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3/98)

 82화.

 “저야말로 개차반이면서 누굴 뭐라 그러는지, 참. 덕분에 사내게시판이 오늘 하루 종일 김주미 씨 일로 아주 핫했잖아요. 이런 사람이 뭐 좋다고 추종하던 주은영 대리님 무리도 덕분에 코가 쏙 빠졌구요.”

 생각할수록 고소하다는 듯, 주미가 다경에게 보여주던 휴대폰을 거둬가며 발랄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이 영상 SNS에 쫙 돌고 신상까지 싹 다 털려서, 김주미 씨 당분간 이 업계엔 발도 못 들일걸요? 구직은 고사하고, 시집이나 제대로 갈지 모르겠네요.”

 통쾌하다며 웃는 미애와는 달리, 다경은 다 듣고도 여전히 믿기질 않아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다방 마담이니 꽃뱀이니 운운하며 지겹도록 저를 괴롭혔던 김주미가 실은 상간녀였고 이 사실이 오늘 회사 로비에서···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니.

 물론, 자업자득인 상황이었으나 제가 회사를 비운 사이 때마침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시작부터 촬영되어 있는 영상도, 거기에 추가적으로 퍼진 김주미의 자세한 신상까지. 어쩐지 계획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 자꾸만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그때, 미애가 그 의구심의 실마리를 다경 앞에 던졌다.

 “얼마나 적을 많이 뒀는지, 그 진격의 사모님이 회사에 뿌린 불륜남하고의 사진도 그분이 직접 찍은 게 아니라더라구요.”

 “그럼?”

 “익명의 제보자가 그분 집으로 친절히 우리 회사 사명까지 찍어서 등기로 보낸 거라던데요?”

 익명의 제보자가?

 아무리 주변에 적이 많대도, 대체 누가 그런 오지랖을 부릴까 생각하던 순간. 다경의 머릿속으로 별안간 한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눈앞에서 다 치워버릴게.’

 이런 일을 벌일 동기와 목적이 분명한 한 남자의 음성이 날카롭게 뇌리를 강타했다.

 설마.

 동시에 다경은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을 찾아 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러자 여전히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회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며칠 전.

 ‘못 믿겠으면 일단 지켜보고 결정해, 다경아.’

 여전히 자신과의 새로운 시작을 주저하는 내게.

 ‘10년 전에 못 지켰던 그 약속, 이번엔 꼭 지킬 거야. 내가.’

 비장한 눈으로 굳은 의지를 보이던 믿음직한 얼굴이.

 ‘너구나.’

 사람들 속에 섞여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는 눈에 희미한 물기가 차올랐다.

 ‘10년 전 그 약속을 지금이라도 지키려고, 너는 오늘 이렇게··· 내게 온 거구나.’

 벅차오르는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마음 전체를 휩쓸었다.

 다경은 문득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을 감추려 푹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낸 도하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벅찼다.

 더는 내 앞길을 막는 것이 없도록, 내가 마음 편히 네게 올 수 있도록···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피하는 내게 그 시선들과 이렇게 온화하게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넌 오늘을. 이 시간을 준비한 거구나.

 “어라? 대리님, 혹시 우세요?”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는 다경의 얼굴을 미애가 당황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아냐. 내가 울긴 왜 울어. 매운 걸 만졌더니 눈이 좀 따가워서.”

 다경이 붉게 충혈된 눈가에 번진 물기를 손등으로 훔쳐내며 멋쩍게 웃었다.

 걱정스런 얼굴로 그런 다경을 바라보던 미애가 이내 “그래요.”하고 가지런히 놓인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침잠하는 마음과는 달리 소란이 소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홀에 송 과장의 쩌렁쩌렁한 호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권 알바님! 여기 술 떨어졌어욧, 이슬 한 병 추가요!”

 “아, 네~네.”

 들고 있던 술잔을 허무하게 내려놓은 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수 칸 앞으로 다가갔다.

 “팀장님 진짜 내조 짱이시다.”

 그런 도하를 보며, 이젠 둘의 관계를 알 만큼 아는 미애가 부럽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내조라니, 무슨.”

 “에이, 대리님도 좋으시면서 뭘.”

 미애가 창피해 몸 둘 바를 모르는 다경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아니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로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창밖엔 어느새 노을마저 다 저물고 꽉 찬 보름달이 떠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을 함께 걸어주는 네가 있어 더 눈부신, 만월의 밤이었다.

 * * *

 “내일 꼭 보는 거다, 꼬옥!!”

 얼마나 마신 건지. 혀가 꼬부라진 송 과장이 다경의 손을 꼭 쥐고 신신당부했다.

 “안 오면 내일 또 국밥집으로 쳐들어올 거야!!”

 “가족들은 안 보세요? 애들 저녁은 어쩌시구요.”

 다경이 알았다, 확답은 피한 채 에둘러 송 과장을 꼬집었다.

 “내가 말 안 했니? 우리 남편 올해 1년 육아휴직 했는데.”

 “아···.”

