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임나연(5)
* * *
"하."
김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자신을 도와줄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남한테 떠넘겨 버리다니, 어처구니없었다. 그녀는 잠시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이시우.
히어로 아카데미 필기 부분에서 최초로 만점을 받은 소년. 그는 히어로 아카데미 내외 안팎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소년이었다. 그의 답지를 보게 된 교수들은 아마 이론에만 전념하면 노벨상을 타도 이상하지 않는 인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인전이 약하다고 하지만 그가 다루는 기교는 학생의 것을 벗어났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조차도 감탄하며, 그와 같은 기교를 발휘할 수 있는 교수는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을 거다. 라는 말이 공공연히 퍼져있다. 그의 약점은 그 기교와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 없이 낮은 신체 능력.
`그것뿐만이 아니지.`
겉으로 드러난 능력이 이 정도인데 아직 개화하지 않은 고유 능력에 이사장이 언급한 `가면`의 능력. 여러모로 숨기는 것이 많은 소년. 그래서 그녀는 개인적인 정보망을 이용하여 알아보려 했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소심한 성격을 어필하며 도와달라고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소년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눈치챈 건가.`
내 본성을.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가 하는 행동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의 본성을 눈치챈 사람은 한 손으로 꼽는다. 자기 자신과 피가 이어졌던 것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혐오스러운 오빠라는 존재와 부모님. 그리고 800년을 살아왔다고 전해지는 히어로 아카데미의 교장.
그녀는 이시우라는 소년을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알았다면.`
때를 봐서 입막음해야 할 것이다.
***
지긋이.
옆자리에서 임나연이 나를 계속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까 김하린과 같이 등교하는 모습을 본 탓인가.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계속해서 초조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분은 좋았다. 전생의 나는 여자한테 인기 있는 삶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용만 당하는 위치였으니까.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얼굴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호감을 사는 편이 더 좋다.
……사실 진 엔딩에 대해서 몰랐다면 나는 이 시선을 즐겼을 것이다. 아니, 즐겼을 뿐일까. 아마 이미 몇 명과는 관계를 맺고 난잡한 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R.O.C가 몇몇 중요한 인물과 유물을 건진다면 쉬운 게임 이기는 하나 진 엔딩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볼펜을 돌리며 생각했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아카데미 1학년 장학생은 총 네 명이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용사. 남자와 여자 중 택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구성은 같았다. 용사와 광익光?을 가진 김하린과 칠색七色의 소유자와 `마도의 업`을 지닌 이지아.
그런데 현재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총 여섯 명이다. 용사가 혼자서 받는 구조가 아니라, 남자 용사와 여자 용사가 각자 따로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포함되었고.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암시하는 건……. 높은 확률로 진 엔딩 루트에 들어서는 것이다. 마신에 의해 모든 것이 멸망한 세계. 그것이 R.O.C의 진 엔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나네.`
처음 그 엔딩을 겪었을 때 정신이 멍했다. 게임을 하면서 무진장 욕을 했었지. 분양 엔딩도 거지 같았지만, 진 엔딩은 더욱더 거지 같았다. 아직도 그 엔딩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그러니까 마신 뚝배기를 깰 정도로 강해져야 해.`
다른 건 모두 뒷전이다. 우선 강해지는 것에 초점을 두자. 두 번째는 믿을만한 동료를 만드는 것. 이지아와 임나연은 믿음직한 동료다. 용사들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칠색의 소유자 역시 마찬가지. 좀 오글거리지만 속은 착한 애였다. 광익을 가진 김하린은 일단 보류. 얘는 내가 통제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래도 친해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친분만 쌓자.
드륵.
교실의 앞문이 열렸다.
"다들 아침부터 훈련을 열심히 하더구나."
잠시 우리를 훑어보면서 하얀색의 머리색이 인상적인 근육질의 갈색 피부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무기술 담당 교수로, 이름난 강한 자였다...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그는 한종우의 오른팔 격인 강한남의 형. 그리고….` 진짜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중격의 영웅의 일각이다.
비록 부상으로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고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물러났다고 해서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중격의 영웅 정도 되면 인맥도 장난이 아니니까.
