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임나연(4)
* * *
[따르릉 따릉.]
따르릉 따릉 울리는 시계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창문 너머 커튼의 틈새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민했다. 2시간을 더 잠에 취할 것이냐, 지금 일찍 일어나 아침 훈련을 할 것이냐.
사실 아침 훈련을 해야 하니 일어나는 것은 확정이다. 왜냐하면 훈련은 내 바닥을 기는 능력치를 올려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생."
한숨을 크게 내쉬며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을 틀어놓고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귀찮아져서 찬물로 세수했다. 아씨, 차가워! 그래도 몽롱했던 머리가 깨어났다.
나는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은 다음, 반바지를 벗고 운동복 바지로 갈아입고, 양말을 신고, 옷걸이에 걸려있는 저지를 대충 챙긴 다음 신발을 신은 다음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많은 학생이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대충 보이는 것만 300명. 여기가 1학년 기숙사고 1학년의 숫자가 1,000명임을 고려하면 약 30%가 밖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내에서 개인 훈련장을 이용하거나, 마나를 모으는 학생들도 있으니 그 숫자는 더 늘 것이다. 나는 학생 때 뭐했지. 더 잘려고 발악했던 기억은 선명하기는 한데.
가볍게 체조를 해서 몸을 푼 다음 특전을 사용했다. 특전, 천의 가면. 미리 저장해두었던 헬창의 가면을 착용한다. 효율적인 운동을 위해 신체 능력 상승보다는 성장치에 중점을 둔 가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얼굴에 쓰이는 것을 느끼며, 운동장으로 뛰었다.
뛰고 있자니, 반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아침부터 운동이야? 열심히 네."
운동복 복을 입고 말끔하게 포니테일로 머리를 뒤로 묶은 임나연이 내게 말을 물었다.
"육체, 훅, 능력이, 훅, 낮으니까."
나는 이 세계로 떨어진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체력능력이 매우 취약한 상태다. 나름대로 보정이 가해졌다지만, 아카데미 최하위권의 학생들과 비교해도 나는 그들보다 민첩도 낮고, 근력도 낮다. 마력은 당연하게도 바닥을 기을 정도로 낮다.
그런 내가 어떻게 아카데미에서 최상위권이냐 하면 그건 전부 특전들의 힘이었다. 천의 가면(S)과 지식열람(S)과 천수(S). 지식열람(S)의 힘으로 아카데미 최초로 필기시험 만점자에다가 천의 가면(S)으로 능력치를 올리거나 동영상을 참고하여 만든 검사나, 창술사의 가면을 이용해서, 손재주 보정의 끝판왕인 천수(S)로 이긴 것뿐이다.
'진짜 한숨만 나오는 특전 시너지네.'
천의 가면(S)은 좀 애매하지만, 천수(S)랑 지식열람(S)은 확실히 좋은 특전들이다. 천수(S)에 검귀(S)나 검주(S)에 천무지체(S)나 무극지체(S)면 이미 아카데미에서 어지간한 근접 전문 교수들조차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식열람(S)에 마존(S)이나 마도종주(S), 마력과 시너지 있는 특전이나 뇌신(S) 이나 풍신(S)같은 속성 특전을 택했으면 마도사로서도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특전을 대충 훑어본 내가 어째서 특전을 왜 이렇게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좆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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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시우
근력 : 8
민첩 : 10
체력 : 8
마력 : 5
고유 능력 : X
특성 : 천의 가면(S), 지식열람(S), 천수(S)
깔끔한 형태의 상태창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상태창 아랫부분에 비어있는 고유능력.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은 상태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상태창을 개화하고, 노력하면 고유 능력이란 것을 개화하게 된다.
고유 능력은 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고유 능력은 일종의 개성이며 내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침표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것이 아니다. 어떤 특성을 얻냐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니까.
나는 특전에 대해서 떠올렸다.
특전은 고유 능력들의 끝판왕들이었다. 검귀(S)는 쾌속검을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 가장 좋고, 마도황제(S)는 주위의 마력을 지배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즉, 나는 아직 고유능력을 개화하지 못했지만, 실상은 고유능력의 진화 형태를 3가지나 가지고 있다. 다만 단점도 있기는 하다. 그 위의 등급인 Ex등급으로 올리지 못한다는 것과 이것들 때문에 내 특성창에 다른 특성이 자리 잡지 못하는 것.
