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1/98)

 80화.

 “마침 왔네, 뉘집 강아지.”

 옆에 앉아 빼꼼 내다보던 엄마가 장난스레 말을 얹었다. 행여 그 말이 상대에게 닿을세라 다경이 엄하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런 딸의 시선에도 엄마는 뭐 문제 될 거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또 뵙네요.”

 도하가 꾸벅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필 이 타이밍에 말도 없이 온 게 맘에 걸려 눈치를 살피자, 의자에 앉아 전자파리채를 휘휘 젓던 엄마가 역시나 심드렁한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별로 안녕 못하겠는데?”

 “네?”

 “엄마아!”

 당최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 엄마의 발을 다경이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당황한 표정의 도하가 사태 파악을 하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대체 뭘 어쩌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새침하게 통보한 다경이 문 앞에서 두 모녀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를 잡아끌어 부리나케 식당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새지 말고 빨리 들어와!” 하는 엄마의 짓궂은 외침이 열린 문틈 새로 따라붙었다.

 저 아줌마 완전 재미 붙인 모양이네.

 나직이 한숨을 뱉곤 도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연락했는데 안 받던데, 뭘.”

 연락 했었다고?

 다경은 그제야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랜 시간 들여다보지 못한 휴대폰엔 도하로부터 들어온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찍혀 있었다.

 “아···.”

 시간대를 보니 아무래도 조금 전, 그의 어머니가 방문했던 때에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다.

 둘이 마주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한창 바쁠 시간대라···.”

 “뭐, 네가 내 연락 씹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새삼 마상 입을 것도 없다, 이젠.”

 어색하게 둘러댄 변명을 도하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받아쳤다.

 웃음기 어린 음성과는 달리 말에 은근 뼈가 있어서, 다경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근데 어머니 반응은 왜 저러셔? 지난주에 잠깐 뵀을 땐 친절하시던데, 혹시 나랑 관련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짧은 대화가 오고 갔을 뿐인데, 그새 이상한 낌새를 차린 모양이다.

 “내가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해.”

 차마 도하에게 너의 엄마가 식당으로 찾아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다경이 적당히 둘러댔다.

 “안 그래도 회사 안 나가는 것 때문에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미심쩍어하시는데, 너까지 자꾸 찾아오니까 심기 불편하셔서 그렇지.”

 “아···. 그런 거면 다행이고. 지은 죄가 많다 보니 괜히 제 발 저리게 되네.”

 지은 죄가 많다고. 그 말이 다경은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 언제부턴가 내 앞에서 죄인처럼 구는 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아릿하게 저려 온다.

 “손은···.”

 아마도 그 아픈 죄책감의 증거물처럼 남을 손을 향해 다경이 눈짓했다.

 “손은 좀 어때?”

 “걱정은 되냐? 주말 내내 연락 한 번 없길래 내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가 서운하다는 투로 짓궂게 되물었다.

 금요일 밤, 그렇게 들어가고 나서 연락 한 번 없었던 게 누군데.

 “그러는 너도 딱히 연락 없었으면서···.”

 저도 모르게 불퉁스럽게 중얼대자 피식, 순풍 같은 웃음이 불어와 이마를 스친다.

 “아··· 내 연락 기다리긴 한 거야?”

 그가 허공을 담은 눈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스레 물었다. 저녁노을을 뒤로한 채 매끄럽게 당겨 올려진 입술이 빤한 수작질을 상쇄시킬 만큼 수려했다. 덕분에 다경은 그만 얼굴이 빨개져 서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기, 기다리긴 뭘 기다려. 그냥 너도 주말 내내 연락 안 해놓구선 왜 나더러 뭐라고 하느냐 그거지, 내 말은···.”

 “알았다, 알았어.”

 정말 알아먹긴 한 건지, 도하가 하하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바로 세운다. 그러곤 이내 뭔가를 가늠하듯, 손목에 찬 시계 위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답잖은 말 몇 마디 주고받으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주말부터 뭐가 바쁜지 연락 한 통 없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가게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의아한 얼굴로 묻자 시계를 보고 있던 그가 곧 씩, 입가를 당기며 웃었다.

 “글쎄, 무슨 일일까.”

 반달처럼 휘어진 눈가에 특유의 장난기가 그득하다.

 “답이 뻔한 걸 굳이 묻는 이윤,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런 거지?”

 슬쩍 몸을 낮추어 귓가로 입술을 기울인 그에게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보고 싶어서 온 거라는 말을.”

 귓바퀴를 타고 흐르는 숨결이 간지럽다. 이젠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들인데도, 듣자마자 귓불부터 열감이 번졌다.

 “그럼 봤으니까 그만 가.”

 다경은 어쩐지 화끈대는 귀를 손끝으로 쭉당겼다 놓았다.

 “저녁 장사 시작할 시간이라 들어가서 엄마 도와야 해.”

 도망치듯 몸을 돌리려던 순간 기민하게 뻗어온 손에 손목이 붙잡혔다.

 “나도 도울게.”

