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임나연(2)
* * *
약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월요일. 평소와 같이 회사에 출근할 준비를 하려고 6시에 일어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뒤바뀌었다.
아침에 가족끼리 밥을 먹어 아빠가 보는 뉴스를 뻔히 보고있다가 어느샌가 습관이 되어버린 아침 뉴스를 보고 있었더니, 뜬금없이 마나니, 영웅이니, 괴수라느니 뉴스에서 떠들고 있었다.
처음에 든 생각은 몰카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뉴스를 바꿀 정도로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아침 뉴스에 저런 보도라니?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도 있었다.
샤워하러 화장실에 가보니 거울에 있는 나는 20살로 어려졌었다. 거기다가 엄청 잘생겨졌다. 이목구비가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는데, 잘난 부분은 더 잘나졌고, 못난 부분은 사라졌다. 일종의 최적화 한 형태로 잘생겨진 상태였다. 슬쩍 상의를 걷어보니 선명한 식스팩도 생겼다. 분명 좋은 변화였다.
가족들은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부모님이 10년 정도 더 젊어지셨고, 영웅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었다는 것과 여동생이라는 놈이 더 철이 없어진 정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다가 알 수 있었다.
내가 온 세계가 게임 속 세상이란 것을.
R.O.C
줄여서 로크라는 이름의 게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시작했던 게임이 어느새 내 인생 게임이 되었고, 여러 번의 엔딩을 볼 정도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에게 메일이 왔다.
특전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이 게임의 애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게임의 이름은 뭐가 약자인지 제대로 나오지도 않으면서, 게임은 한없이 불친절했고, 남자 주인공은 알콩달콩한 사이였던 히로인들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엑스트라들과도 이어지지 않았다. 분양 엔딩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주인공이 고자 새끼 였다.
이 엔딩을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엔딩은 주인공 혼자 사는 것이었고 연애질하던 히로인과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특전이라니? 일말의 애정조차도 없어진 나는 게임을 켠 다음 특전이 궁금해서 한번 확인해 봤다. 특전은 확실히 엄청난 효과들을 가지고 있었다. 잘만 조합한다면 진 엔딩의 보스를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게임에 애정이 식었던 나는 대충 아무런 특전이나 섞어서 넣어버렸다.
천의 가면(S), 지식 열람(S), 천수(S)가 바로 그 특전의 정체였다.
그리고 나는 그 특전을 가지고 이 세계에 들어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너무 혼란스러워 한동안 집에 처박혀 있었다. 주위에서는 걱정도 많이 받았고. 일주일 정도 폐인처럼 지내다 털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니 그나마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다행인 것은 가족들이 그대로였고, 내 인간관계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이 게임의 주인공인 용사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
바뀐 것이 있다면 내가 `영웅`을 지망하는 학생이라는 것과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과.
"씨발."
내가 다시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
나는 현재 부실로 향하고 있다.
내가 동아리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임나연이 나를 부실로 불렀기 때문이다. 부실로 향하면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솟구쳤다. 그 어플을 할 때 너무 리얼하게 연기했다.
천의 가면은 과연 특전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했다. 만약 내가 배우였다면 어마어마한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혹시 그걸로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머리를 헝클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임나연에게 찍히기라도 한다면 나 혼자만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뭐, 임나연은 그래도 선?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괜찮겠지?
속을 앓으며, 이동하니 동아리 부실 문 앞까지 당도했다. 임나연 정도의 능력자면 내가 앞에 있던 것도 눈치챘을 거다. 여기까지 왔으니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도망친다는 선택지 자체도 없지만.
나는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임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곤 문을 열었다. 교실이 보였다. 백색 빛의 타일. 모던한 색의 검은색의 의자와 책상 따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옛 왕이나 귀족들이나 쓸법한 거대한 의자가 보였다. 아마 임나연의 쫄다구 중 한 명이 임나연에게 바치겠다고 학기 초에 낑낑거리며 들고 온 것이 떠올랐다.
그 거대한 의자 옆에 조그마한 의자가 있었다. 그곳에 임나연이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좋은 부실이네."
"응. 이사장님이 신경을 좀 써주셨어."
"근데 나는 왜 여기에 불렀어?"
"으, 으응. 잠깐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녀가 실실 웃으며 내 말에 답했다. 그러고는 잠깐 어물쩍거리다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스마트 폰을 꺼내며 내게 보여줬다.
핑크빛과 보랏빛이 엉켜 소용돌이치는 모양이 보였다.
...최면어플이었다.
또? 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플을 바라보며 자기 세뇌를 시작했다. 나는 최면에 걸렸다. 나는 최면에 걸렸다.
