.

'요건은 간단해. 심상을 펼치고, 마법식을 역순으로 마나를 돌려 펼치면 돼.'

물론 역순으로 마나를 돌려 펼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마법은 각각의 체계가 있으며 속성과 환경에 식이 변동되니까. 어디까지나 최하급 마법이기에 펼칠 수 있는 편법.

펼친 손바닥 위에 날카로운 돌풍이 생성됐다. 돌풍이 내 의지에 따라 10cm의 크기의 화살로 변형된다. 마법에 입문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최하위급의 마법, 풍시風?.

이지아가 펼친 것만 못한 바람 화살이지만, 그 크기는 처음 마법에 입문하는 학생들보다 압도적인 크기였다. 나는 주변에 널려있는 나무 중 아무 데나 가리켰다.

팍.

바람의 화살이 나무껍질을 꿰뚫으며, 나무에 반쯤 들어가 박혔다. 위력은 처음 펼친 것 치곤 나름 괜찮았다. 좀 더 날카롭게 버리면 아예 뚫어버릴 수 있겠는데.

'꽤 괜찮기는 한데.'

주력으로 쓰기는 애매했다. 용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김하린의 광익이 펼치는 역장이나 한종우의 갑옷도 뚫을 수 없는 공격력.

나는 천의 가면을 쳐다봤다. 관계도를 올리면 남의 고유 특성을 모방하는 힘...물론 한계가 있겠지만, 일부라도 쓸 수 있는 게 어딘가?

상상 이상으로 좋은 특성이었다.

'성장 방향이 이제야 좀 보이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모방할 특성 역시 정해져 있다. 광익과 칠색. 둘 다 범용성이 높고, 어떤 특성과도 잘 어울리는 특성들이었다. 마법에 접목해도 좋았고. 무공에 접목하면 더 좋았다.

용사들의 특성은 이용하지 않는다. 여자 용사가 가진 천상의 마는 너무 독보적인 특성이다. 어떤 특성과 융화되려 하지 않고, 다른 특성들마저 집어삼킬 힘이다.

남자 용사가 지닌 세계의 운명은 어떤 특성과도 어울리고 만능적인 특성이지만…….

'남자랑 섹스하는 건 좀.'

아주 싫었다. 아니, 절대 싫었다. 절대절대절대로! 차라리 마신에게 뒤지면 뒤졌지. 아무리 좋은 능력이면 뭐 하는가? 상대가 남자인데. 다른 S등급 특성인 절멸의 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공략해야 할 것은 중2와 김하린.'

중2는 공략이 쉬웠다. 좀 있어 보이는 척만 하면 호기심에 이끌려 알아서 해결될 테니까. 문제는 김하린이었다. 공략해도 문제고 하지 않아도 문제다. 사실 최대한 안 엮이는 게 좋은데 나름 쓸만한 동료랑 굉장한 보상이 얘랑 연관되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하린을 공략해서 광익을 얻으면 바로 기린의 던전에 도전할 수 있어.'

김하린의 광익의 특성과 기린의 던전에 유효한 공략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던전안에 잠들어있는 보상들까지.

'게임 내, 최속??의 속도를 자랑하는 풍뢰질주보. 그리고 현무의 던전에 잠들어있는 불사신공.'

번개의 힘을 담은 우레의 검. 폭풍의 힘이 담긴 활, 템페스트, 혼돈의 힘이 담긴 망치, 탐식과 빙결의 힘이 잠든 창, 천년 서리까지. 아카데미 밖에 던전의 보상들이 뇌 속에 떠올랐다.

'뭐, 일단 김하린을 공략해야겠네.'

나는 김하린과 연관된 어떤 남자를 떠올렸다. 아기돼지를 닮은 남자.

김호동.

그리고 최면어플이란 가짜 어플이 이 학교에 번지게 된, 원흉 중 하나.

'...그리고 진짜 최면어플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교장실이었다. 왜냐하면, 이 학교를 세운 교장 선생님께서 장학생들을 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전파했기 때문이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