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색색- 흐느낌이 가시지 않은 숨소리가 그의 어깨에서 미약하게 흩어졌다.
도하는 흔들리는 차체를 따라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을 가만히 눌러 제 어깨로 고정시켰다.
“기사님, 천천히 가주세요.”
그의 조용한 부탁에 앞에 앉은 기사가 “네.”하며 속도를 줄였다.
도하가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든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차창 너머로부터 간간이 새어 들어온 불빛이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반짝이며 스쳐 지나갔다.
‘제발 이러지 말고 일어나자, 도하야··· 흑···.’
다경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결국 함께 응급실로 가 찢어진 상처를 꿰매고 오는 길이었다.
그의 다친 손을 본 순간부터 눈물 바람이던 다경은 치료를 받는 내내 옆에서 우는 것 같더니, 결국 차에 타자마자 이렇게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꽤 깊은 잠에 빠진 듯한 다경을 보며, 그가 새하얀 뺨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젖은 눈꺼풀을 가늘게 떨면서도 일어나지는 않은 다경이 도리어 그의 품에 깊게 안겨 왔다.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하루 동안, 그 많은 일을 겪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쓰러지지 않은 게 오히려 용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도하는 앞으로 둘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우리 남은 계산은 이 정도에서 끝냈으면 좋겠어.’
조금 전 다경이 했던 말처럼, 남은 계산을 끝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관계를 끝내는 건 그에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10년이 지나도 떨치지 못한 마음이었다.
다 잊었다 생각해 놓고도, 재회한 순간 선명하게 일어나 들끓어 오른 소유욕과 갈망.
그런데 눈앞에 다경을 두고 남인 채로 지낸다니, 그런 게 제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엔 저란 놈이 지은 죄가 너무도 컸다.
이 애의 지난 10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원흉인 주제에 뻔뻔하게 나를 사랑해 달라, 다경에게 요구할 순 없었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마음을 접지 못하는 건, 저란 놈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나쁜 놈인 탓이다.
네가 결국 그 모든 걸 참았던 이유가 날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게 크나큰 죄책감과 절망으로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론 그걸 빌미로 널 내 옆에 묶어둘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있으니.
‘그래도, 이대론 안 되겠지?’
도하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눈물로 발개진 여린 눈가를 느릿하게 엄지로 쓸었다.
‘이런 채로 네 마음 한 줌이라도 쥐고 있길 바라는 건, 하늘이 노하고도 남을 욕심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끝을 파고드는 다경의 온기는 그대로 삼키고 싶을 만큼 달콤하기만 하다.
내가 널 어떡하면 좋을까, 다경아.
아프고도 예쁜 널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욕심내기엔 너무 죄스럽고, 그렇다고 외면하기엔 너무 큰 이 마음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갈무리 지어야 하는 걸까.
곤히 잠든 얼굴을 보며 그렇게 정리되지 않는 고민들을 이어가는 사이, 어느덧 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차를 마친 기사로부터 키를 건네받은 도하가 여전히 제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만 깨울까. 아니면 이대로 좀 더 재울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다른 결론과 함께 차에서 먼저 몸을 빼내었다.
그런 뒤 시트에 위태롭게 기대어 있는 몸을 제게로 당겨 양팔로 다경을 안아들었다.
가벼웠으나, 막 응급실에서 봉합하고 온 손 위론 어쩔 수 없는 둔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다 꿰맨 부위가 다시 또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다시 꿰매면 그만일 일이었다. 제가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은 다경이 10년을 겪어온 것에 비하면 발끝도 미치지 못할 하찮은 감각일 뿐이니까.
손바닥에 가해지는 고통을 무시한 채 그는 잠든 다경을 안고 오피스텔의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움직임이 컸다가 행여 그녀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깨자마자 보내줘야겠지만 편한 침대에서 조금만 더 편히 잘 수 있게 해주자. 다경을 안은 도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우뚝, 복도를 따라 걷던 걸음이 붙박인 듯 멈춰섰다.
다경을 살피다가 습관처럼 정면을 향한 눈에 문 앞에 선 낯익은 인영이 잡혔다.
동시에 시릴 만큼 차갑게 굳어버린 그의 눈동자가 초조하게 복도 끝을 돌아본 시선과 정면으로 맞닿고 말았다.
“도···.”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뱉으려던 입술이 품에 안긴 존재를 확인하곤 뒤늦게 숨을 삼켰다.
상대를 알아채자마자 일어선 적개심과 보호 본능이 다경을 안은 팔과 손에 꽉 힘을 실리게 했다.
차마 그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눈이 외면하듯 허공으로 돌아선다.
둘도 없는 선인이자 아군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이제는 그 누구보다 두려워져 버린, 제 어머니였다.
* * *
다행히 깨어나지 않은 다경을 침대에 눕혀 놓고 방 밖으로 나왔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도하는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없이 앞서 걷는 아들을 따라 커피숍으로 들어온 연수가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물었다.
