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8.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누군지 확인만 좀 해 보고.”
걱정스런 눈초리로 휴대폰을 눈짓하며 말했다.
벌써 시침이 9를 향해 가까워지는 시각. 이 시간대에 제게 전화를 걸어올 이는 어지간해선 없었다.
별 게 아니었음 싶지만, 어쩌면 또 급한 용건이 있는 전화일 수도 있었다.
“하···.”
연거푸 방해를 받은 도하의 목울대를 뚫고 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틀린 말도 아니라 더는 발정난 개새끼처럼 밀어붙일 수 없어, 도하가 다경에게 기울어져 있던 몸을 다시 반쯤 일으켜 세웠다.
다경이 미안하다는 듯 눈매 끝을 접으며 테이블 위로 손을 옮겼다.
별로 급한 전화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액정을 확인한 순간. 다경의 눈에 정말 의외인 발신자의 이름이 파고들었다.
[유미 아줌마]
다경의 모녀의 바로 옆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는 아주머니로부터 온 전화였다. 지금 현재 제 엄마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유일한 사람.
아주머니께서 이 시간엔 왜···.
차라리 그냥 회사 사람이었다면 무시하고 말았을 텐데, 괜스레 엄습해 드는 불안감에 급히 수신 버튼을 누른 찰나.
“여보세···.”
― 다경아! 나 유미 아줌만데. 방금 네 엄마가···!
아주머니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다경의 귓속을 날카롭게 관통했다.
* * *
다급한 발걸음이 새하얀 복도 가운데를 빠르게 지나쳤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린다.
시린 밤공기 사이로 뿌연 입김이 어지러이 번졌다.
“저기 있다, 응급실.”
초조함이 극에 달해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다경을 붙잡으며 도하가 병원 건물 끝에 있는 유리문을 가리켰다.
어떡해···.
떨리는 손을 파르르 움켜쥔 다경이 서둘러 응급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디 계신 거지. 초조하게 응급실 안을 둘러보는 다경의 귓속으로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뭣하러 전화는 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뭐가 별거가 아냐! 여기 이렇게, 벌겋게 다 벗겨졌는데.”
응급실 맨 끝 베드에 앉아, 마찬가지로 낯익은 이와 웬 실랑이를 벌이는 얼굴이 초조히 굴러가던 눈동자에 잡혔다.
오른쪽 팔부터 손까지 붕대로 칭칭 동여감은 채 앉아 있는 엄마의 모습이.
“전화기 이리 줘! 내가 다경이한테 올 거 없다고 할 테니까···.”
“엄마!”
다경의 다급한 목소리가 좁고 허름한 응급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동시에 전화를 주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이어가던 두 중년 여성의 고개가 응급실 입구를 향해 꺾였다.
“어머, 왔네. 왔어!”
“에휴···.”
보자마자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는 유미 아줌마와는 달리 한숨을 폭 내쉰 엄마가 맥 빠진 얼굴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다경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빠르게 엄마가 앉아 있는 베드 앞에 다다랐다.
“아 뭐 한다고 밖에 있는 애는 불러서···.”
“그러게 내가 치료 받으시라고 했지!”
날카로운 고함이 좁은 병실을 가로질렀다.
“아, 글쎄! 물집 좀 잡힌 거 가지고 뭐 이리 소란이야? 괜찮대도.”
“그러다 다른 데라도 다치셨음 어쩌려고!”
오는 내내 마음을 졸였던 다경의 눈동자 위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조금 전, 유미 아줌마로부터 전화를 받고부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하고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전화를 받은 순간 전해 들은, 엄마가 팔에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
안 그래도 몇 달 전에 삐끗한 뒤로 성치 못하다는 허리가 영 불안했던 그녀였다. 때문에 병원에 좀 다녀오시라고 몇 차례 등을 떠밀었으나 엄마는 매번 괜찮다며 차일피일 치료를 미루었다.
그러다가 하필 오늘, 저녁 손님이 많아 욕심껏 뚝배기를 나르던 중 허리가 삐끗해 넘어지는 바람에 팔팔 끓는 국밥을 쏟은 오른팔 전체에 화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보기만 그래. 간단히 열 빼고 처방 받아 돌아가면 될 걸 굳이 너까지 불러선···.”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팔을 애써 뒤로 숨기며 엄마가 애꿎은 유미 아줌마를 가늘게 흘겨보았다.
“2도 화상이라며. 3도는 피해서 지금 괜찮다고 하시는 거야?”
다경이 기가 찬 얼굴로 잔소리를 쏟아내자 엄마가 듣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다.
아무튼 이 아줌마 정말, 나이 드시더니 쓸데없이 똥고집만 느셔선.
“어디 좀 봐. 치료는 제대로 받은 거야? 응?”
“아휴, 뭐 이렇게 유난이야! 병원 왔음 당연히 제대로 치료받았지.”
엄마가 붕대 감은 팔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다경을 밀어내며 부러 태연하게 말했다.
말이 2도지, 뚝배기에 뎄으면 엄청 뜨거웠을 텐데.