무언가가 내 얼굴 위에 `쓰여`졌다. 의식이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머리가 멍해졌다. 멍하니 스마트 폰을 바라보았다.
"좋아. 성공했어!"
그녀가 주먹을 쥐곤 파이팅 자세를 하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다가 침을 한번 삼킨 뒤에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녀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시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세요."
머리를?
생각보다 별거 없었던 명령에 나는 손을 들어 임나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손에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헤, 헤헤."
임나연이 내 손길에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임나연은 지금까지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었다. 부하라고 칭해도 될 존재는 많았지만, 정작 그녀에게 친구로서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랑 나름 친한 관계가 되었겠지. 나는 그녀를 편하게 대해준 몇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내 손길을 느끼며 실실거리는 임나연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런 것도 집에서 부성애를 느끼지 못해 나한테 그걸 느끼고 최면으로 이렇게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임나연하고 친해질 기회.
...나는 쓰레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신경 써서 임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가짜인 어플인데 시우한테 통하는구나!"
그렇게 3분 즈음 지났을까, 임나연이 환호하며 말했다. 그녀는 곧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스마트 폰을 들이 내밀고는 말했다.
"시, 시우는 여기 의자에 앉아줘."
나는 그녀의 명령에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푹신 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마법 물품이겠지. 역시 비싼 의자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의자에 앉으니 그녀가 나에게 스마트 폰을 들이밀며 말했다.
"시, 시우님. 오만하게 앉아주세요."
오만하게? 근데 시우 님은 또 뭐야. 어울리지 않은 존댓말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어느새 슬쩍 턱을 젖히며 다리를 꼬곤 편하게 앉았다. 내 행동에 그녀가 만족한 듯 웃으며 다시 한번 명령했다.
"시, 시우가...좋아하는...아니, 이건 아니야."
`어....?`
그녀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라는 건가? 임나연이 나를 좋아했다고? 나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시우 님은 나를 조교 하고 싶어집니다."
`……………………………………………………¿?¿?¿?¿?`
"시, 시우 님은 나를 굉장히,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신분의 장벽이 있으므로 저랑 사귈 수 없단 것을 깨달은 시우 님은 저의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됩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취향은 개인마다 다르니까 존중 못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정도란 게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 조교라니?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데. 내 취향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저와 시우님, 단둘이 있을 때, 제가 손뼉을 치면, 시우 님은 이제 눈앞에 있는 임나연을 길들이고 싶어 합니다. 임나연을 길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손뼉을 치면."
꿀꺽.
침을 삼키는 임나연의 눈이 여러 개의 감정으로 뒤섞였다. 묘한 열기와 욕망, 두려움과 환희. 그 감정들이 뒤섞여, 엉망진창으로 바뀐 듯한 눈.
"기억을 잃고 평소와 같이 행동하게 됩니다."
짝.
그녀가 손뼉을 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옛날 동생 때문에 보게 된 관능 소설에 나쁜 남자가 떠올랐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리고 비열하게. 그러자 무언가가 내 얼굴 위의 `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의 가면의 효과가 발동되었다.
"설마 그 임나연이 이런 취향이었을 줄이야."
마음속으로 심호흡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녀를 조교 하는 것. 치명적인 약점은 또 뭘까.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단 제쳐두자.
툭툭.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 손잡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이게 퍼져나가면 어떻게 될지는 알지?"
"큿."
임나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입가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명백히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무릎이 빳빳하네."
임나연을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로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압적으로.
"꿇어."
내 말에 임나연이 머뭇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아래에서 굴욕스러운 자세로 무릎을 꿇으며 나를 보는 임나연이 보였다.
"보기 좋네."
"……."
임나연의 굴욕을 감내하는 듯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임나연의 턱을 들어 올려 내 얼굴 쪽으로 끌어당겼다.
굴욕과 환희라는 감정이 뒤범벅된 눈동자가 보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전전긍긍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조교에서 봤던 것은 발에 입맞춤시키는 거랑 채찍질 정도나 발로 얼굴을 밟아 굴욕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너무 하드했다.
적당히 굴욕을 주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만약 내가 너무 심하게 선을 넘는다면? 그래서 눈 밖으로 나간다면?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도 내 입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벗어."
`씨발.`
나는 아연실색했다. 특전이 떠올랐다. 천의 가면. 이것 때문이다. 어떤 역할을 정하면 그 역할에 따라 능력치와 인격을 만들 수 있는 특전.
"버, 벗으라고? 어, 어떻게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차라리 죽여!"
임나연이 짜내듯 말을 내뱉으며 치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 즐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