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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7. (95/98)

 외전 07.

 만약 그가 제때에 집으로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전 지금쯤 또다시 도하의 먹잇감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봤으면 그만 가요.”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마주 보고 서 있는 틈으로 도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

 “생사 확인하러 온 거라며. 확인 끝났으니까 이제 그만 가시라고.”

 그가 벨을 누를 때부터 마뜩잖아하던 도하가 귀찮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정운이 눈만 가늘게 뜨며 질책했다.

 “하여간 이 정 없는 새끼. 얼마 만에 보는 삼촌인데 그러고 싶냐?”

 “아, 그러니까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와서!”

 발끈하여 언성을 높이려는 도하의 옆구리를 다경이 팔꿈치로 콕 찔렀다. 도하가 “아, 왜?” 하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구긴다.

 이 바보가 정말! 아주 이 김에 삼촌 앞에서 둘이서 뭘 하려던 중이었다고 티라도 낼 샘이냐구!

 다경이 억울하다는 듯 응시해 오는 눈치 없는 눈을 찌릿 흘겨본 뒤, 자연스레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중재에 나서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상황 같았다. 다경의 그 물음이 퍽 마음에 드는 듯, 정운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애지중지 키운 조카 새끼보다 조카며느리가 100배는 낫네.”

 “그 호칭은 좋네.”

 으이구, 정말 못살아.

 우리 다경이가 아닌 조카며느리라는 호칭에 그제야 불퉁한 기색이 조금은 가신 아이 같은 얼굴을 보며, 다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 *

 10년 만의 만남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식사 시간은 삼촌인 정운의 타고난 친화력 덕에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도하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보곤, 예쁜 조카며느리 덕에 이 무슨 호사냐며 너스레를 떤 그는 식사를 마친 후 다경이 디저트로 내온 과일까지 다 먹고 나서야 다음에 또 보자며 소란스러운 퇴장을 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왔다가 사라지자 집 안엔 그제야 익숙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아무리 편하게 해주는 상대라 할지라도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지, 다경은 그를 배웅하고 나자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놀랐지, 갑자기 삼촌이 와서.”

 거의 떠밀다시피 정운을 내보낸 도하가 거실 소파로 다경을 앉혔다.

 “아냐, 괜찮았어. 안 그래도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뵈니까 좋던걸, 뭘.”

 옆에 앉은 도하의 품에 힘을 풀고 기대며, 다경이 해맑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하며 도하가 어딘지 심란한 얼굴로 잠시 허공에 눈을 둔다. 그런 그를 보며, 다경 또한 부러 밝게 미소 짓고 있던 입술 끝을 슬쩍 가라앉혔다.

 오늘 갑작스레 집에 찾아온 건 외삼촌이었지만, 그의 존재와 함께 또 다른 한 사람이 도하의 머릿속에 떠올라서이리라.

 “선생님 말이야.”

 답지 않게 무표정한 도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경이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오늘 무슨 할 말 있으셔서 오신 거 아냐?”

 줄곧 허공에 머무르던 검은 눈이 그 순간 느릿하게 다경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갑자기 집까지 찾아오신 거 보면 뭔가 용건이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내가 있으니까 아무 말 못 하고 가신 거 아닌가 하고.”

 선생님은 그저 조카인 도하의 생사가 궁금해 오신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목적 때문만이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과거 일로 인해 완전히 단절되어버린 모자의 관계를 유일하게 이어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삼촌이라서, 그래서 다소 갑작스레 도하에게 찾아온 것은 아닐까.

 다경은 당연스레 그런 합리적인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하가 이내 부정하지 않은 채, 하지만 오히려 단호히 삼촌의 찾아온 목적에 대한 제 반응을 갈무리 지었다.

 “너 없었어도 어차피 똑같았어.”

 할 말이라는 것이 만약 다경이 짐작하는 것처럼 내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아마도 난 더욱더 삼촌이 입도 뻥긋 못하게 했을 테니까.

 “있잖아, 도하야.”

 다경은 잠시 망설이듯 도하를 바라보던 끝에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네 마음에 걸려서 너희 어머니 안 보는 거라면···.”

 “아니.”

 낮은 음성이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듣지 않아도 뻔한 말을 단호히 막아섰다.

 “전에도 말했지만 윤다경 네가 걸려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내키질 않아서야. 물론···.”

 “···.”

 “네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더 큰 이유는 나 때문이야. 아직은 내가 어머닐 뵙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아. 본다고 해도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고.”