 “아무튼 국밥농성 보고 싶지 않거든 꼭 와! 꼭 출근해야 돼, 알았지?”

 국밥농성이라니. 오늘 하루만으로도 이렇게나 기 빨리는데 두 번은 정말 안 될 소리다.

 “아, 알겠어요. 얼른 좀 가세요, 과장님. 미애 씨, 과장님 모시고 조심히 들어가.”

 “네, 그만 가볼게요! 대리님!”

 거의 등 떠밀 듯 송 과장과 미애를 보낸 뒤 함께 온 다른 팀원들에게도 한 명 한 명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부장님. 다들 감사해요.”

 송 과장 말대로 내일 꼭 보자고, 악수한 손을 톡톡 두드린 사람들이 하나둘 차를 타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다경은 까만 어둠 속으로 점처럼 멀어졌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자동차들의 미등을 보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분위기에 휩쓸려 겨우 두세 잔 정도 마신 것 같은데 이래저래 기가 빨린 탓인지 온몸이 다 후들거린다.

 그때, 모두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던 등 뒤에서 불현듯 인기척이 느껴졌다.

 “와, 송 과장 저 아줌마 주사 장난 아니네.”

 “뭐야, 아직 안 갔어?”

 “안 갔어어?”

 다경이 뱉은 말을 기막히다는 듯 따라 뱉은 도하가 불만스런 얼굴로 비꼬듯 말했다.

 “하여간 서운한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데는 참 일가견 있지.”

 듣고 보니 너무 매정했나 싶어, 다경은 답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다 끝났으니까 난 당연히 간 줄 알았지.”

 “끝나긴 뭐가 끝나. 테이블도 치워야 할 거 아냐.”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그 채로 그대로 놓여 있는 가게 안쪽을 가리키며 도하가 말했다.

 오늘 하루. 주인들은 자리에 앉아 노닥거리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갖 시중을 다 들더니,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마지막 마무리 정리까지 하려는 모양이다.

 “그쯤 했음 됐어. 여기까지만 해. 나머진 나랑 엄마가 치워도 되니까···.”

 “어머니 완전 뻗으셨어.”

 “엄마가?”

 다경이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송 과장 페이스 맞춰서 달리시더니 어느 순간 훅 가셔서, 내가 방금 안방에 뉘여 드리고 오는 길이야.”

 “아···.”

 그래서 늦게 나온 거구나. 그제야 왜 도하가 사람들 다 가고 나서야 식당에서 나온 건지를 깨달은 다경이 미안한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래저래 고생했네, 네가.”

 “뭐야. 말뿐이야? 다른 건 없어?”

 도하가 그새를 못 참고 장난스런 얼굴로 잔뜩 거들먹거렸다. 그러면서도 다경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안달을 내는 모습이 꼭 간식을 달라며 주인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대형견 같았다.

 이러니 우리 엄마한테까지 강아지 소릴 듣지.

 “내일은 진짜로 가게 오지 마.”

 다른 건 없냐는 말엔 일언반구도 않은 채 다경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덕분에 김이 팍 샌 도하가 훅- 한숨을 뱉으며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또 이러실까. 방금 전까진 분위기 좋았는데.”

 “내일부터 출근할 거니까 오지 말라는 거야. 어차피 회사에서 볼 거니까.”

 “뭐?”

 기습에 가까운 다경의 통보에 도하가 얼굴 만면에 번져 있던 불만을 지우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나 빨리?”

 듣고도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깜박이는 그를 향해 다경이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뗐다.

 “김주미 얘기 들었어. 네가 한 거지? 그 집 와이프한테 사진이랑 사명 보낸 거.”

 “역시 눈치 빠르네, 윤다경.”

 굳이 숨길 문제도 아니라 그가 순순히 인정하며 피식 웃었다.

 “못 알아채면 내 입으로 직접 너한테 자랑하고 칭찬 받으려고 했는데.”

 “뭐 한다고 그렇게까지 했어. 그냥 내버려 두지.”

 어차피 죄를 지으면 벌은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굳이 도하가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언젠가 김주미는 그 대가를 받았을 터였다.

 물론 도하가 저를 위해 그렇게 해준 건 알지만, 어쩌다 보니 제가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준 것 같아 다경은 마음이 무거웠다.

 “말했잖아. 10년 전에 못 지킨 약속, 이번엔 내가 꼭 지킬 거라고.”

 도하가 선선한 바람에 실려 작게 흩날리는 다경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다정하고도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남아일언중천금, 몰라?”

 무거워진 제 마음을 알아챈 듯 부러 가벼이 덧붙인 그의 농담에 굳어져 있던 다경의 입가로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네가 그 말 하니까 왠지 웃긴다.”

 “왜 웃겨? 내가 평소에 어? 말의 무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는 사람인데.”

 그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 앞머리를 모으며 말했다.

 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0년을 돌아 만난 우리의 인연에도 네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너의 말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실은, 오늘 낮에 아주머니께서 식당으로 찾아오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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