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
답답한 빌딩 숲이 아닌 진짜 숲길과 바다를 본 사람들은 싸늘한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느낄 줄 몰랐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야 숙소로 돌아와 본격적인 워크샵 일정을 시작했다.
사실 워크샵에서 반성회를 갖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었으나, 하반기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된 터라 형식적이고 따분할 반성회마저 화기애애했다.
숙소와 함께 미리 예약해 둔 야외 테라스에서 바비큐 그릴 파티가 열리고,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집까지 돌아갈 걱정도 없겠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람들 사이에 화기애애한 웃음이 떠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워크샵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와중에도, 다경만은 생각이 딴 데로 가 있었다.
바로, 모든 팀원이 참석한 가운데 유일하게 이 워크샵에 빠진 한 사람. 도하 때문이었다.
하필 워크샵 날짜에 중요한 바이어와 미팅이 잡혔다는 그는, 모두가 함께하는 이 자리에 홀로 참석하질 못했다.
[많이 바빠? 밥은 먹었어?]
다경이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내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미팅이 끝나질 않네.]
[뭐라도 좀 챙겨 먹으면서 하지. 힘내. 들어갈 때 전화 주고.]
다경이 아쉬운 마음을 문자 몇 통으로 뒤로한 채 대화를 마무리했다.
도하도 함께 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텐데. 하필 오늘 같은 날에 그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다경은 내심 아쉬웠다.
사실 매일 같이 회사에서 보고 있는 터라, 겨우 오늘 하루 못 본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서로를 향한 욕심과 그리움도 가눌 수 없을 만큼 심해진다.
“이 정도면 중증이네, 정말.”
매번 도하 더러 심하다고 타박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저 또한 그 못지않게 도하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자꾸만 마음속을 맴도는 미련을 털어내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찰나였다.
“어, 다경! 여기 있었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던 송 과장과 미애가 다경에게로 다가왔다.
“다녀오셨어요? 화장실이 먼 가봐요. 한참 걸리셨네.”
“아··· 화장실은 이 근천데, 좀 큰 걸 누느라.”
“아아···.”
의도치 않게 TMI를 접한 다경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어린다. “앉으세요.” 하며 다경이 마른 입을 축이려 잔을 들려는데, 미애가 가만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저, 대리님. 우리 모처럼 놀러 왔는데 이러지 말고 요 앞에 바닷가나 잠깐 다녀오면 어때요?”
“이 시간에?”
다경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술자리가 한창 진행 된 터라 밖은 이미 해변과 바다의 경계도 구분되지 않을 만큼 까맣게 저물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굳이 바닷가를 다녀오자니.
“바단 오늘 낮에도 많이 봤잖아.”
“뭣 모르는 소리 하는 거 봐라!”
다경이 굳이 그럴 거 있냐며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옆에 있던 송 과장이 테이블을 탁치며 다경에게 말했다.
“원래 겨울 바다는 밤에 보는 게 짱이야!”
그런가? 오히려··· 너무 추워서 얼어 죽는 건 아니려나.
다경이 대꾸 없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송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옆에 걸어둔 다경의 점퍼까지 챙겨든 미애가 송 과장에게 눈짓하며 다경을 부추겼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얼른 가시게요. 정 춥다고 하심 제가 제 목도리도 대신 둘러드릴게요.”
결국 둘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다경은 반강제로 밤바당 구경에 나섰다.
바비큐장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싸늘한 밤바람이 쨍하게 코끝을 스쳤다.
“역시 너무 추운데.”
“추우니까 좋은 거지! 젊은 애가 낭만이 없어, 얜!”
춥다는 소리 한 마디 뱉었다가 졸지에 낭만 없는 젊은 애가 된 다경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래도 여전히 춥긴 추웠으나, 그나마 견딜만 한 것은 이 추위 속에서도 함께 걸어줄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긴 좋네, 밤바다도.
다경은 앞서 걷는 미애와 송 과장을 따라 걸으며 멀리서는 그저 검게만 보였던 겨울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비큐장에 있을 땐, 숙소의 환한 불빛 탓인지 유독 검고 위험해 보였는데 이렇게 가깝게 다가와 보자 마냥 어둡지만도 않았다.
게다가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솨아, 솨아아- 모래를 쓸며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어쩐지 운치 있게 느껴진달까.
기왕이면 도하도 같이 와서 걸었음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운 생각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 있을 때.
“어라아? 저게 뭐지?”
“그러게요. 이 밤에 뭐가 있나?”
앞서 걷던 두 사람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갑자기 뭐지?