"훈련할 때는 이른 새벽이 최고다. 마나가 가장 정순한 시간대이니까 말이다. 마나 훈련도 좋고, 육체 훈련도 좋다. 꾸준히만 정진해라. 뭐, 여기까지 와서 노는 학생은 없겠지만."
훈련에 대해 예찬하는 강한자의 말에 몇몇이 움찔거리는 게 포착됐다. 움찔거리는 녀석 중에 당연하게도 주연은 없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애들이다. 그들은 얼마 안 가 성적이 안 좋아서 퇴학당하거나 남들의 발판 역할을 해주는 녀석들이니까.
히어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끝이 아니다. 아카데미는 계속해서 학생들이 강해질 수 있도록 시련을 부여한다. 안주하는 순간 도태된다.
"예고했던 대로 오늘은 던전에 관한 이론을 실습한다."
강한자의 말에 보조 교관들이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눠줬다. 종이에는 빼곡하게 글자로 가득 찼다. 배부된 종이는 개인당 10장.
"너희들이 영웅이 되면, 많은 일을 겪을 거다. 던전부터 시작해서 유물 쟁탈전, 빌런을 죽이기 위해서 움직일 때도 있고…. 하지만 영웅이라면 기본적으로 던전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코카트리네.`
프린트의 내용은 간단했다. 코카트리네를 잡기 위해서 어느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가에 대해서 적는 것이었다. 옆에서 임나연이 끙끙거렸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특성상 이런 시험은 곤혹이겠지. 나는 「지식열람」으로 지식을 보며 종이에 코카트리네에 관한 것들을 쓱쓱 적었다.
`코카트리네는 방어력이 뛰어나며, 마나가 역전하는 마나 이상 공간에서만 생활한다.`
저주 마법이 깃들어 있는 마나 인형을 코카트리네에게 던져주고….
그다음 적당히 쓰고 일어나서 강한자에게 제출했다.
"...이론으로만 이루어진 공략법이지만. 발상이 놀랍다. 과연…. 이런 식으로도 볼 수 있는 건가.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필기 만점을 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건가. 아마…. 아니, 확실하게 이 이론대로라면 코카트리를 잡는데 엄청 효율적이겠지."
강한자가 내 답지를 보며 민망할 정도로 칭찬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10점 만점의 10점이다. 그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
"그럼 저는 훈련하러 가도 되나요?"
"물론. 수업 시간이 아직 2시간은 더 남았지만……. 이 정도의 공략 본을 만들었으니 상관없을 거다. 추후 이 학교에서도 수업 교재로도 쓸 수 있을 거다. 이 공략을 전당에 올리겠나?"
전당.
주로 영웅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이며 이곳에 올라오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돈값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몬스터들을 효율적으로 공략하는 공략본 등이 올라오는 사이트.
여기에 올린 공략이 협회에서 인정되면 가치에 따라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으로 나뉘게 되는데 여기서 등급이 가장 낮은 브론즈 등급을 받아도 평범하게 사치를 부려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들어온다. 그냥 공략을 올리면 한참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카데미의 이름이 얹힌다면 빠른 속도로 검토가 될 것이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내가 잘 말해놓으마."
2시간 남았는데, 뭐하지. 일단 휴게실에서 한 시간만 자고 생각해 볼까.
***
"시우야 오늘 공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며, 미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임나연이 옆에서 말하고 있었다.
"공부?"
"응. 나 필기가 약하잖아."
임나연이 책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고는 말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남친과 카톡 하느라 쳐 놀다가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끝마치지 못해서 일하는 것 좀 도와달라며 울상을 짓던 여직원은 그렇게 세상 좆같을 수가 없었는데 임나연이 하니까 세상 귀여웠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시험을 보고 통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전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임나연에게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으음."
"부탁할게! 이번에 또 미끄러지면 순위 추락한단 말이야!"
