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4.
그럼 그렇지. 혀를 차며 무심코 그의 뒤를 따르던 다경의 눈이 호텔 문이 열림과 동시에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야.”
다경이 생각지도 못한 으리으리한 객실 내부를 보곤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겨우 하룻밤 자는데 뭘 이렇게까지···.”
이런 쪽엔 문외한인 저도 알만한 5성급 호텔이긴 했으나, 객실마저 일반 룸이 아닌 스위트룸일 거라곤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겨우 몇십만 원짜리 니트 한장 사줘 놓고 옷이며 백이며 이것저것 받은 것도 내심 부담스러운 마당에, 잘은 몰라도 몇백은 우습게 호가하고도 남을 객실을 맞닥뜨리자 다경은 도무지 걸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너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원래 데이트는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 하는 거야.”
부담스러운 마음에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다경의 팔을 붙잡아 이끌며 도하가 말했다.
“상대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온갖 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함이지. 외모야 이미 뻑 간 상태고, 그러니 내 재력도 좀 보여줘야지 않겠어?”
그가 특유의 뻔뻔한 낯으로 거들먹거리며 꼼짝 않고 버티선 다경을 룸 안쪽으로 데려갔다.
“잘났어, 정말.”
마지못해 따라 들어간 다경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의 그 어떤 이도 이렇게나 호화로운 데이트를 누렸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이 프러포즈를 받을 때라면 또 모를까. 아무리 합리화를 해보려 해도, 오늘 제가 누린 그것들은 평범한 데이트라 하기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미 객실료까지 지불한 마당에 제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데이트는 하자고 해선···.
그렇게 도하는 이해 못 할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만 버티고 이리로 좀 와봐.”
상념 어린 다경의 어깨를 덥석 감싸 쥔 그가 그녀를 이끌고 호텔 통유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기껏 준비했는데 고개 들고 여기 좀 봐보라고. 윤다경.”
별 의지 없이 그의 손에 끌려 걸어간 다경이 아이처럼 들뜬 그의 손짓을 따라 마지못해 눈을 돌렸다.
대체 뭘 보라고 그러는 거야.
부담감에 아무런 감흥조차 못 느끼던 것도 잠시.
고층 룸 밖으로 펼쳐진 눈부신 서울의 아경이 다경의 눈 속을 파고들었다.
“여기 서서 보면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거든. 네가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고른 방인데 어때, 맘에 들어?”
그가 뒤늦게 이채를 띠는 다경의 눈을 보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화로운 스위트룸 내부의 모습에도 별 감흥이 없던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서울을 보며 느리게 깜박였다.
“나··· 처음 봐. 이렇게 높은 데서 보는 서울 야경.”
서울로 올라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서울의 눈부신 야경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갑한 지하철과 직장, 그리고 후미진 골목길만 전전해야 했던 삶에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야경 따윈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으니까.
이렇게 무언가를 내려다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왔던 삶.
그러던 끝에 마주하게 된 야경을 내려다보는 갈색 눈이 황홀함으로 넘실댔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비싼 돈을 주고 뷰가 좋은 곳을 고집하는 거구나.
보자마자 납득할 수 있었다.
“나도 오랜만이야. 10년 전에 한국 그렇게 뜨고 처음이라.”
도하가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서울의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다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얹었다.
“아, 너도 그렇겠네.”
그 또한 10년 전 한국을 떠난 뒤 오랜만에 마주한 풍경임을 깨닫자, 다경은 어쩐지 마음이 벅찼다.
이 예쁜 모습을 너와 나 둘이,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니.
그래서일까. 발아래 펼쳐진 서울의 밤이 직전보다도 더 없이 반짝거리고 예쁘게 느껴진다.
아니, 옆에 좋은 사람이 함께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거려나.
“예쁘다, 정말.”
결국, 참지 못한 유치한 감상을 입 밖으로 내고 말자, 옆에서 지켜보던 그가 다경의 작은 정수리에 달콤히 입을 맞추었다.
“그래? 내 눈엔 네가 더 예쁜데.”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숨결이 간질이듯 이마 치를 스쳤다.
“그건 당연한 거고.”
한참을 멍하니 야경만 바라보던 다경이 비싯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건 당연한 거라니. 다경의 생각지 못한 발칙한 대꾸에 도하가 장난스런 얼굴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어쭈. 전엔 예쁘단 소리 한마디에 얼굴 빨개지더니, 이젠 제법 뻔뻔해졌는데?”
“그러게. 사랑받다 보니까 자연스러워지더라고.”
“좋은 현상이네, 그건. 그럼 앞으론 더 맘 놓고 예뻐해 줘도 되겠는데?”
“얼마든지?”
다경이 역시나 무색해하는 기색 없이 웃으며 발랄하게 그의 말에 대꾸한다.
하··· 진짜 하루 종일 예뻐서 돌겠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름을 느낀 그의 입에서 이 방으로 온 또 다른 목적이 튀어나왔다.
“그럼 어디 마음껏 예뻐해 줘 볼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번쩍 들리며 바닥을 짚고 있던 다리가 붕 허공으로 떴다. 깜짝 놀라 꺅- 외마디 비명을 지른 다경이 자연스레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뭘 어떻게 예뻐해 주려고?”
“뻔하잖아. 내가 예뻐해 주는 방식이야.”
마음은 이미 다 바쳤고 몸으로 매일같이 어필하는 거 아니겠냐며, 음흉하게 웃은 그가 촉-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일단 몸 구석구석 씻기면서 예뻐해 줄게.”
“으, 저질.”
