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6/98)

 75화.

 월요일 아침.

 깔깔깔, 높은 하이톤의 웃음소리가 제 집인 양 사무실 안을 장악했다.

 “저 미친 애미나이들.”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작업에 한창이던 송 과장이 두 눈을 살벌하게 번쩍이며 중앙 테이블 쪽을 노려보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과장님. 그런다고 눈치나 볼 인간들이에요, 저 사람들이?”

 “어우, 저승사자는 저 잡것들 안 잡아가고 대체 뭐하는 거야! 직무유기 아니냐, 진짜!”

 답답한 마음에 애먼 저승사자를 찾은 송이 앞에 놓인 냉커피를 벌컥 목구멍에 부어 넣었다.

 “윤 대리님 말이에요.”

 덩달아 목이 탄 미애가 커피에 꽂힌 빨대를 쪽 빨며 송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당분간 쉬신다는 거면··· 한 일주일쯤 있다가 복귀하신다는 걸까요?”

 아침에 팀장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이었다.

 다경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 휴식을 취할 예정이니, 그녀와 관련된 업무가 있다면 그나마 친분이 있는 송 과장과 미애가 당분간 도와주라는 당부였다.

 다경의 업무를 며칠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야 일도 아니나, 그 속 여린 애가 홀로 집에 틀어박혀 끙끙 거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송은 가슴이 답답했다.

 “낸들 아니? 저 김주미 주은영 씹썅생들 있는 동안엔, 우리 회사 쪽으로 고개도 돌리기 싫을 것 같은데.”

 송이 오늘따라 더욱 시끌벅적한 주미 무리를 내다 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회식 자리에서 다방이니 뭐니 떠들어댈 때부터 정상은 아니다 싶었지만, 저 정도로 양심을 팔아먹은 족속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가 뱉은 말 때문에 사람 하나를 그렇게 뒷걸음질치게 했으면, 적어도 자숙하는 기색이라도 있어야지. 자숙은커녕 오히려 더 설쳐대는 꼴을 보고 있자, 송은 이 자리에 없는 다경을 대신해 똥물을 쏟아 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휴, 저 화상들이랑 한솥밥을 먹어야 된다니!”

 자동 다이어트를 시켜줄 만큼 입맛을 싹 가시게 하는 웃음소리를 듣자 송이 열불이 나 블라우스 앞자락을 펄럭였다.

 “그러게요. 진- 짜 싫다.”

 미애도 알량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낀 듯, 테이블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장님, 우리 한솥밥 먹기 싫으니까 말 나온 김에 오늘은 나가서 먹을까요?”

 “그래, 그러자. 제발 저 꼴 보기 싫은 면상들이랑 잠깐이라도 멀어지게.”

 아무래도 저 양심 없는 진상들과 거리두기 할 방법은 양심 있는 본인들이 알아서 피하는 수밖엔 없을 모양이다.

 비록 다경은 없지만, 둘이라도 밖에 나가 외식을 하기로 하며 송과 미애는 다시 신경을 끄고 일에 몰두했다.

 덕분에 곧, 답답한 속이 뻥 뚫릴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 * *

 ‘훗, 오늘도 안 나오려나 보네.’

 주미가 금요일에 이어 텅 빈 다경의 책상을 바라보며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직장 생활 이래, 이렇게나 상쾌한 월요일은 처음이었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을 하면 한 것도 없이 몸이 지치고 기분이 다운되기 마련인데, 이틀 내리 주인 없는 책상을 보고 있자니 주미는 제 속이 되려 뻥 비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참에 아예 저 책상을 빼버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

 ‘윤다경한테 미친 권도하가 차마 그 꼴까진 안 보고 있겠지? 흥!’

 예나 지금이나 사사건건 방해가 되는 도하의 존재를 떠올리며, 주미가 불만스레 입술을 쭈뼛거렸다.

 ‘그나저나 그날 그렇게 뛰쳐나가고 별일은 없었나?’

 아마 무슨 일이 있었다면 도하 모친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엄마가 전화를 걸어 요란법석을 떨었을 텐데, 여태 감감무소식인 걸 보니 아무래도 별 탈은 없었던 모양이다.