뭐, Ex등급은 진 엔딩까지 가도 두 개밖에 구경 못 하니까 상관은 없지만…. 진 엔딩이라고 하니까 마신에게 몰살당하는 루트가 떠올랐다.
제발 이 세상이 진 엔딩에 도달하지 않는 엔딩이어야 될 텐데.
"좋은 아침이야, 나연아."
어디선가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나연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나와 임나연의 거리를 벌린 잘생긴 남자가 눈에 띄었다.
한종우.
용사의 라이벌로 나오는 조연이다. 한국의 삼대 길드 중 하나인 창천??을 이끄는 광성자光?子의 아들.
주연과 조연 비율이 굉장히 높은 A반에서 가장 큰 파벌을 가지고 있고…. 현재 내 학교생활을 괴롭게 하는데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한종우의 일당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달려오고 있다. 수는 약 20명 정도. 진짜 심하네. 뛰던 걸 멈추고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헬창의 가면을 벗고, 회복력을 높여주는 휴식의 가면을 착용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던 것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괜찮아, 시우야?"
"뭐야, 벌써 지쳤냐?"
걱정이 담긴 임나연의 목소리와 비웃음이 담긴 한종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나연이 한종우를 째려보자 한종우가 나를 노려보았다. 뭐, 어쩌라고.
뒤에서 따라오던 한종우의 부하들이 임나연과 한종우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나를 비난하자니 임나연이 나를 감싸는 모양새여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너, 저번 주부터 느끼는데, 자꾸 시우한테 시비 건다?"
"시비라니. 나는 단지 사실을 말할 뿐인데."
한종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게임에서는 중2병이기는 했지만 나름 대범하고 나름 지도력이 있는 녀석이라 나름대로 인기 있는 녀석인데 얘는 임나연과 관련되면 항상 쪼잔해진다. 질투란 추하다.
"굳이 우르르 몰려가서 한 사람한테 뭐라 하는 게?"
"……너랑은 관계없잖아."
임나연의 말에 한종우가 삐진 표정을 하며 말했다. 남자가 저런 표정이라니. 좀 끔찍한데.
"너……하아. 됐다. 너랑 얘기하느니 벽이랑 얘기하고 말지."
임나연이 애꿎은 운동장 바닥을 쿵쾅거리며 한종우 파벌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말해두겠는데, 이제부터 시우를 괴롭히면 나한테 죽는다?"
"으, 으응. 알았어...."
임나연이 눈을 부라리며 한종우 파벌에게 말했다.
그 말에 한종우가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
이건 좀 꼬시네. 하지만 한종우나 임나연에 비하면 서민에 가까운 나로서는 한종우를 적으로 돌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간에 저기 가서 말리면 임나연은 내 말을 들어주겠지만, 한종우는 나를 더 미워하겠지.
"오, 뭐야. 다들 아침부터 열심히 훈련 중이네?"
가녀린 미성의 목소리가 그들을 갈랐다.
갈색빛의 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려오는 이지아. 이지아를 남몰래 좋아하던 한종우의 부하 B, 강한남이 손을 마주 흔들며 근엄한 척을 하며 인사했다. 남자답게 생겨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법한 호감형의 미남이었다.
"지, 지아야, 안녕. 너도 아침부터 열심히 운동하는구나."
"으, 으응. 뭐, 그렇지.……. 너도 열심히 하네?"
얼굴이 붉어진 부하 B의 인사에 이지아가 얼떨떨해하며 인사를 받아줬다. 나는 저 반응을 알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애가 자기한테 인사한 줄 알고 인사를 받아줬을 때, 인사한 애가 무안하지 않게 받아 주는 인사…….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 시우야. 이거 먹어."
이지아가 주저앉아 쉬는 내게 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내 옆자리에 딱 붙어서 품에서 투명한 봉지를 꺼냈다. 이쁘게 포장되어있는 쿠키들을 건네주었다. 살가운 행동에 얼떨떨해하면서 쿠키를 받았다. 학기 초에 여러모로 도와준 덕분인가. 그녀는 굉장히 살갑게 나를 대해줬다.
"어제 카페 가서 먹다가 네 생각이 나서 쿠키 좀 포장했거든."
"어, 고마워. 잘 먹을게."
"흠흠. 둘이 보기 좋군."
이지아의 말에 한종우가 흡족해하며 우리를 바라봤다. 임나연이 복잡한 눈으로 나와 이지아를 바라봤고.
