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하! 이 여편네가 지금 뭐라는 거야?”
엄마가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여자의 어깨를 손으로 밀쳤다.
“당신이 뭔데 내 가게에 대해서 지껄여? 당신이 뭔데 우리 두 모녀가 살 곳을 운운해!”
“글쎄요. 아마도···.”
제 어깨에 닿는 손을 붙잡아 지그시 물린 여자가 오만한 얼굴을 한 채 덧붙였다.
“지금 다경 엄마 앞으로 접수 된 소장 정돈, 가볍게 취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랄까?”
“뭐야?!”
“긴 말하지 않을게요.”
그와 함께 잘 다듬어진 가지런한 손이 검정색 클러치백에서 묵직한 봉투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이거 들고, 당장 하곡에서 떠나요.”
“···아주머니.”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밖에 없는 물건을 바라보며, 다경이 결국 그녀를 소리내어 부르고 말았다.
“부족하다고 하면 좀 더 준비해줄게요.”
하지만 여자의 눈에 인정 따윈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흔들리는 다경의 눈을 보란 듯이 마주한 채 말했다.
“그간 알아온 정이 있으니, 나도 그렇겐 해줘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거든.”
“이 정신 나간 여편네가 어디 와서 돈지랄이야!!!”
덥석, 봉투를 집어든 엄마의 손이 그 안에 든 돈을 꺼내 여자의 얼굴 위로 확― 뿌려버렸다.
“어머나!”
“세상에, 저 여자가 미쳤나!!”
도하 엄마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지폐들을 보며, 뒤에 있던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돈이 없지, 존심이 없는 줄 알아?!”
엄마가 아랑곳 않은 채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내가 왜 당신 같은 여자 돈을 받고 여기서 떠나! 내가 왜!”
미동조차 못하고 서있기만 하는 딸을 뒤로 감추곤 바락바락 외쳤다. 그러자 땅에 떨어진 지폐 한 장을 날카로운 힐 끝으로 슥, 치워버린 여자가 이내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안 그럼 이대로 당신 딸도 못 보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서 몇 년을 지내야 할텐데. 괜찮겠어요?”
“머, 뭐라고?”
줄곧, 가식적이나마 웃음을 드리우고 있던 얼굴 위에 씻은 듯 미소가 가셨다.
감방이라니···.
조금 전 아줌마들에게 들어놓고도 잊어버린 문제가 또다시 면전으로 내던져졌다.
“무, 무슨 말이야. 그게?”
온갖 모욕에도 꺾일 줄 모르던 엄마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여자가 엄마의 얼굴 위로 앉은 공포를 눈치 채곤 가벼이 웃었다.
“이렇게 떠나나 저렇게 떠나나, 어차피 떠나야 할 집인데 뭐라도 챙겨 들고 더 편한 곳으로 가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지, 지금 당신··· 날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
피식, 입술 끝을 당긴 여자가 발 아래 흩어진 지폐 한 장을 구겨 밟으며 엄마에게로 다가섰다.
“그러게,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딸한텐 알려줬어야죠.”
휘어진 눈초리 안에서, 그럼에도 냉혹하게 빛나는 검은 눈을 슥― 옆으로 돌리곤 나지막이 속삭였다.
“남의 집 감이 좀 탐스럽기로서니 무턱대고 손을 뻗으면 되나.”
심장이 쿵, 발밑까지 내려앉았다.
이 믿기 힘든 행동의 이유가 바로 본인의 아들 권도하 때문이라는 듯.
그녀가 다경의 눈을 빤히 직시한 채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온화함과 다정함 따윈 착각이었던 것처럼, 냉혹하게 시린 눈만이 다경을 겨누었다.
남의 집 감···. 무턱대고···.
그 말을 곱씹는 다경의 눈자위로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내가 도하를 만난 게, 도하를 좋아하게 된 게. 아줌마에겐,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남의 집 탐스러운 감을 욕심 낸 도둑과 같은 짓이었던 거야···.
“알아들었으면, 흔적 남기지 말고 여기서 떠나요.”
그녀가 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어떤 송곳보다도 날카롭게 심장에 박혔다.
그사이, 여자들이 테이블 위에 모아놓은 돈을 짧게 눈짓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 하나뿐인 딸까지, 댁 인생처럼 살게 만들고 싶진 않겠죠.”
그렇게 도하의 엄마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전하고 다방을 떠났다.
그녀가 나가자, 그녀의 뒤에 시녀처럼 서 있던 무리들도 함께 빠져나갔다.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 앉은 엄마와 그 옆에서 미동조차 못한 채 멍하니 서있는 다경을 향해, 주미는 “꼴 좋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문이 닫히지 않은 다방 안으로, 시린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쉴새 없이 들이쳤다.
그들이 사라지고 둘뿐인 곳에서, 다경은 분노와 절망이 뒤엉킨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다경아.”