 ‘순간 욱해서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내뱉었는데, 다행히 다는 눈치채지 못했나 보네.’

 뱉어놓고도 상호 간에 약속한 게 있어서 내심 불안했던 터라, 주미는 뒤늦은 안도감을 느꼈다.

 보기 싫은 얼굴을 한 방에 없애버리고 회사 사람들과도 의외로 죽이 잘 맞는 게, 전근 온 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기운이 좋았다.

 그래, 이대로 새 직장 새 일터에서 기분 좋게 새출발 하는 거야!

 “주말에 얼굴에 뭐 했어, 시연 씨? 피부에서 아주 광이 나는데?”

 오늘따라 더없이 달달하게 느껴지는 믹스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 사람들이 서로 돌아가며 입에 발린 소리들을 던져댔다.

 “오~ 주 주임, 패디 새로 받았구나? 블링블링하니 완전 예쁘다!”

 “요새 영 꿀꿀하길래 모처럼 기분 전환 좀 했죠. 근데 진짜 블링블링한 건 딴 데 있던데요?”

 새로 받고 온 패디를 쑥스러운 듯 감춘 은영이 옆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주미에게로 흘깃 눈을 돌렸다.

 “주미 씨, 출근할 때 보니까 D사 신상 들고 왔던데? 맞죠?”

 어머, 눈썰미 좋은 것. 고새 그걸 또 봤나 보네.

 “아··· 주말에 엄마랑 같이 백화점 갔다가 하나 들고 왔어요.”

 주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싱긋 웃었다.

 “진짜아? 완전 부럽다. 그거 완전 최신상이라 구하기도 힘들다던데.”

 “그러게요. 주미 씨, 보기보다도 훠얼씬 금수전가 봐~.”

 “보기보다라뇨. 딱 보면 부티가 좔좔 흐르잖아요, 우리 주미 씨.”

 지난주 회식 이후로 급속도로 친해진 은영이 주미를 잔뜩 치켜세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호호, 그런가요?”

 덕분에 어깨뽕이 한껏 높아진 주미가 도도한 손짓으로 머리를 슥, 넘기며 말했다.

 “음··· 월요일이라 당도 딸리는데, 우리 오늘 칙칙한 구내식당 말고 요 앞 파스타집 가면 어때요? 제가 마침 오늘, 엄카를 땡겨서 왔는데.”

 “와, 정말요?”

 “최고다, 주미 씨!”

 부티 좔좔 흐른다는 평에 어울리게 한턱 크게 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속물 같은 입들에서 주미를 향한 찬사가 쏟아졌다.

 역시 사람 다루기란 참 쉽다.

 “가자구요~!”

 씩, 흐뭇한 미소를 지은 주미가 으쓱대는 표정으로 직원들과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쥐뿔도 없는 윤다경은 대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다루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저는 누구처럼 끙끙대지 않아도 손쉽게 사람들을 모으고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다시 돌아오더라도, 이 사무실에서 맘 편히 고개도 못 들게 해줄 거야. 내가.’

 속으로 이를 으득 간 주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직원들을 대동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머, 이게 그 D사 가방이야? 예쁘다!”

 앞서 걷는 주미의 백을 보곤 뒤에 있던 여직원이 탄성을 쏟아냈다.

 “와, 진짜 부티가 좔좔 흐르네요.”

 “완전 부럽다! 이거 우리 두세 달 치 월급 모아야 사는 거 아니에요?”

 “호호. 그런가요?”

 주미가 애나멜광이 번쩍대는 백을 탁, 다른 쪽 어깨로 바꿔 메며 인심 쓰듯 말했다.

 “혹시 중요한 약속 있거나 필요하심 말씀들 하세요. 한 번쯤 빌려들 드릴···.”

 “응? 뭐야, 저 사람?”

 백에 박혀 있던 주은영의 시선이 애먼 데로 비껴간 건 그때였다.

 챙 넓은 검정색 카플린에 얼굴을 절반쯤 덮는 블랙 선글라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검정색 플리츠 원피스를 착장한 한 여자가 씩씩대며 로비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뭐야, 저 진격의 프란체스카는?