언제나처럼 눈을 흘긴 다경이 그러면서도 그를 뿌리치진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경을 안고 욕실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도하의 입술이 다경의 이마와 코, 입술로 떨어졌다.
가벼운 입맞춤 뒤, 보다 깊게 겹쳐 오는 입술 사이로, 푸흐흐 간지러운 웃음이 터진다.
서울의 눈부신 야경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둘의 뒤를 근사하게 밝혔다.
사치스러운 만큼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완벽하고도 또 완벽한 데이트였다.
* * *
주말이 끝나자 다시 또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도하의 배려로 스타트를 끊게 된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으면서 다경 또한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프로젝트 팀원끼리 모여 앉은 회의 시간.
“이 단어는 웬만한 헤비 유저들 아니고선 모를 것 같아서 좀 더 쉬운 명칭으로 정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케이. 그 부분 반영하기로.”
“참, 그 유튜버 조현식 씨 섭외는 어떻게 돼가요? 하겠대요?”
“흔쾌히 오케이 했어. 안 그래도 블리뉴 사양이랑 너무 궁금했는데, 자기한테 시승식 방송 처음 맡겨주겠다는 조건하에 모터쇼 추진하기로.”
“아, 좋네요.”
사무실 중앙 테이블에 앉아 정정할 부분들을 논의하고 있는데, 때마침 회사로 들어오는 도하와 오 차장의 얼굴이 파티션 너머로 보였다.
외근 나갔다더니 금세 끝난 모양이네.
반가운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다시 회의 자료로 눈을 돌리자, 옆에 있던 미애와 송 과장이 그녀 대신 둘을 반겼다.
“오셨어요, 팀장님. 차장님.”
덕분에 다경이 있는 쪽을 돌아본 도하와 우연처럼 시선이 닿았다.
까닥, 주변 시선을 의식해 묵례를 하자, 빙긋 웃은 그가 차장에게 무어라 말을 하며 먼저 팀장실로 들어갔다.
참 별것도 아닌데, 회사에 있을 땐 눈만 마주쳐도 괜스레 뺨이 후끈해진다.
“어떻게 일은 좀 잘 돼가?”
팀장실로 들어간 도하를 뒤로한 오 차장이 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일찍 끝나셨네요? 여배우가 영 까탈스럽다고 해서 계약서 도장 찍기 여간 애먹으실 줄 알았더니.”
옆자리를 비워주며 묻는 송 과장의 물음에 오 차장이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다 권 팀장님 덕분이지. 아주 하유리가 우리 팀장 얼굴 보자마자 한큐에 오케이를 하더라고.”
“그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애써 회의 자료에 눈을 박은 채 무심함을 가장하던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권 팀 보고 뿅 가서 회의실에서 보자마자 눈을 못 떼더니 그대로 도장을 꽝!”
“헐.”
마주 앉아 오 차장의 중계를 듣고 있던 미애와 송 과장의 입에서 동시에 소리가 터졌다.
조금 전 송 과장이 했던 말마따나, 하유리는 요즘 반짝 떠오르는 신예 스타답게 업계에서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여배우라고 들었었다. 그런데 그런 여배우가 도하를 보자마자 눈도 못 떼고 도장까지 찍었다니.
‘뭐야, 이 찝찝한 기분은···.’
일찍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이하던 것도 잠시.
어딘지 기분이 거슬린 다경이 다소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볼펜 끄트머리를 딸깍거렸다.
하지만 그런 다경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함께 모여 앉은 세 사람은 끊이지 않고 여배우와의 후일담을 나눠댔다.
“사실 권 팀장님이 연예인 뺨 치는 마스크긴 하잖아요. 아무리 하유리라도 뻑갈 만했던 거지.”
“게다가 일할 때 권팀이 좀 인텔리전트해? 연예인들만 보다가 일반인에 멀끔한 젊은 팀장 보니 눈 돌아간 거지.”
뭐야, 평소엔 못 잡아먹는 송 과장님까지.
결국, 듣다 못한 다경이 마뜩잖은 목소리로 새침하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뭘, 그 정도까지.”
“어머, 자기!”
송 과장이 펄쩍 뛰며 그런 다경을 향해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과소평가하나 본데 기억 안 나? 권 팀, 우리 과 부임하자마자 이 큰 회사 전체가 들썩들썩했던 거.”
“맞아요. 오죽하면 일부러 권 팀장님 팀장단 회의 들어가시는 시간 맞춰서 타부서 여직원들이 커피 뽑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대잖아요. 어떻게든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보려고.”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또한 도하의 인기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성인이 된 현재는 물론이며, 한창 성장호르몬이 폭발해 역변의 시기를 걷는다던 남고생 때도 인기가 많았던 그였다.
언젠가 김주미가 말했던, 쉬는 시간마다 권도하 때문에 교실 창에 빛이 들 수 없었다는 말은 정말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다.
외모면 외모, 피지컬이면 피지컬, 집안이면 집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던 녀석이라 지역 유지의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제 가치만으로 이미 반짝반짝 빛났던 그였으므로.
그러니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 떠들썩했던 그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경은 오늘 일에서만큼은 내심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유명하고 예쁜 연예인마저 반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니.
“우리 윤 대리, 긴장해야겠어.”
속이 상하면서도 부러 반응치 않으며 애꿎은 태블릿 화면만 슥슥 넘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오 차장이 말했다.
“아까 회의실 나설 때 보니까 하유리가 개인적으로 권팀한테 연락처까지 적어서 주던데.”
“···연락처를요?”
그 순간, 더는 평정심을 찾지 못한 눈이 큼지막하게 뜨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