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당분간 좀 쉬고 싶어.”
집에 누워 한참 간 천장만 바라보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오늘의 그 도망침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며칠 현실을 도피한다고 해서 없어질 구설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당장은 좀 두려웠다.
돌아서는 제 등 뒤에 꽂힐 냉혹한 눈들이. 사실 여부를 떠나 신랄하게 수군거릴 수많은 입이.
그 또한 제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단 며칠만은 그 눈들로부터 편해지고 싶었다.
“며칠 좀 쉬었다가 상황 봐서 복귀할게. 물론, 그 안에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으면 그건 송 과장님이나 미애씨 편으로 바로바로 전달할 테니까···.”
“그거면 돼?”
옆에 앉아 줄곧 말이 없던 도하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반복해서 물었다.
“며칠 좀 쉬면, 추스를 수 있는 마음이야?”
오늘 아침, 그런 일을 눈앞에서 보고도 도망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했던 그였다. 때문에 당분간 쉬고 싶다는 제 말에 당연히 안 된다는 말부터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좀 쉬면 추스를 수 있는 마음이냐니.
“글쎄.”
가만히 그가 건넨 물음을 곱씹던 다경이 이내 피식,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안 된대도 어쩔 수 없잖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남들처럼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씁쓸하게 웃는 다경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뜻 모를 눈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오전의 상황 때문일까.
오늘따라 어딘지 가라앉아 있는 듯한 도하의 분위기가 다경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물론, 평소와 같은 게 더 이상할 문제였으나 앞으로 제가 해야 할 말이 못지않게 비장한 탓일까. 괜스레 그의 침묵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다경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듯 무릎 위에 놓은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더욱 정리하기 힘들 테니까.
“다만···.”
무겁게 숨을 눌러 삼킨 다경이 망설임을 뿌리치고 입술을 뗐다.
“우리 남은 계산은 이 정도에서 끝냈으면 좋겠어.”
며칠 새 가을의 것에 가까워진 선선한 바람이 각자의 정면을 바라보는 둘 사이로 느리게 흘러 지나갔다.
“저런 불편한 소리 오가는 상황에서, 남의 말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괜한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
김주미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좀 더 모르는 척 뻔뻔하게. 네 온기를 만끽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10번이면 정리할 관계였으니. 그 10번이라도 원없이 누리며 철없는 미련의 밑바닥까지 비어 내겠다 합리화를 거듭했을지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마저 내 지난 과거를 알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 이상, 둘의 관계를 이어가는 건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등 좋을 게 없었다.
무엇보다, 주미가 도하의 모친에게 어떤 말을 전했을 때. 적어도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흔한 변명거리라도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주미도, 너의 어머니도, 지난 과거에 대해 네게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지.
“···.”
이미 제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하고 온 탓인지. 듣자마자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옆자리에선 의외로 아무런 말도 돌아오질 않았다.
아니면,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문제라 여긴 걸까.
조용히 허공만 응시하는 도하를 곁눈질로 살피다가 결국 기다리다 못해 마저 말을 이었다.
“10년 전에 너한테 빌렸던 그 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서 갚을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알다시피 이젠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그걸 네가 왜 갚아.”
낙엽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낮고 짙은 저음이 못다 뱉은 말허리를 갈랐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린 거. 돈 몇 푼 아쉬워서가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도하가 제게 그런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가를 바라고 준 돈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갚고 싶었다. 그래야 너와 나 사이에 남은 묵은 미련들을 일부는 털어낼 수 있을 테니까.
자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질질 끌었던 것도, 결국은 미처 털어내지 못한 미련의 합리화였을 뿐이다.
“그냥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다경이 단호한 어조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한 심장이 파르르 조여왔다.
몇 마디를 끝으로 다시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 도하가 대꾸도 없이 바람 사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도 이번엔 그냥 이 관계를 받아들이려는 모양이다.
“그럼 너도 동의한 걸로 알고···.”
“왜 말 안 했어, 너.”
울컥이는 마음을 눌러 삼키며, 막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찰나였다.
“왜 솔직하게 말 안 하고 여태 다 참았어.”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물음에, 다경이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도하의 얼굴이 비로소 제대로 두 눈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쿵,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 때문이라고.”
어울리지 않게 충혈된 검은 눈이 뿌연 습기를 머금고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왜···, 어째서···.
“도하···.”
“네 엄마가 그랬다고.”
반사적으로 부를 뻔한 이름을 가로막으며, 그가 씹어뱉듯이 읊조렸다.
네 엄마라니. 설마.
“···도하야, 너 그걸···.”
“10년 전 너희 두 모녀를 그렇게 쫓아낸 게 내 어머니였다고.”
후두둑- 떨어져 버린 눈물이 순식간에 도하의 얼굴을 적셨다.
“어린 네 가슴에 비수를 꽂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권도하 네 엄마라고!!”
가슴이 아릴 듯 시린 절규가 텅 빈 공터를 어지럽게 휘돌았다.