 주미는 어딘지 심상찮은 오라를 풍기며 나타난 검정빛깔의 여자를 찌푸린 눈으로 바라봤다. 한낮 회사 로비에 출몰하기엔 흡사 미친년의 그것과 같은 착장에 떨떠름히 얼굴을 구길 때였다.

 잠시간 로비를 휘둘러보던 여자의 시선이 정확히 직선으로 꽂혀 들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회심의 미소를 긋는 입매가 희한하게 섬뜩하다.

 이내 소매를 걷어붙이며 빠르게 내딛는 걸음은 주미를 향해 올곧게 돌진하고 있었다.

 “뭐, 뭐야.”

 맹렬한 기세에 당황한 주미가 영문도 모른 채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순간이었다.

 쫙···!

 “어머나!”

 “세상에!!”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별안간 눈앞이 번쩍였다. 목 비틀린 닭처럼 고개가 돌아간 다음에야, 주미는 입을 쩍 벌린 채 화끈대는 볼을 한 손으로 붙들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엿같은 시츄에이션이야?

 “주미 씨! 괜찮아?”

 “아니, 이게 무슨!”

 소란스러운 주변인들과는 달리, 아무 말도 못 하고 튀어나올 듯 커다래진 눈만 껌벅대던 주미가 겨우겨우 정면을 바라본 찰나였다.

 다시 쫘악···!

 또다시 날아든 손바닥이 주인을 확인할 새도 없이 주미의 고개를 반대쪽으로 도로 넘겨버렸다.

 이런 씨이···! 백주대낮에 쌍싸대기라니!!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어, 주미가 벌게진 뺨을 부여잡고 빽―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 뭐야!!! 누군데 다짜고짜!!”

 “누구냐고?”

 그 순간, 선뜩하게 웃은 프란체스카가 쓰고 있던 카플린과 선글라스를 확 벗어 던졌다.

 동시에···.

 “나, 너랑 붙어먹는 김재천이 마누라다!! 왜!!”

 “사, 사모···님?”

 무슨 짓이냐고 악다구니를 썼던 것도 잠시. 주춤 뒤로 물러서고만 주미의 낯빛이 대번에 흙빛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이 아줌마가 여긴 왜?

 “사모니임? 이 예의 바르게 양심 없는 년 좀 봐라. 지금 사모님 소리가 나오지? 어?”

 여자가 살의로 번뜩대는 두 눈을 튀어나올 듯 부라리더니 다시 손을 뻗어 주미의 머리채를 홱 낚아챘다.

 “이리와, 이년아!”

 “악―!”

 피할 새도 없이 휘어 잡힌 머리카락이 우악스레 잡아끄는 손을 따라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회사 옮긴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디서 같잖게 잔대가리를 굴려, 이년아!! 그렇게 처맞고도 아직도 붙어먹어? 이게 아주 죽고싶어서 환장을 한 거야, 그치? 이 불여시 같은 년!”

 로비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여자의 모습에, 주변에 있는 직원들의 표정이 경악과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머리채가 휘어 잡힌 와중에도 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만은 생생했다.

 이전 회사에서도 사무실로 쫓아와 푸닥거리 한 판 제대로 하더니.

 이씨, 이 무식한 여편네가!

 “대체 왜 이러세요옷!”

 한창 잘 돌아가던 와중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주미가 꽥!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손을 뿌리쳐버렸다.

 “의부증도 정말 정도껏 하셔야지!”

 “하? 뭐가 어째?”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친 여자가 손끝으로 주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다시 말해봐. 의부증? 의부즈응?”

 어깨가 툭툭 쳐질 때마다 주미의 다리 또한 한 발 두 발 뒤로 밀렸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연출되는 볼썽사나운 모습에, 주미가 안 되겠다 싶어 자세를 바꾸었다.

 “정말 너무하세요, 사모님. 흑···.”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난 회사에서도··· 아무 죄 없는 절 상간녀로 몰아가시더니, 이젠 옮긴 회사까지 찾아오셔서··· 흑.”

 “얼씨구.”

 처연하게 우는 얼굴을 보며 여자가 찰진 추임새를 날렸다.

 “오냐, 그래. 누가 미친년인지 어디 한 번 밑장 까봐? 엉?”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직전까지 사정없이 머리채를 잡아 흔들던 손이 여자의 손에 들린 클러치백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