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뭣보다 그냥 그렇게, 아주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제가 왜 그날, 그 돈을 받지 않고 그 집 우체통에 쑤셔 넣고 떠났는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노리고 그렇게 했던 것인지. 10년째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독한 속내를 가감 없이 그녀 앞에 쏟아냈다.
“제가 그 돈 갖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아주머니 마음은 오히려 편하셨겠죠. 돈 챙겨 떠난 꽃뱀과 다를 바 없는 애라며 저희 모녀한테 한 짓을 합리화하고, 그 덕에 편히 살게 됐으니 너희 모녀도 좋은 거 아니냐며 어쭙잖은 선민의식에 젖어 사셨을 테니까. 본인이 한 아들의 부모라는 이유로, 다른 부모와 그 딸자식 가슴에 어떤 대못을 박았는진 생각도 안 하시구요.”
어느새 다경의 눈동자엔 미세한 떨림조차 비치질 않았다. 강단있게 반짝이는 연갈색 눈이 싸늘하게 여자를 직시한다.
다경이 오기를 그득히 담아 읊조렸다.
“그래서 그날 놓고 가신 돈, 바로 들고 가서 그 집 우체통에 쑤셔 박았던 거예요. 그깟 돈 몇 푼 쥐여주고, 발 뻗고 편히 주무실 생각 마시라구요.”
그것이야말로 제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이며 최후의 발악이었으니까.
다경의 독한 고백을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던 여자의 입매가 이내 비릿하게 비틀렸다.
“그런 거였니? 내 맘 편하게 해주기 싫어서, 그냥 그렇게 돈 한 푼 안 챙기고 떠난 거였어?”
허를 찔린 것처럼 어이없다는 듯이 한참을 웃던 여자가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 그건 정말 생각도 못 했네. 그래놓고도 네 말대로, 10년을 그것 때문에 찝찝하게 살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어린 네 손에 제대로 놀아난 걸 줄은.”
여자가 뱉은 실소와 한숨이 시린 바람처럼 식당 안을 휘돌았다. 다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눈앞의 여자를 쏘아보기만 했다.
허탈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길 한참.
“이래서 내 아들이 널 못 떨쳐냈나 보네.”
여자가 빙글 입꼬리를 당기며 그런 다경을 마주 보았다.
“아주 기가 차게 발칙하고 당돌해서.”
그 말을 끝으로 맥없이 떨어져 내린 입매가 차게 굳었다. 소리 없이 마주하고 있는 둘 사이로 날카로운 정적이 흘렀다.
당돌하다는 그 말 뒤로, 어떤 말이 제게 돌아올지 알 수 없어 가슴이 조여들었다.
차마 내색하지 못한 긴장 속에서 여자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그래. 내가 졌다.”
여자가 시선을 떨구며 마지막 숨을 놓듯 말했다.
“졌어, 너한테.”
내가 졌다고.
악착같이 날을 세우던 갈색 눈이 순간 희미하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졌다는 말에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바라보자 여자가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냐고 물었지?”
“···.”
“미안하단 말을 하려고 온 거였다.”
예상에 없던 답을 들은 눈이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커졌다.
“어린 너와 네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고 10년을 헤매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서 여기로 온 거야. 그런데 지금, 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바뀌는구나.”
공허한 눈으로 다경을 돌아본 여자가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듯 덧붙였다.
“굳이 네게 미안해하지 않으마. 내가 네게 불행을 주고, 10년을 힘들게 살게 만든 대신 난 그만한 죄책감을 안고··· 하나뿐인 아들한테마저 버림받을 처지에 놓이고 말았으니까.”
여자의 얼굴에 짙은 서글픔과 후회가 드리웠다.
하나뿐인 아들한테마저 버림받을 처지에 놓였다는 여자의 얼굴은 그녀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흔들린 듯 절망적으로 보였다.
“엊그제 도하가 모든 사실을 알고 와선 나한테 그러더구나. 자기가 이러는 이유는 다경이 너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이라고. 뭐가 진짜인지 모를 내 두 얼굴 때문이라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날 보는 녀석의 눈이 모든 걸 말해주더라고. 아들한테 난 이미, 엄마가 아니라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걸. 그 옛날 했던 짓이 모두 널 위한 거였다고 아무리 변명해도 결국 그 애에겐, 그 위한다는 마음조차 괴물처럼 보이겠더구나.”
도하가··· 자기 엄마에게 그런 말까지 했구나.
저를 찾아온 도하의 반응을 보고 아주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여자를 보자 다경은 순간 심장이 덜컥거렸다.
