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렇다고 마땅히 갈 곳도 없잖아.’
때늦은 합리화를 마치고 카드키를 꽂자, 컴컴하던 실내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발을 들이자마자 커다란 침대부터 보이는 방을 보며 도하는 남몰래 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할까. 뭐부터 하면 좋을까. 순서 없이 뒤죽박죽된 머릿속이 엉망도 이런 엉망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저와는 달리, 다경은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아니, 덤덤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런 일을 눈앞에서 모두 보고 겪었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TV라도 좀 켤까?”
생기 잃은 메마른 눈 덕에 자꾸만 곁가지를 치는 생각들을 끊어내며, 도하가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먹먹한 적막으로 에워싸인 공간에 희미한 소음이 섞여들었다.
― 잠시 후,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10초 카운트를 시작하겠습니다!
TV 속에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는 이들이 모여 타종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넋 나간 듯 멍한 갈색 눈이 그럼에도 미동조차 않은 채 허공만 응시한다.
오늘 낮에만 해도, 화면으로 보이는 저 환한 얼굴들처럼 둘 또한 웃으며 새로운 해를 함께 맞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이라는 게 계획대로 되기가 이렇게나 어려웠다.
“어디 다친 덴 없어?”
도하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다경의 옆자리로 나란히 앉으며 그녀를 살폈다.
다경은 대답 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겉으론 별다른 상처가 없어 보였지만, 아마 더 큰 건 육안으론 볼 수 없는 여린 마음에 진 상처들일 테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분노가 밀려드는 주먹을 꽉- 힘주어 쥐었다가 편 그가 이내 감정을 억누르고 코트 안 주머니를 뒤적였다.
“가방에 넣어놔.”
안에서 꺼낸 봉투를 다경의 앞에 건네자, 줄곧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뭐야, 이게?”
뭐냐고 물었지만, 불길하게 반응하는 심장은 이미 본능적으로 그가 건넨 것이 무엇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이 봉투는 둘이 호텔로 들어오기 전 들렀던 도하의 집 앞에서, 그가 삼촌인 보건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이었다.
택시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기에 대체 왜 그러나 했는데, 설마···.
“급히 구하느라 오백 정도밖에 못 담았어.”
선뜻 받아들지 않는 손 대신, 직접 다경의 가방에 넣어주며 그가 말했다.
오백이라니.
설마, 하던 마음을 확신으로 바꾸는 말에 가방 속을 바라보는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네가 왜···.
“며칠 내로 좀 더 구해 볼게.”
내가,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네 앞에 온 건데···.
“얼마나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일단 그걸로 급한 불이라도 끄면···.”
“···흑···.”
높은 파고처럼 밀려드는 감정들이 어찌해볼 새도 없이 흘러넘쳤다.
“왜 또 울어.”
툭, 투둑- 순식간에 다경의 작은 뺨을 덮고 그녀의 청바지로 떨어진 눈물을 보며 도하가 낮게 욕설을 삼켰다.
“울지 마. 말했잖아, 내가. 너 우는 거 보면 내 머리가 돌 것 같다고.”
젖은 얼굴을 다급히 붙잡아 올리곤, 따뜻한 엄지로 시린 눈가를 다정히 문질러주었다.
그럼에도 다경의 눈물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미안해서 그러는 건지, 창피해서 그러는 건지. 도하는 지금, 누구보다 복잡할 다경의 속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제 수준에 맞는 위로를 건네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괜찮아, 다 해결될 거야.”
제가 감히 가늠조차 못 할 상처로 깊게 파인 마음을, 그저 이렇게 달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나도 진짜 성인이니까, 어떤 쪽으로든 지금보단 널 더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만 울라고, 재차 같은 말을 반복해보지만 한 번 터져버린 눈물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흐, 윽···.”
“괜찮아. 괜찮아···.”
두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기만 하는 다경을 품에 안은 채, 도하가 하염없이 그녀를 다독였다.
그렇게 얼마쯤 다경의 울음을 가슴에 받아내고서야, 한없이 떨리던 어깨가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걸까.
널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네게 튈 구정물까지 모조리 뒤집어 써주겠다고 장담했던 나인데, 막상 상처받은 네 마음 하나 달래는 것조차 이렇게나 어렵다니.
“다 울었어?”
가까스로 진정이 된 작은 몸을 품에서 떼어내며, 도하가 바닥만 바라보는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울어놓고도 그늘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다.
나지막이 한숨을 삼킨 그가 결국 다경을 바르게 앉혀놓고 몸을 일으켰다.
“우선 뭐라도 좀 먹자. 저녁도 못 먹었을 텐데.”
보나 마나 반나절 이상은 굶었을 다경을 뒤로하곤 지갑을 챙긴 찰나였다.