“걔니?”
“···.”
“한국에 오자마자 다시 만난 거야?”
다경을 언급하는 목소리에선 죄책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고 있을 수 있느냐는 한심함과 경멸이 묻어나 있었다.
“그러게요.”
픽, 허탈한 웃음을 뱉어낸 도하가 앞에 놓인 물 한 모금을 홀짝 들이켜곤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용을 써도, 만날 인연은 다시 그렇게 만나더라구요. 누군가의 남모를 노력이 무색해지도록.”
웃음기 있게 시작했던 첫 마디와는 달리, 마지막 맺는 말은 살이 에도록 싸늘했다.
그 앞에서 숨죽인 채 입술을 사리물고 있던 연수가 한숨을 놓듯 말을 뱉었다.
“속여서 미안하다, 도하야.”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매만지는 손이 불안하게 떨렸다.
“조금 전 그런 식으로, 그때 일을 듣게 한 것도 엄마가 정말 미안해.”
반나절 사이 수척해진 얼굴이 재차 사과를 반복했다.
한 떨기 목련처럼 우아하던 낯색이 오늘은 지는 꽃잎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그 떨어져나온 잎은 어머니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더해질 때마다 더욱 추하고 형편없는 갈색으로 처참하게 변해갔다.
“하필 네가 천한 다방 마담 딸과 눈이 맞았다며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 일이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
궁색하게 늘어놓는 변명들이 그의 안에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기대의 한 자락마저 완전히 잘라냈다.
“네 아버지가 알게 되기 전에, 내 선에서 조용히 해결을 한다는 게 그만···.”
“말씀 다 하셨어요?”
메마른 가지처럼 건조한 음성이 연수의 가느다란 음성을 단호히 잘라냈다.
“어?”
“끝나셨음 그만 일어나려구요.”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그가 가차 없이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하야.”
다급히 몸을 일으킨 연수가 절박한 얼굴로 아들을 붙잡았다.
“이,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뭐라고 말이라도 해 줘야 내가, 이 엄마가 숨이라도 좀 쉬지. 응?”
그 순간, 피식 헛웃음을 터트린 도하의 입술이 비릿하게 휘어졌다.
“왜 이전엔 몰랐을까요.”
“···뭐?”
“어머니께서 이렇게나 이기적이신 분인걸.”
웃고 있지만, 그래서 더 냉혹한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연수가 도하를 붙잡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줘야 숨이라도 좀 쉬시겠다구요?”
방금 전, 제 어머니가 저를 붙잡으며 했던 말을 되뇌며 도하가 기가 찬다는 듯 눈매 끝을 접었다.
“두 모녀는.”
그러다 일순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채 잔인한 어조로 제 모친에게 되물었다.
“10년을 넘게 냉가슴 앓는 벙어리로 살게 만드셨으면서, 어머니께선 고작 하루 만에 숨이 막히세요?”
“도하야···.”
연수가 덜덜 떨리는 손끝을 꽉 움켜쥐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겨우 그것도 못 참으실 거면서, 그런 감당 못 할 짓은 왜 하셨어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아니면 곧 죽어도 천륜이니, 제가 다 참고 묵인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 그게 아니라 도하야.”
“그거 아세요, 어머니?”
또 어떤 변명을 지껄이려 그게 아니라는 말을 뱉는 목소릴 잘라내고, 도하가 차디찬 눈으로 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낮에, 어머니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듣고도 끝까지 버리지 못한 기대가 있었어요.”
기대라기보다는 제가 제 어머니에게 건 최소한의 바람이었다.
“비록 10년 전. 부모로서의 이기심을 못 이겨 그런 짓을 저질렀지만, 불쌍한 모녀에게 했던 짓을 뒤늦게나마 후회하셨기를. 오늘 이렇게 날 찾아와서 뱉는 말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구차한 변명이 아닌 그들에 대한 사과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었다구요. 그런데···.”
‘어쩜 제 엄마인데 그렇게 몰라.’
오늘 낮, 진짜 그 뒤에 숨은 배후는 알지도 못한 채 다그치는 제게 김주미가 뱉었던 말이 뼈아프게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제가 정말 제 어머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더라구요.”
부모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누나 같고 소녀 같았던 어머니. 편견 어린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안의 내면을 본다고 믿었던 어머니.
스스로의 잘못을 피해가기보다는 인정할 줄 알고, 용서를 구할 줄 알았던 어머니.
하지만 그 모든 건 제 부모를 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있었던 미련한 내 바람이었을 뿐···.
“돌아가세요.”
더는 대화할 의욕조차 상실한 그가 서늘한 눈으로 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상, 더는 어머니께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막 몸을 돌린 찰나.
“그깟 여자애 때문에 네 엄말 더는 안 보겠단 뜻이니?”
연수가 방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로 도하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