시린 정적을 뚫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엄마였다.
“그 남자들이랑 자고 그런 건 아냐.”
항상 독한 말들로 자신의 입장을 비호하기 바빴던 엄마는 간곡한 목소리로 딸의 발에 매달렸다.
“차 팔고 술은 팔았어도 몸은 판 적 없어. 네 눈에 이 엄마가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말 오해야. 엄마 그런 적 없어, 진짜야.”
모든 건 오해라고. 그런 적 없다고.
정작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쓸데없는 변명만 재차 반복할 뿐이었다.
“돈은···.”
한참 간 대꾸 없이 허공만 보고 있던 다경의 눈이 툭, 제 발 아래로 향했다.
“돈은 왜 받은 건데?”
“받은 거 아냐. 빌린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엄마가 다경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빌렸냐고.”
“그, 그건···.”
집의 금전적인 문제까진 어려서 잘 알지 못하는 다경이었으나, 급히 누군가에게 손을 벌려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빚이야 많았지만, 그럭저럭 되는 장사 덕에 꼬박꼬박 낼 것은 내고 있어서 더는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빚쟁이들도 없었다.
그런데 왜 돈을 빌려야 했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다경은 그것이 궁금했다.
왜, 생전 하지도 않던 짓을 해서 오늘과 같은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것인지.
“대체 뭔데, 아저씨들한테 돈을 빌려야 했던 이유가.”
다경의 반복된 물음에,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던 엄마의 입술이 어쩔 수 없이 떨어졌다.
“다경이 너, 대학 보내려고.”
다경은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희미하게 눈초리를 일그러트렸다.
지금 엄마가 뭐라고 한 거야.
대학? 내 대학이라고?
“너 갈 대학교 앞에 작은 방 한 칸이라도 얻으려면 돈이 필요했어. 등록금이야 네가 장학금 받아 갔다지만, 몸 누일 곳은 있어야 하니까. 근데 얼마 전에도 빚쟁이들이 있는 돈 없는 돈 싹 다 긁어가서 한 푼도 안 남아있길래···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이 동네에서 맘 편히 부탁할 사람들이 다방 오가는 남자들뿐이잖아. 그래서··· 그래서 차용증까지 써가면서 빌린 돈인데···.”
이어지는 말들을 들으면서도 다경은 도무지 엄마의 말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대학을 위해 빌린 돈이었다니. 내가 갈 대학교 앞에 방 한 칸이라도 얻어주기 위해 빌린 돈이었다니.
“하···.”
기가 찬 웃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다방에서 벗어나 보려 기를 쓰는 저를 향해, 대학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던 엄마였다.
집구석에 딱 틀어박혀서 어디 나갈 생각 말고 그렇게 살라고, 공부하는 저를 볼 때마다 악다구니를 퍼붓던 엄마다.
그런데, 서울에 내 방 한 칸 마련해주기 위해 돈을 빌렸다고. 그래서 이 사달을 낸 거라고.
“왜 그랬어.”
싸늘하게 식어내린 입술을 뚫고, 원망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냥 내버려 두지, 돈은 왜 빌렸어.”
“다경아.”
차분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묻어나는 딸의 원망에, 엄마가 절망 어린 얼굴로 다경의 손을 붙잡았다.
“여태 키워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며!”
탁, 소리가 나도록 엄마의 손을 뿌리치며 다경이 결국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어느 씨인 줄도 모르는 거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눈자위 가득 뿌옇게 차오른 눈물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놓고 왜, 대체 왜!”
목이 쉬도록 앙칼지게 내지른 목소리가 날카로운 파편처럼 홀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왜 아저씨들한테 돈은 빌려서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왜애!”
“내 배 아파 낳은 거잖아!”
줄곧 말이 없던 엄마의 입에서 악에 받친 대꾸가 빠져 나왔다.
“어느씨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니까 그랬다,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진심을 토해내며 엄마가 젖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목놓아 다경에게 외쳤다.
“고아로, 배운 것 없이 자라서 이 세상 살아가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 어떻게!”
동시에 쓰러지듯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린 엄마에게서 엉엉 아이 같은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받지 못해 줄 방법을 몰랐던 사랑을 울음으로 토해내듯, 엄마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경의 눈이 또 다른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어떤 원망의 말도 뱉지 못한 채, 우는 엄마를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내 새끼니까 그랬다고.
누구보다 잘 아는 삶이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고.
날카로운 손들에 잡아 뜯기면서도 운 적 없던 그 얼굴로 억장이 무너진 듯 우는 엄마를 보며, 다경은 도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넌 그 잘난 얼굴 때문에 망할 일 없게 남자 조심하랬지!”
한참을 울던 엄마가 돌연 날 선 눈으로 다경을 올려다보았다.
“사내놈들 때문에 인생 망친 네 엄마 봐놓고, 하필 저런 독한 여편네 아들놈이랑 눈이 맞아, 맞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