“솔직하게 말 안 하고 왜 그걸 다 참았어. 왜 나 같은 새끼 억지를 다 받아줬어, 대체 왜!!”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너져내린 도하가 먼지 날리는 흙바닥을 꽈득-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네 불행의 정점이 바로 나였다니.
널 울게 한 게 나였다니.
그토록 너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고 장담했던 내가, 널 지옥으로 내몬 원흉이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10년을 널 원망하고, 또 감히 널 욕망했는데.
“내 어머니가 너한테···. 어린 너한테 그런 짓을···.”
뚝, 뚝― 그의 눈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굵은 빗방울처럼 모래 위로 짙은 자국을 새겼다.
“너, 그걸 어디서···.”
대체 어디서 들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다경은 차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도하가, 누구보다 강했던 그가, 제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 다경은 눈앞의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만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긴 시간 품어온 죄책감을 외면하고 그리움을 뒤로한 채, 네 마음을 열댓 번도 더 할퀴고 밀어냈던 건데.
“나란 놈은 그것도 모르고··· 너한테···.”
결국,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으로 도달해버린 현실이 다경에겐 또 다른 의미의 절망이었다.
그때, 눈물로 일렁이던 갈색 눈에 뒤늦게 도하의 손이 보였다.
“너··· 손이 왜 그래?”
주저앉아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이 붕대에 감싸인 채 불긋한 핏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가라앉았다.
“다친 거야? 아님···.”
습관처럼 뱉은 말을 삼켜버리고 부리나케 그의 앞으로 주저앉았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도하야.”
다친 주제에 무식하게 움켜쥐고 있는 손의 붕대 위로 피가 더 짙게 배어 나왔다.
미쳤어, 권도하!
“아직도 피 나잖아! 일어나, 빨리!”
사색이 된 다경이 숨넘어갈 듯 외치며 그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하지만 도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설마.”
제발 일어나라 절박하게 외치는 다경을 도하가 물기 머금은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나 때문에 참은 건 아니지?”
“···뭐?”
“내가 알면 무너질까 봐. 죄책감에 힘들어할까 봐, 그래서 숨긴 건 아니지? 응?”
도하가 젖은 눈동자로 절박하게 반복해서 물었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어야 했다.
네가 이 모든 사실을 숨기고 혼자 끙끙 앓았던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니어야 했다.
내가 입을 상처와 충격 때문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다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다경의 그 시린 침묵이 날카롭게 심장으로 꽂혔다.
“정말··· 정말로 나 때문이었어?”
기가 찬 듯 헛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쏟아내는 그의 기다란 눈가로 주륵, 눈물이 타고 흘렀다.
“어떻게···, 어떻게 넌···.”
가슴이 송두리째 짓이겨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도하가 붕대 감은 손으로 땅바닥을 후벼 팠다.
흙먼지가 엉겨 붙은 붕대 위로 배어 나온 붉은 핏자국이 눈앞이 아찔하도록 선명해졌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아···.”
그가 아래로, 더 아래로 무너져내리는 게 보였다.
“아, 아냐, 도하야.”
어느새 눈물로 온 얼굴이 젖어버린 다경이 부리나케 그런 도하의 얼굴을 붙잡았다.
“너 때문 아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런 거야.”
무너져내리는 그를 추켜 올리며, 다경이 안간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내 죄책감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너한테 준 상처 때문에. 흑··· 10년 전 그날, 돈이랑 같이 받아갔던 네 진심에 미안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래. 그날 저는 오백이라는 돈과 함께 도하가 제게 보인 진심을 챙겨 달아났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을 저로 인한 끔찍함 속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 앞에서 항상 일방적인 피해자인 척 굴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10년 전 그날 후로 지옥 속을 거니는 건, 비단 나 혼자뿐만이 아니라는 걸.
“미안··· 미안해, 다경아··· 아···.”
도하가 타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재차 그 말만 반복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피로 붉게 물든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은 가느다란 팔을 꽉 움켜쥐며 도하가 그 안의 고통을 토해냈다.
“제발, 제발··· 도하야···.”
항상 단단했던 그의 무너짐이 다경의 가슴 안에 남은 마지막 장벽마저 완전히 허물어트렸다.
이럴까 봐 숨기고 싶었던 건데. 이럴까 봐 더 욕심내지 않으려 했던 건데.
네가 이렇게 아파할까 봐. 아···.
“제발 이러지 말고 일어나자, 도하야··· 흑···.”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미안하단 말만 재차 반복하는 그를, 다경이 와락 품에 안았다.
재회 이후 줄곧 그를 밀어냈던 손으로 그를 꽉 끌어안곤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나··· 나 더는 못 보겠어. 너 아픈 거.”
더는 못 보겠다며 애원하듯 읊조린 목소리를 끝으로 두 눈을 꾹 감아버린 다경의 목에서 엉엉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흘러내린 눈물이 품에 안은 그의 정수리마저 적셨다.
목 놓아 우는 다경의 흐느낌이 오후의 한적한 공터를 애달프게 채운다.
제 몸을 적시는 다경의 눈물을 느끼며, 도하 또한 꾹 두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