임나연이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순위 추락이면 정말 심각한 건데. 나는 맘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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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00]
[평온의 가면 Lv. 4]
마음이 불안정해질시, 평온함 보정
[헬창의 가면 Lv. 2]
운동 시, 신체 능력 성장도 보정
[휴식의 가면 Lv. 2]
휴식 시, 자연 회복속도 가속
[부동의 가면 Lv. 1]
행동 시, 정신과 신체에 부동 보정
[검사의 가면 Lv. 1]
검을 사용 시, 검술 보정
근력 +1, 민첩 +1, 체력 +1 보정
[창술사의 가면 Lv. 1]
창을 사용 시, 창술 보정
근력 +1, 민첩 +1, 체력 +1 보정
[관능 소설의 조교남의 가면 Lv. 1]
행동 시, 관능 소설의 조교남과 같은 행동 보정, 조교시 조교 효과 증가
지금까지 만들어 두었던 가면들이 상태창처럼 떠올랐다. 나는 전생에서 내가 들었던 몇몇 강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스타 강사, 스타 강사. 머리가 벗겨진 체 뇌쇄적인 표정과 몸짓으로 학생들을 가리키는 50대 남자 강사…. 씨발, 이게 아니라.
말을 잘하고 핵심 요약을 잘하는 강사를 머릿속에 그렸다.
▼
[스타 강사의 가면 Lv. 1]
강의 시, 상대의 집중 보정
뭐, 이 정도면 되겠지.
"어떤 부분이 약한데?"
"던전 내부의 마나 역학 계산?"
"솔직하게 말하면?"
"저, 전부..."
"……."
내 물음에 임나연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뭐, 대충 알고 있기에 그리 절망적이지는…. 절망적이었다.
"그럼 급한 것부터 하자. 마나 역장 식은?"
"……그것도 문제야."
"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 곧 수업이 끝나가는데 2시간 정도 시간을 내면 되겠지.
"나도 훈련이 있어서 많이는 못 도와주겠지만, 일단 2시간은 빼 올 수 있어."
"고마워! 내가 나중에 보답해줄게!"
***
아무도 없는 텅 빈 부실, 모던한 검은빛의 책상이 있었고, 새하얀 타일이 바닥에 깔린 고풍스러운 교실. 그렇다. 나는 지금 임나연의 희망 사항에 따라 강제로 그녀를 조교 하게 된 공간에 있었다.
"시우야, 이 부분은 어떻게 풀어?"
옆에서 임나연이 헤실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나는 임나연이 내민 문제를 쓱 보았다.
마나 측정기로 약 380,000의 마나가 측정된 던전이 있다.
이곳에 중하격 영웅 전사, 궁수, 마법사 세 명이 탐사를 나갔다. 그러나 상성이 안 좋은 보스 몬스터와 정예 몬스터를 마주하게 되어 이들은 하는 수 없이 후퇴하였다. 이들이 던전에서 최대 며칠을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시오.
맘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특전을 열었다. 지식열람이 내게 답을 알려줬다.
"최대 13일. 식량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나름 풍부하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으면 13일을 버틸 수 있네."
"와아, 보자마자 계산해낸 거야? 역시 똑똑하네."
임나연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나는 옆에서 식을 써주었다. 최대한 알아먹기 쉽게. 그러자 임나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 알기 쉬웠다.
"후, 오늘 공부는 여기서 끝."
"……?"
이제 공부한 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어처구니없어서 임나연을 바라보았다. 임나연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원래 사람은 억지로 무언가를 하면 스트레스받아서 건강에 안 좋아진대."
"……."
너는 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가면을 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흠흠."
임나연이 갑자기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임나연이 나에게 최면 어플로 심은 트리거가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손뼉을 치면 나는 최면에 걸린다.
"……."
드르륵.
임나연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문 중간에 달린 창문을 가리고 유물로 보이는 이상한 황금색 손잡이를 작동시켰다.
지이잉.
푸른빛의 역장 같은 것이 생기며 사방의 문과 창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밀폐된 공간이었다.
"....나연아...?"
"미안, 시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됐어."
아니, 도대체 뭘 참을 수 없게 된 건데.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억울했다. 필요한 수련 시간을 빼먹고 공부를 가르쳐 줬는데 왜 조교라는 하드한 일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그러나 내 심정과는 다르게 임나연은 붉게 달아오른 표정을 지으며.
짝.
그녀가 손뼉을 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