이지아를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던 한종우의 부하 강한남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종우의 말에 떨떠름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난 갈게. 다들 열단(열심히 단련해라는 뜻)해."
괜스레 자리에 있기 불편해져서 나는 씻기 위해서 방으로 돌아갔다.
****
아침을 쿠키로 대충 때우고 학교에 가던 중, 핑크빛 머리의 여성이 여자애들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장면이 보였다.
"음."
유심히 보니 다들 방긋방긋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얼핏 보면 괴롭힘의 현장이 아닌 것 같으나 원작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알고 있다. 저 현장이 괴롭힘의 현장임을.
영웅이 되기 위한 아카데미에서 괴롭힘이라며 한탄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종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괴롭힘의 원인쯤 되는 인물들은 도중에 탈락하기 마련이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런 광경을 보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은 당연하게도 아니다.
왜냐하면 괴롭힘당하는 핑크빛 머리색의 소녀, 김하린이 나한테 나름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구하지 않아도, 용사가 알아서 구하겠지만….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름 도움이 되는 인물이다. 비록 그녀가 뉴비 학살자로 악명이 높으며 온갖 배드 엔딩의 루트를 가지고 있고, 후에 빌런으로 타락하는 루트가 있지만…….
그녀가 용사에 편에 붙는 루트도 있다.
용사에 편에 붙으면 나름 쓸만한 동료가 된다. 무엇보다 그녀를 초반에 동료로 삼을 수만 있다면, 이론상 최상위권의 던전을 손쉽게 클리어하는 것도 간단하다.
'다만 빌런이 되는 루트가 너무 문제라서 그렇지.'
빌런이 되는 루트의 그녀는 굉장히 까다롭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유 특성이 '정의의 편에 선 영웅'들 중에 최상위 격의 영웅들의 특성을 카운터 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격도 지랄맞지.'
하지만 나는 이내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적으로 돌리면 굉장히 까다로우니까. 약간의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린아."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휙 돌아봤다.
"찾았는데 어딨었어?"
"어, 어...?"
"나연이랑 지아가 아까부터 찾아다녔는데."
"이, 임나연이랑 이지아요?"
분홍빛의 소녀, 하린이를 괴롭히던 3인방 중 한 명이 말했다.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 역시 팔아먹길 잘했다.
"응. 아…. 미안. 혹시 급한 얘기 하고 있었어?"
"아, 아뇨. 얼른 데려가세요."
손사래 치며 슬금슬금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야 임나연이랑 이지아랑 친하다는 말은 없었잖아!
나, 나도 몰라, 아씨, 어떻게 된 거지?
돌아보니 김하린이 눈에띄게 안도 하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
"아, 감사합니다. 시우 씨 맞으시죠?"
"감사는 뭘, 같은 반끼리."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동갑이니 말 편하게 하라고 하고 싶지만 소심한 성격인 '척'하는 김하린이 바로 말을 놓을 것 같지도 않다.
천의 가면의 부가적인 효과인가. 아니면 내가 그녀가 연기하고 있음을 알아서 그런가. 그녀가 '연기'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보였다.
"괴롭히는 것 같아서 도와줬는데, 혹시 오지랖이었나?"
"아, 아뇨...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그녀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누가 봐도 도움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표정.
그러나.
나는 그녀의 연기에 속지 않는다. 이 성질 고약한 여자를 도와주게 되면 이것을 핑계로 주인공을 이리저리 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속으로 낄낄거리면서 주인공을 굴리는 것을 즐긴다. 여기서 루트를 잘못 선택하면 주인공인 용사의 배때기에 칼을 꽂아버리고 빌런 측에 넘긴다.
아마 내가 당한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음을 맞겠지.
하지만 주인공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고유 특성으로 어찌어찌 위기를 넘기며 그녀와 마찰을 빚으며, 결국 나중에 그의 성정에 감화된 '척'하며 '구원'받고는 용사를 이용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바로 여섯 번째 엔딩.
'정말 꿈도 희망도 없네.'
그렇다고 도와주지 않자니,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얼마 안 가서 퇴학 처리 당하는 저 여자들이 김하린의 화풀이에 휘말려 어느 날 시체가 되어서 그녀들에 부모님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반에 은발 머리 알아?"
"은발 머리요? 네, 그분은 엄청 눈에 띄시니까요."
김하린이 의아해하며 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이 이런 거에 전문이거든. 걔한테 한번 상담해봐."
바로 주인공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