울컥 목울대를 치받는 미안함에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난 이런 줄도 모르고 도하가 차려준 밥이나 먹으면서 도하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니···.
“안녕하세요, 어머니.”
그때, 다경의 등 뒤에서 예의 바른 목소리가 넘어왔다.
“다경이가 많이 놀라서 그래요. 저랑 있다가 소식 듣고 울면서 뛰어온 거라.”
전화를 받고부터 떨림이 가시질 않던 작은 어깨를 다정히 붙잡아 주며, 도하가 그녀를 대신해 다경의 불안을 전했다.
“아니, 뭐 한다고 바쁜 사람까지 달고 왔어.”
그제야 한층 누그러진 엄마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보나 마나 엉망일 쪽 찐 머리를 뒤늦게 쓸어넘겼다.
“하필 꼬라지도 추레한데 낯부끄러워 죽겠네, 진짜. 이럴 줄 알았음 머리라도 한 번 빗고 있는 건데···.”
“엄만 지금 그게 중요해?!”
다경이 버럭 언성을 높이며 엄마를 나무랐다. 그러자 엄마 또한 “엄만 뭐 여자 아니니!”하며 되레 소리를 높였다.
불안감이 가시고 안도감이 찾아든 자리에 뒤늦은 웃음이 번진다.
뒤에서 두 모녀를 지켜보던 도하의 입에서도 하, 안도의 한숨이 빠져나왔다.
* * *
둘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치료가 다 끝났던 터라 엄마를 모시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말론 괜찮다고 하셨지만 처음 입어본 화상에 본인 또한 적잖게 놀라셨던지,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하의 차 안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도하의 도움을 받아 화상 입은 엄마의 팔을 조심하며 안방에 엄마를 뉘어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괜찮으실 거야. 응급처치도 잘 하셨고.”
너무 걱정 말라며, 여전히 심란해 보이는 다경을 향해 도하가 어르듯 말했다.
“고마워. 병원 같이 가준 것도, 엄마 방까지 모셔다준 것도.”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래. 정 없게.”
도하가 다경의 그 말이 되레 서운하다는 듯 나직이 투덜댔다.
안다. 도하가 그런 말을 듣고자 보인 모습들이 아니라는 걸. 저와 제 엄마 앞에서 도하가 보이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진심을 기반한 행동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젠,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두 모녀에겐 큰 힘이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게 되어버려서.
“당분간은···.”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겠지.
“엄마 가게 일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
다경이 엄마의 소식을 들은 후로 줄곧 제 마음의 짐처럼 자리했던 것을 토해내듯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그렇게 넘어지시는 바람에 허리도 더 안 좋아지셨을 거고, 팔도 성칠 못하셔서.”
“나도 그럼 퇴근하고 같이 도와줄까?”
잠자코 듣고 있던 도하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뭐?”
“전에 봤잖아. 나 생각보다 식당일 체질인 거.”
지난번, 다경의 복귀를 목적으로 했던 회식 날의 일을 상기시키며 도하가 능청스레 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다경이 정색을 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프로젝트니 계약관리니 너도 얼마나 바쁜데, 너 같은 고급 인력이 식당에 와서 일을 도와. 애인 부끄럽게 하고 있어.”
한 번이야 그냥 둘 사이에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으로 친다지만, 다른 것으로도 모자라 식당일까지 도하의 도움을 받다니.
말처럼 연인인 저를 정말로 고개 못 들 만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거 되게 정색하네, 윤다경. 사랑하는 사이에 서로 힘든 일 있음 돕고 그러는 거지.”
다경의 그런 반응이 도리어 서운하다는 듯, 도하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런 도하를 달래려, 다경이 이내 애교 있게 덧붙였다.
“식당일은 됐고, 그냥 가끔 와서 국밥이나 먹고 가. 보고 싶을 것 같으니까.”
보고 싶을 것 같다고.
그 말에 줏대도 없이 사르르 풀려버린 입술이 이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린다.
“뭐, 알았어. 그럼.”
그제야 도하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이내 다경의 손목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선 아쉽다는 듯 속삭였다.
“이러다 나 국밥집 VIP 되는 거 아니냐. 아마 매일매일 너 보러 여기 올 텐데.”
“매일 매일 와도 돼. 너만 국밥이 물리지 않다면.”
“그래?”
잠시 품에서 다경을 떼어놓으며 도하가 능청스레 물었다.
“가끔 국밥 물리면, 다른 것도 먹여주고 그러나?”
“다른 거 뭐?”
“가령···.”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가, 다경의 귓가에 슬쩍 고개를 숙이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맛있는 윤다경이라든가.”
“으휴, 아무튼 저질!”
다경의 작은 팔꿈치가 참지 못하고 도하의 복부를 찔렀다.
오늘 하루만 대체 몇 번을 허탕을 쳤냐며, 도하가 억울하다는 듯 볼멘소리를 뱉었다.
시린 밤공기 사이로 둘의 재잘대는 소리가 간지럽게 울려 퍼진다.
깊어가는 가을, 그만큼 깊어지는 마음이 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