바다도 아니고,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 어딘가를 삿대질하는 둘을 보며 다경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밤에 바다에서 무슨 행사라도 하는 걸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뭔가 눈에 보이긴 했다.
“뭐야, 뭐야. 저게에?”
“그러게, 뭐지?”
어느새 다경의 뒤로 걸음을 뺀 두 사람이 다소 어색한 어투로 말했다.
대체 뭔데 다들 저러나.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저를 둔 채 뒤로 빠지는 두 사람을 보곤 다경이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딜···.”
새카맣던 어둠 속에서 불현듯 불빛이 비치더니 어딘지 낯익은 인영이 흐릿하게 망막을 파고들었다.
“어머, 저게 누구야?”
“권 팀장님 아니에요?”
동시에 무심코 어둠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다경의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정말로 도하였다.
방금전까지 서울에서 바이어와 미팅 중이라던 그가 주황빛 촛불이 수놓인 길의 끝에서 뭔가를 든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어머! 이 아래 좀 봐봐. 뭐라고 적혀 있는데?”
생각지 못한 존재의 등장에 걸음을 움직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다경에게로, 송 과장과 미애가 호들갑을 떨며 바닥을 보게 했다.
그러자 대체 무슨 상황인지, 보고도 눈을 의심하던 다경의 눈으로 하늘거리는 불빛 아래 놓인 작은 플래카드들의 문구가 차례로 파고들었다.
[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게.
[평생 웃게 해줄게.]
이게 대체 다 무슨···.
[10년 전에 같이 못 봤던 새해 일출.]
[바뀌는 해마다 너랑 같이 보고 싶어.]
[눈 감는 마지막 해까지 너랑 함께 보고 싶어.]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줄래, 다경아?”
이끌리듯 옮겨간 걸음의 끝에서. 플래카드 문구 대신 귓속을 파고든 목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상자를 들고 선 그의 얼굴이 다경의 망막에 맺혔다.
“너··· 이걸 다 언제.”
그저 미팅 때문에 못 오는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다경이 당혹감과 감동이 교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송 과장님이랑 미애씨 도움 받아서 준비했지.”
도하가 잘생긴 입술을 비긋이 말아올린 채 다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가자고 한 거야, 정동진으로. 10년 전에 같이 가려다가 못 갔잖아.”
“아···.”
그제야 다경은 오늘 이 장소가 어쩌다 결정된 것인지를 깨닫곤 나지막한 탄식을 뱉고 말았다.
어쩐지 매년 근처 가까운 곳에서 이뤄졌던 워크숍이 갑자기 웬 강릉으로 정해졌다 싶었더니, 그 안에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을 줄은···.
“그날 너한테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애꿎은 너만 원망했는데.”
뜻밖의 상황에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다경에게로 도하가 이윽고 진실 된 목소리로 고백을 이어갔다.
“얼마 전, 너희 어머니랑 네가 나 때문에 부담스러움을 느낀다는 말을 듣고부터 계속 고민했어. 어떻게 하면 내가 주는 도움이 두 모녀에게 부담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방법은 하나 뿐이더라고.”
“그건···.”
“너랑 내가, 그리고 네 어머니가 서로 가족이 되는 거.”
그날의 그 고백으로 인해 도하가 내렸다는 결론에 다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뻥긋거렸다.
그러자 도하가 차가운 바닷바람에 차게 식은 뺨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지며 간곡하게 속삭였다.
“네가 웃는 순간, 그리고 우는 순간.”
“···.”
“네가 숨 쉬며 겪는 모든 순간순간들에 내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다경아. 이조차 너한텐 욕심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네 뒤꽁무니 쫓는 데 이골이 난 인생인데.”
“도하야···.”
“뭐, 네가 아직은 아니라고 하면 내년에 또 여기 와서 이짓하면 돼. 결혼은 안 해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새해 일출은 나랑 봐야할 테니까.”
나직이 그를 부르는 소리를 가로막으며, 그가 뻔뻔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근데 어차피 그렇게 될 거 여러번 고생 시키지 말고 그냥 이번에 받아주면 어때? 이거 준비하는 거 꽤 빡세던데. 100프로 핸드메이드 이벤트.”
이래놓곤 대체 어떻게 제게 이 프로포즈를 거절하라는 건지.
감동하던 것도 잠시. 순간 헛웃음이 터져버린 다경이 샐쭉하게 눈을 흘기며 도하를 향해 말했다.
“애초에 계산 마치고 준비한 거 아냐? 내가 거절 못 할 거라는 거.”
