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4)
대체 뭘 시키려고 저러나.
그의 뒤를 따라 팀장실로 들어간 다경이 긴장한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앞서 들어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그가 말없이 그 앞에 놓인 태블릿을 슥슥 넘겨보고 있다.
사무실 밖에서 보는 도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철부지 고등학생 그대로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렇게 팀장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는 똑같은 사람임에도 왠지 모르게 저를 긴장케 했다.
수트를 입은 각진 모습이 낯설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일 앞에 진지한 그 자체가 어딘지 권위적으로 보여서일까.
힘줄이 보기 좋게 도드라진 팔뚝이며, 단정해서 왠지 모를 금욕적인 느낌을 주는 셔츠핏. 거기에 냉철하게 서류를 훑어내리는 눈빛이 주는 묘한 긴장감에 입안이 바싹 말라오고 있을 즘.
“이번 프로젝트.”
굳게 다물어져 있던 이지적인 입매가 열렸다.
“지난번에 네가 냈던 아이디어로 가기로 했어. 삼차력 테스트.”
“아, 정말?”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다경이 깜짝 놀란 얼굴로 목소리 끝을 올렸다. 그러자 태블릿을 응시하고 있던 검은 눈이 금세 화색이 돈 얼굴을 힐긋 올려다본다.
아, 아니지.
그 눈빛에 뒤늦게 정신이 들어 부리나케 뱉은 말과 호칭을 정정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여러모로 부족했을 텐데.”
다경이 깍듯한 자세로 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삼킨 도하가 태블릿에 담긴 기획안을 마저 넘겨보며 말을 이었다.
“감사해할 거 없어. sns로 실추한 이미지를 이보다 적절하게 만회할 기회도 없겠다 싶어서 채택한 아이디어야. 네가 낸 거니까 팀원들이랑 머리 모아서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서 이번주까지 최종 계획서 한 번 가져와 봐.”
“알겠습니다. 팀장님.”
다경이 다시 한번 예의를 갖춰 상사의 명령에 답했다.
내가 낸 아이디어가 메인 이벤트로 채택이 된다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둥둥 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로 인정받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고무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은 도하가 제게 주는 복귀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굳이 제게 감사해할 거 없다고 했지만, 과거의 굴레는 벗어버리고 앞으로 당당하게 능력으로 저를 바로 세우라는 기회를 준 것일지도.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의지를 다지던 찰나, 기획안 검토를 마친 그가 의자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대어 앉으며 다경을 바라보았다.
“근데 그 팀장님이란 호칭.”
“네?”
“들을수록 참 꼴린단 말이야.”
뭐라고?
줄곧 근엄한 팀장의 분위기를 내뿜을 땐 언제고, 어느새 다시 짓궂고 변태 같은 본모습으로 돌아온 도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넥타이플은 한 번 해봤고···.”
은밀함을 조장하듯 목소리를 한결 낮추더니, 반응조차 못하고 서있는 다경의 귓가에 야릇하게 속삭였다.
“오늘 밤엔 팀장님이랑 대리 놀이 한 번 해볼까?”
“···.”
“어떻게, 같이 야근이라도 해?”
“이 변태가 정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 잠자코 듣고 있던 다경이 확 그를 밀쳐버렸다.
그 미약한 손길에 떠밀리긴커녕 도리어 손목을 잡아채버린 그가 하하, 유쾌한 웃음을 쏟아낸다.
하여간, 하루라도 일반적이면 권도하가 아니지.
붙잡힌 손을 확 떨궈낸 다경이 새침하게 그를 흘겨보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미처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 뒤에서 와락 끌어 안아오는 너른 품 덕에 결국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축하해, 다시 회사로 돌아온 거.”
그가 특유의 장난기를 조금은 벗어낸 목소리로 품에 안은 다경을 향해 속삭였다.
새침하게 돌아섰던 것도 잠시.
넓고 아늑한 품 덕에 긴장감이 풀려버린 다경이 저를 안은 팔을 꾹 쥐며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축하는 무슨···. 누가 들으면 한 달 정돈 자리 비운 줄 알겠어.”