 이런 상태에서 어머니를 뵈어 봤자, 제 입에서 나갈 말들은 하나같이 뻔했다.

 비록 어머니께서 다경이 모녀에게 찾아와 사과를 하고 보상을 약속하고 갔다 하더라도, 그녀가 저지른 일들이 그 몇 마디로 쉽게 다 지워질 순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안에 새겨진 실망감과 좌절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인간관계에서 오는 실망감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 믿고 의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실망감과 배신감의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지독했다.

 어쩌면 다경과 제가 떨어진 채 서로를 그리워했던 그 시간만큼, 제게도 어머니를 용서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만에 하나 제가 어머니를 용서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저와 어머니의 문제일 뿐. 다경에게까지 강제할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도 내 어머니 문제, 나 때문에 굳이 희생하려고 할 필요 없어.”

 도하가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연한 눈가를 다정히 문지르며 당부했다.

 “···응.”

 도하와 그 모친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다경이 무력한 목소리로 답하며 눈을 떨구었다.

 한때 저 또한 부모를 원망하고 또 미워했던 적이 있는 터라, 지금 도하의 마음이 얼마나 끔찍할지. 굳이 듣지 않아도 다경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저 네 선택을 존중하고 기다려주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게 없겠지.

 “그나저나 어쩜 선생님은 예전 모습 그대로이시더라.”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다경이 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누가 그분을 40대로 보겠어.”

 “속이 덜 들어서 그래.”

 도하가 다소 불퉁스런 표정으로 말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선생님에 대해 칭찬을 했다고 저러나?

 10년 전에도 본인 삼촌을 상대로도 경계심을 늦출 줄 모르더니, 저 유치한 질투심은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좀처럼 누그러들질 않는 모양이다.

 “음··· 누구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다경이 빙글 웃으며 유치한 질투 중이신 뚱한 얼굴을 눈짓했다.

 “뭐, 나?”

 도하가 황당하다는 듯 손가락 끝으로 스스로를 가리킨다.

 “이거 왜 이래. 난 그래도 그 양반에 비하면 완전 어른이거든?”

 조금 전 식탁 앞에서 수준 맞춰 투닥거리던 걸 보면 도무지 ‘완전 어른’으로는 보이지 않던데, 여기서 더 실랑이를 해봤자 어차피 오기와 억지만 심해질 뿐이다.

 “아, 그러시구나.”

 “뭐야, 그 무성의한 반응은.”

 도하의 반듯하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무성의라니. 인정하는 건데? 네가 훨 어른스럽다는 걸.”

 다경이 천연덕스러운 낯으로 시치미를 떼자 이미 구겨져 있던 미간이 그마저도 날카롭게 좁혀진다.

 이게··· 누굴 또 은근슬쩍 놀리려고.

 “윤다경 너, 그러다 진짜 이 으른한테 호되게 혼나는 수가 있어.”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의 각도를 다경에게로 틀며, 도하가 나직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 으른이라니.

 지금껏 도하에게 들어온 중 가장 안 어울리는 호칭에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풋, 입술 새로 터지고 말았다.

 “뭐야아, 뭘 어떻게 혼내줄 건데?”

 다경이 무시하는 게 분명한 웃음을 머금고 새침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요것 봐라.

 자칭 ‘으른’이라 칭한 눈에 이내 늑대 같은 음흉함이 깃든다.

 “어떻게 혼내긴.”

 “앗!”

 불현듯 다가온 손에 밀린 가녀린 몸이 그대로 소파 뒤로 넘어갔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치켜뜬 갈색 눈에 어느새 성큼 그녀의 위로 올라온 도하의 모습이 보인다.

 “아주 어른스럽게 혼내주려는 거지.”

 어른스럽게 혼을 내주겠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느른히 걸친 그가 제 말의 의미를 몸소 가르쳐주듯 다경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은 그때였다.

 “잠깐, 흣···.”

 지이잉― 둔탁한 진동음이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를 굴렀다.

 이 시간에 웬 전화지?

 어른스럽게 혼을 내주겠다는 도하와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다경의 눈이 동시에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으로 옮겨갔다.

 하··· 또 뭐야, 오늘 진짜.

 “그냥 무시해.”

 도하가 한계에 다다른 욕구를 나직한 욕설과 함께 삼키며, 옆으로 돌아간 자그마한 턱을 도로 당겨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만!”

 다경이 뒤늦게 손을 뻗어 도하의 입술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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