― 이 카운트다운과 함께 아쉬운 올해를 떠나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겠습니다!
문득 소란스러워진 진행자의 음성과 함께 사람들의 들뜬 얼굴이 화면 속을 꽉 채웠다.
― 이제 30초 남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카운트다운 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우렁찬 목소리를 시작으로 십부터 시작된 숫자가 차례로 사람들의 입을 타고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10, 9, 8, 7···,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 끝에서 징― 하고 낮고 길게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고요한 룸 안마저 가득 울렸다.
“하. 저녁은 무슨, 벌써 12시네.”
각자 소원을 비는 사람들 머리 위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도하가 다경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앞에 슬쩍 몸을 낮춘 그가 멍하니 화면 속을 응시하는 작은 얼굴을 붙잡아 제게로 돌렸다.
“Happy new year.”
지잉― 징, 잔잔하고도 무겁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사이로 도하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스무 살 된 거 축하해, 윤다경.”
오늘 하루, 눈물이 마를 시간이 없는 연한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그가 희미하게 눈매를 접었다.
“같이 겨울 밤바다 보면서 촛불이라도 켜놓고 축하하고 싶었는데, 올해는 이게 최선인가 보다.”
함께 맞이한 스무 살.
감히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지도 못하는 다경의 눈에 다시금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대신에 스물한 살 1월 1일엔 꼭 좋은 거 보면서, 맘껏 행복하자.”
아쉽고 아픈 올해를 떠나보내고, 그래도 함께라서 행복한 내일을 떠올리며 그가 다경의 이마에 촉- 입을 맞추었다.
스물한 살의 1월 1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우리의 내일을 기약하는 네가 나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다.
하필, 이런 날. 그 많고 많은 날 중에 하필 오늘. 내게 꼭 이런 불행이 왔어야만 했던 걸까.
“TV 보고 있어. 아래 가서 뭐 먹을 것 좀 사 올게.”
자꾸만 젖어 드는 여린 눈가를 매만져 주며 빙긋 입꼬리를 당긴 그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마.”
막 한 걸음을 디디려던 순간,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가느다란 팔이 그를 붙잡고 말았다.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니까, 그냥··· 여기, 나랑 같이 있어.”
다경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감겨오는 여린 체온에 도하는 심장이 발밑까지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처음이었다. 다경이 이런 식으로 제게 먼저 손을 뻗어온 것은.
당혹감에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던 도하가 저를 꽉 끌어안는 팔을 조심스레 붙잡아 풀며, 다경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려는 거 아니야. 여기서 너랑 같이 있을 거야, 해 뜰 때까지.”
어째서 다경이 이토록 절박하게 저를 붙잡는 것인지 알 것 같아, 그가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배는 채워야 할 거 아냐, 바보야.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텐···.”
그 순간, 미처 말을 맺기도 전 다가온 입술이 다급히 그의 숨결을 삼켰다.
서툴게 그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여린 온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했다.
당황한 나머지, 눈조차 감지 못한 도하가 제게 입을 맞추는 다경을 빤히 시야에 담았다.
그러다 뒤늦게 그에게서 멀어진 다경이 아슬아슬한 얼굴로 그를 향해 속삭였다.
“하고 싶어.”
윤다경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듣고 있으면서도 바로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뭘···.”
“네가 지난번에 말했던 허튼짓···.”
행여 그가 물러설까 봐, 옷깃마저 꾹 그러쥔 다경이 절박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오늘 너랑 하고 싶어.”
머릿속이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분명 들어놓고도, 정말 제가 이해하는 바가 맞나 싶어 자꾸만 생각이 겉돌았다.
허튼짓을, 하고 싶다고. 나와 오늘 그러고 싶다고.
그게 대체 뭔 줄 알고···.
그때, 다경의 입에서 좀 더 선명한 의도를 가진 말이 내뱉어졌다.
“네가 그랬잖아. 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다고. 오늘 해, 그거.”
“···.”
“허튼짓해줘, 도하야.”
동시에 굳은 듯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품으로 다경이 서툴게 안겨들었다.
“윤다경.”
그제야 뒤늦게 이성을 차린 도하가 서둘러 다경을 붙잡아 품에서 떼어 놓았다.
물기 머금은 회갈색 빛 눈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다경이 무슨 생각으로 제게 이러는 것인지 뻔히 읽혔다.
저 또한 이럴 생각이 아주 없었다고 한다면 명백한 거짓이었다. 아니, 여행을 계획하고부터 내내 머릿속엔 윤다경과 이 밤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음흉한 생각밖에 없었다.
가벼운 입맞춤 하나에도 바르르 떠는 순진한 널 상대로, 내가 어떤 더럽고 음흉한 상상까지 펼쳤는지 안다면 넌 아마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 돼,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