“그런 소리 마라. 나한텐 너 없는 며칠이 한 달보다도 더 길었어.”
그가 잃어버린 주인을 찾은 강아지처럼, 다경의 여린 목덜미에 이마를 문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다경이 저를 받아주었을 때 당연한 듯 굴었지만 그녀가 이 사무실에서 뛰쳐나간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네가 그대로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릴까 봐. 이대로 또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매일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유를 모른채로 견뎌야 했던 10년도 끔찍했지만, 다경이 겪어야 했던 불행의 원인이 저임을 아는 채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저를 그 지옥에서 꺼내준 다경의 선택이 도하는 그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이미 너 하나로 충분했던 삶을, 그마저도 너를 위해 살겠다 맹세하도록 만들었다.
다신 네가 아플 일이 없도록.
만약 내가 미리 대비치 못한 아픔이 네게 오더라도, 그조차 내가 나눠 받을 수 있도록.
더욱 믿음직스러운 남자가 되어 네 옆을 단단하게 지키겠노라고.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도하가 제 안에 있는 마음의 밑바닥까지 모두 긁어모아 진실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사랑해, 다경아.”
그것이야말로 내 이 모든 갈망의 이유라는 듯, 달콤하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어느새 온몸의 힘을 풀고 온전히 그의 품에 기댄 다경의 눈에 눈물이 넘실댔다.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던 그녀가 저를 안은 손등 위로 고개를 숙여 촉, 입을 맞추었다.
“나도 사랑해. 아주 많이.”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감정을 조심스레 그의 앞에 내뱉었다.
“하···, 미치겠다. 정말.”
제가 먼저 고백해놓곤, 덕분에 듣게 된 다경의 진심이 감격스러운 듯 도하가 낮게 탄식을 쏟아낸다.
그 마음이 기꺼워 다경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 와락,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곤 “사랑해, 도하야” 하고 그가 듣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다는 그 말을 원 없이 속삭여주었다.
다경의 고백이 한 마디, 두 마디 더해질 때마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가는 남자가 제 품에 안겨온 작은 몸을 으스러트릴 듯 꽉 안는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안아 오는 힘에도 불구하고, 다경은 더 이상 그의 품이 버겁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이토록 강한 힘이라면, 이토록 단단한 품이라면, 앞으로 우리 둘에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오더라도 믿고 헤쳐나갈 수 있겠지.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사람들이 언제 나오나, 보고 있을 것 같은데?”
하염없이 그녀를 품고 있는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다경이 수줍게 말했다.
사랑도 좋지만, 이 이상 여기에서 있었다간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럴 것 같긴 한데, 다경아. 그냥 이렇게 떨어지기엔 지금 내 아래 사정이 너무 난감하다.”
“응?”
놓아주긴커녕 도리어 꽉 끌어안으며 도하가 하는 말에 다경이 무슨 뜻이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랑한단 네 말에 이 자식이 서버려서.”
그가 돌연 하반신을 제게로 붙이며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론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고. 지금은.”
동시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딱딱해진 부피감이 맞붙은 아랫배를 쿡 찔렀다.
이게 뭐야?
망측한 감각에 다경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밤부터 새벽까지 그토록 저를 괴롭혀 놓고선 또 쌩쌩해진 바지 앞섶이 당혹감에 젖은 시야를 노골적으로 파고들었다.
“너 땜에 못살아, 내가.”
귀까지 빨개진 다경이 진저리를 치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기민하게 뻗어온 팔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는다. 그러곤 경계하듯 돌아보는 다경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야근하고 하려고 했던 팀장님이랑 대리 놀이, 그냥 지금 하면 어때?”
“미쳤나 봐, 정말!”
결국 견디다 못한 다경의 팔꿈치가 도하의 복근을 툭 쳐버렸다.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선 도하가 그러고도 뭐가 좋은지 비긋이 미소 짓는다.
하··· 변태 상사와 애인이 돼버렸으니 정말 어떡해야 하나요.
기막힌 한숨을 뱉어낸 다경의 입가에도 피식 웃음이 번지고 만다.
다른 의미로 긴장감이 가득한 둘의 연애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