그냥 이번에 받아주면 어떠냐고.
다소 뻔뻔하고도 귀엽게 거들먹대던 그의 눈이 그 순간 생각지 못한 말이라도 들은 듯 커졌다.
“뭐야. 그 말은··· 그러니까.”
귀여워.
“내 대답은 이거야.”
덥석, 그의 뺨을 붙잡은 다경이 바람에 차게 식은 입술 위로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평생, 마지막으로 눈감는 그 순간까지.”
“···.”
“같은 하늘 하늘 아래서 매일 같은 해를 보고··· 같은 꿈을 꾸자, 도하야.”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팡- 하고 폭죽이 터졌다. 덕분에 깜짝 놀란 다경이 뒤늦게 그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화들짝 도하의 뒤를 바라보았다.
“이건 우리 둘이 두 사람에게 주는 선물.”
그러자 같이 와놓곤 잊고 있었던 미애와 송 과장이 환호와 함께 두 손을 흔들었다.
“아, 뭐예요. 창피하게.”
때늦은 창피함을 느낀 다경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창피하다는 사람이 우리 둘 있는데 그렇게 뽀뽀를 하셨어요?”
“아이참, 과장님!”
송 과장과 미애의 휘파람 소리와 다경의 비명 소리가 함께 너른 겨울 해변을 떠돌았다.
밤바다를 가르는 싸늘한 겨울바람도 더는 차갑지가 않다.
따스한 봄도, 추운 겨울도, 매일매일을 함께 할 둘이 있기에.
* * *
결혼식은 측근들만 초대한 채로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엄마와 함께하는 저와는 달리 도하는 삼촌을 제외한 친인척은 초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다경은 안타까워 했으나 도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마 삼촌은 알고 있으니, 엄마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겠냐며 나름의 합리화를 한 채.
봄에 핀 꽃처럼 어여쁜 신부가 거울 앞에 선 대기실에, 똑똑-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고 다경이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근사한 턱시도 차림의 도하가 대기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예쁜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지만. 하··· 진짜 정신 나가게 예쁘네.”
거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는 다경을 보며 도하가 그 다운 감탄사를 쏟아냈다.
“너 어디 가서 그럼 팔불출이라고 그래.”
늘상 듣는 말이라지만, 오늘 같은 날 듣자 또 다른 민망함이 몰려와 다경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근데 인간적으로 드레스 너무 파인 거 아냐? 골도 보이고.”
“드레스 투어 땐 예쁘다더니, 왜.”
“그야 나 혼자 보기에 좋다는 거지, 딴 놈들 있는데서 보여줄 생각은 없었거든?”
아무튼 권도하 다운 발언이다.
“그럼 어떡해? 드레스 때문에 식 미뤄?”
다경이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배짱 있게 묻자, 그가 잠시 째려보는 듯 하더니 이내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쩜 저리도 속이 훤히 보이고 귀여운지.
좀 밉살스러운 말을 해도, 때문에 결국 저도 그냥 넘어가게 된다.
“좀 보이면 어때, 도하야. 어차피 누가 보든지 말든지, 이미 네 건데. 응?”
다경이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애교있게 속삭였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다경의 애교에 근사하게 차려입은 도하의 뺨이 답지 않게 붉어졌다.
“하씨,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섰잖아. 좀 있음 손님들 들이닥칠텐데 어쩔 건데, 이거?”
“뭐?”
“방금 들어오면서 보니까 대기실 문도 잠기던데. 빨리 한 발 뺄까?”
정말이지 한 시도 마음을 못 놓겠다.
“뭐래는 거야, 진짜. 절루 가! 이 변태야!”
다경이 매일매일 듣고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 그의 발언에 화들짝 팔에서 떨어져 나오자 그가 빙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어쩔거야, 이 변태가 1시간 뒤면 오롯이 네 건데.”
그 말을 또 이런 식으로 받아치는구나.
기가 찬 나머지 결국 다경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지고 만다.
“사랑해, 윤다경.”
다경의 얼굴을 그대로 붙잡아 키스한 도하가, 살짝 입술을 뗀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 도하야.”
“아마 그건 아닐 텐데.”
다경의 사랑스러운 화답에 그가 단정 짓듯 말했다.
누가 누굴 더 사랑하건, 그런 건 어차피 중요치 않다.
많고 많은 인연 중에 하필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가슴에 품은 그 순간, 이미 다른 이는 돌아볼 수도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이렇게, 하루 하루 더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다경이 단단하고 너른 그의 품에 폭 안겼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