 뭘 돕겠다는 건가 싶어, 다경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식당일 말이야. 그거 도우려고 여기 온 거거든. 좀 있으면 정신없이 바쁠 텐데 힘 좋은 놈으로 일손 하나 더 붙으면 좋잖아.”

 다경은 순간 제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식당 일을 돕겠다니.

 듣고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눈만 깜박거리고 있자, 그가 먼저 식당 문을 잡아 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뒤늦게 정신이 들어, 막 도하의 손에 의해 열린 문을 도로 밀치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식당일을 왜 해?”

 오면 이일 저일 부려먹겠다고 한 제 엄마 말을 밖에서 듣기라도 한 걸까. 뜬금없이 돕겠다 나서는 그를 보곤, 다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왜 말이 안 되는데?”

 “그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게다가 손도 다쳐놓곤, 다친 손으로 하긴 뭘 하겠다고.”

 “그게 말이야, 다경아.”

 얼른 가라며 그의 가슴팍을 짚어 밀던 손을 붙잡아 내리며 그가 의뭉스런 얼굴로 운을 뗐다.

 “내가 주말 동안 곰곰이 생각을 좀 해봤거든?”

 “생각은 무슨 생각!”

 “우리 재회하고, 너한테 몸으로 갚으라고 했던 거. 그땐 꽤나 합리적이란 식으로 떠들어댔는데 생각할수록 불합리했던 것 같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름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몸으로 받은 건 몸으로 갚는 게 답이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참에 나도 똑같이 몸으로 때우려고.”

 그것이 이 기막힌 짓의 진짜 이유라는 듯,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 나야 기왕 몸 쓰는 거, 이 아랫도리 써서 갚으면 더 좋겠다 싶지만.”

 잠시 말을 멈춘 장난스런 시선이 은근한 눈초리로 제 아래쪽을 눈짓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건 내숭쟁이 윤다경이 극구 거부할 테니까.”

 뭘 어떻게 해서 갚고 싶다는 건지. 문득 그 장면을 떠올려버린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고 말았다.

 “···뭐라는 거야, 이 변태가···.”

 “이거 봐, 제대로 말도 안 꺼냈는데 바로 이렇게 나오는 거.”

 장난기 가득한 손끝이 동그란 코끝을 팅- 하고 튕겨냈다.

 “그래서 너 대신 내가 오늘 너네 집 알바 좀 뛰려는 거라고. 이제 이해됐지?”

 그가 다경이 단단하게 막아선 문의 문고리를 잡으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가 되긴 무슨.

 “아니, 전혀 이해 안 됐어.”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잠시. 다경은 더욱더 완강하게 제집 문 앞을 막아섰다.

 “우리 식당 네 손 빌려 일손 메워야 할 만큼 바쁘지도 않아. 나 하나면 충분해.”

 “그래서 내가 대신 하겠다는 거야. 좀 있으면 넌 네 손님들 응대하느라 홀은 신경도 못 쓸 테니까.”

 “그건 또 무슨···.”

 뜻 모를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가 다경을 밀어내고 식당 안으로 들이닥치고 말았다.

 “어머니, 아니 사장님! 제가 저녁 장사 좀 도와드려도 되죠?”

 쟤가 진짜 미쳤나 봐!

 “도와주긴 뭘 도와줘! 엄마 안된다고 해! 절대 안 돼!”

 막무가내로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도하를 따라붙으며 다경이 가열차게 외쳤다.

 “왜 안 돼?”

 아무래도 얘만 말려선 답이 없겠다 싶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뜻밖에도 주방 안에선 비협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진해서 알바하겠다는 사람을 왜 내보내? 게다가 저렇게 허우대 멀쩡한 알바생을? 안 그래도 너 하는 거 영 시원찮아서 별 도움도 안 됐는데, 때맞춰 잘 왔네.”

 “그르쵸, 사장님?”

 “그르쵸는 뭐가 그르쵸야 바보야!”

 저 호구가, 엄마가 이때다 싶어 옳다거니 받아드는 줄은 모르고 덥석 낚싯대를 물 참인가 보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 수트 차림으로 돕긴 뭘 돕겠다고!”

 다친 손 대신 옷차림을 타박하자, 그가 재킷을 훌렁 벗어 식당 한편에 걸었다. 그러곤 이내 커프스 단추마저 풀어 소매를 훌훌 걷어 올리곤 다경을 향해 씨익 웃었다.

 “이럼 됐지?”

 “하···. 너 정말!”

 “좀 있으면 진짜 바빠질 거야. 곧 다른 사람들도 들이닥칠 거니까 방해 그만하고 저리로 비켜.”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산해서 파리 날리기 직전인데 바빠지긴 무슨.”

 “어머니께서 너 쉬는 것 때문에 걱정하셨다며.”

 뭘 해야 할지 알긴 하는 건지. 어디서 앞치마까지 찾아온 도하가 안 어울리는 체크무늬 에이프런에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 좋아 죽는 동료들 몇 여기로 호출했어. 따님, 회사 잘만 다니고 있으니 걱정 1도 마시라고.”

 “뭐?”

 누굴 어디로 호출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경이 당혹감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뻥긋대던 그때였다.

 “어, 왔네.”

 “안녕하쎄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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