네가 내게 약속했던 게, 모든 걸 치워버리겠다 했던 그 말이 바로 이 뜻이었나.
네 엄마마저 끊어내고, 그로서 네 엄마가 내게 찾아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야?
“실은 10년 전 그 밤 이후로 매일매일이 후회스러웠어.”
처음 본 그때부터, 약함이라곤 단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여자의 얼굴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처음엔 정말 너희 두 모녀에게 그런 짓을 하는 게 맞았던 건지 후회하다가, 나중엔 너 그렇게 떠나고 망가져 가는 도하를 보면서 후회했어. 근데 그렇게 후회하면서도 차마 인정은 되질 않더구나. 내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그리고 같은 부모이면서 또 다른 부모와 그 자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줄곧 다경에게 닿아 있던 눈이 잠시 그 옆에 선 다경의 모에게로 향했다.
“다경이 엄마도 같은 부모 입장이니 알겠죠. 내가 온 길이, 내가 했던 짓이 설사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부모된 입장으로 자식 앞에서 잘못을 인정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딸을 방어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던 엄마의 눈이 그 순간 흠칫 떨렸다.
다른 유의 후회일진 몰라도 같은 부모로서, 후회를 반복했던 입장에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지 않느냐고. 공감을 구하듯 바라보던 여자가 이내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서 계속 모른 척 숨겼어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니, 어쩌면 도하가 했던 말처럼 천륜을 믿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도 엄만데, 하늘의 뜻으로 맺어진 연인데 도하라고 별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제 엄만데.”
하지만 아들은 저와의 연을 부정했고, 종국엔 저를 마치 괴물 보듯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제게, 그리고 제 여자에게 다시 또 크나큰 위해라도 가할 것처럼 온몸으로 공포심과 적개심을 드러냈다.
처음엔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냐는 원망과 서운함이 밀려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더라고.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신뢰가 무너지면 회복이 힘들다는 걸. 내가 잃어버린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식의 부모에 대한 신뢰였어요. 날 존경하고 믿고 따랐다던 아들의 신뢰.”
부모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이기심이라 생각했다.
처음, 제 아들과 그런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애에 대해 동네 사람들이 떠드는 걸 들었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제게 너무 무관심하고 안일한 거 아니냐며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었으니까.
그래서 부모라면 응당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들에겐 나쁘고 못된 어른이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포장하고, 저를 동경했다던 저 어린 마음에까지 독하게 비수를 꽂았다.
독한 짓도 그럴 만한 감이 되는 사람이 하는 거라고, 그렇게 고상한 척 그 앞에서 가증을 떨고 난 후 10년을 아들 앞에 바로 서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끝의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아들에게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제 양심에 걸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도 모두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제게 크나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껴버린 아들은 이제 두 번 다신, 제게 마주 볼 기회조차 주지 않을 테니.
“그래서···, 대체 우리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옆에서,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경의 엄마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네 덕에 나도 10년을 괴롭게 살았고, 이젠 아들마저 잃게 됐으니 너도 내 아들 만나지 마라. 당신 때문에 10년을 아프게 산 내 딸한테, 뭐 그런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아뇨.”
단호히 말한 여자의 입매가 씁쓸히 휘어졌다.
“미안해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내가 잘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 이후로 아들한테 버려질 내 상황이 서글퍼서 그렇게나마 오기 한 번 부려보는 거지.”
나는 못 가질 내 아들의 마음 한 줌을 쥐고 있는 네게, 그것이 초라한 내가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다만, 오늘 온 건.”
여자가 나직이 한숨을 삼킨 뒤 긴 대화를 마무리 지을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10년 전에 내가 했던 짓에 대해, 두 사람에게 내가 보상할 방법이 있다면 해주겠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예요.”
보상이라니.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방문의 목적을 듣자 두 모녀의 얼굴 가득 당혹감이 번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둘에게 저질렀던 짓이, 여러 사람 가슴에 박은 대못이 흔적 없이 뽑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남은 생을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도하는 아마도 이조차 이기적이라 할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용서를 구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마저도 못한다면, 어떤 기약도 없이 이대로 말라 죽을지도 몰랐기에.
“하··· 누가 보상 따윌 바란다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엄마를 향해 여자가 눈을 돌렸다.
“미안해요, 다경 엄마.”
고고하던 입술에서 처음으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다 해도, 어렵게 살아온 다경 엄마 삶까지 그런 식으로 짓밟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남들을 내려다보기만 할 것 같은 고개가 깊게 아래로 숙여졌다.
“정말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