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98)

 65화.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던 끝에, 근처 공원으로 왔다.

 이른 시간에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순 없어 선택한 목적지였다.

 [어디야, 자기.]

 [대리님, 지금 어디 계세요?]

 다경은 오전이라 인적이 드문 한가로운 공원 벤치에 앉아, 제 휴대폰에 들어온 메시지들을 소리없이 넘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열어본 휴대폰엔 동료들이 보낸 걱정 어린 메시지가 줄줄이 들어와 있었다.

 [너무 걱정된다, 자기야. 확인하면 연락 좀 줘.]

 [사람들이 하는 말 같은 거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대리님.]

 [그렇다고 거기서 그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하니!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주고 가야지!]

 [별일 없는 거 맞지?]

 모두 송 과장님과 미애로부터 온 것들이다.

 저를 비난하기 바쁜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제 입장을 대변하듯 화내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그래놓곤 겁쟁이처럼 도망쳐버린 제가 걱정돼 그들이 보낸 메시지를 읽자, 다경은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아주 헛살진 않았나 보네.

 물론, 자꾸 이렇게 걱정만 끼치는 건 그것대로 미안하지만.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들이 보낸 메시지를 다 읽은 눈이, 그완 반대로 전화도 문자 한 통도 없는 한 이름을 떠올렸다.

 권 도하.

 물론, 그가 전화를 주길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격상 그렇게 뛰쳐나가버린 저를 그냥 보내줄 그가 아닌 걸 알기에, 부재중 전화 하나 찍히지 않은 화면이 어쩐지 좀 이상했다.

 어쩌면 붙잡는 그를 뿌리치며 제가 했던 말이 또다시 상처를 줬기 때문이려나.

 네가 이러는 게 오히려 날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거라는, 나의 말에 상처 받은 것일지도.

 “왜 하필···.”

 타이밍이 정말 어쩜 이렇게 안 맞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 만에 본 얼굴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번번이 어긋날 수 있는 건지.

 왜 이렇게 모든 게 힘든 건지.

 10년 전에도 원망스럽지 않았던 하늘이 오늘은 문득 원망스러웠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난 어째서 한 번을 편하게 네 품에 안겨 울지 못하는 걸까.

 너무 울어 먹먹해진 눈동자 위로 또다시 뿌연 안개가 드리웠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주제에 안 맞게 너무 많은 걸 욕심내고 있는 탓일까.’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굴레로 또 다시 처박혀버린 기억이 다경을 조금씩 잠식해가고 있었다.

 * * *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 윤다경 걔 인생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권 도하.

 팀장실을 나서기 직전 김주미가 했던 말만이 연거푸 귓가를 맴돌았다.

 ― 궁금하거든 네 엄마한테 가서 한 번 직접 물어봐.

 아닐 거라고, 제발 아니어야 한다고 아무리 부정해본들 김주미가 뱉은 말의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10년 전 윤다경을 하곡으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붙인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어머니라는 것.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부정하는 말이 샜다.

 세상에 둘도 없을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반항기 그득한 외동아들의 등쌀에도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었던 어머니.

 욕심 많고 권력욕 넘치는 아버지가 집 안은 살피지 못하면서도 아들인 제게 항상 무게를 주고 채찍질했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제게 그 어떤 무리한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줬던 분이었다.

 거기에 가족뿐만이 아닌 주변인들에게 보였던 따뜻한 모습과 특히 다경을 처음 봤을 때 비쳤던 다정함들.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의 됨됨이와 가치가 더욱 중요하다 일러주었던 어른.

 그런 어머니 아래서 자라, 저 또한 그와 같은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고 그렇게 자라왔다.

 때문에 감히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다경이에게.

 그런 엄마가 있어 부럽다 했던, 윤다경에게···.

 언제부턴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손이 차마 키패드를 누르지 못하는 휴대폰만 애꿎게 움켜쥐었다.

 다경인 지금 어쩌고 있는 걸까. 어딜 가서 무얼하고 있는 걸까 걱정되었지만, 도하는 도무지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만에 하나, 김주미가 내게 지껄이고 간 말들이 사실이라면. 정말 10년 전 그 일들과 내 어머니가 연관이 있는 거라면.

 아니, 그 일을 모두 주도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어머니라면.

 꽈악―, 손아귀에 든 휴대폰을 한층 거세진 악력으로 깨트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이런 생각으로 1분 1초를 버티는 것이, 도하에겐 지옥과 다름이 없었다.

 ‘이대론 안 돼.’

 다른 결론에 도달한 손이 결국 액정을 켜고 삼촌 정운의 번호를 눌렀다.

 ‘받아, 삼촌.’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신호만 갈 뿐, 전화 너머에선 어떤 목소리도 돌아오질 않았다.

 씹, 나지막이 욕설을 삼킨 도하가 성마른 몸짓으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는 이렇게 손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만약, 정말 제가 짐작하는 그것들이 사실이라면 행여 그것이 최악이라도 할지라도 제가 직접 부딪혀야 할 문제다.

 그가 차키를 손에 쥐고 다급히 팀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일찍 오셨네요, 삼촌.”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 집으로 돌아온 정운을 안성댁이 의아한 얼굴로 맞이했다.

 “누님 안에 있죠?”

 “아, 2층 응접실에서 꽃꽂이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

 “알겠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현관을 통과한 그가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닫는 계단을 올랐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기척 없이 2층 복도로 들어서, 노크도 하지 않고 곧장 응접실 문을 열었다.

 “뭐야.”

 투명한 유리병에 푸른 수국을 담는 중이던 이 집 안주인이 이내 의아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네가 이 시간에 집엔 어쩐 일이야? 학교는 어쩌구.”

 “누나가 그런 거야?”

 태평하게 꽃꽂이 중인 등을 바라보며, 정운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얘는?”

 그녀가 수국을 넣은 화병에 연보랏빛 글라디올러스 꽃을 꽂아 넣으며 심드렁한 웃음을 지었다.

 “10년 전, 다경이 모녀 하곡에서 쫓아낸 게 누나 짓이었냐고.”

 연분홍색 튤립을 들어 수국 사이에 꽂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때아닌 동생의 방문에도 자애롭게 입가를 당기던 웃음이 씻은 듯 안면에서 걷혔다.

 동시에 싸늘하게 식어내린 검은 눈이 선선한 온도로 정운을 향해 돌아섰다.

 “하···. 진짜 누나였던 거야?”

 정운이 배신감과 분노로 들뜬 눈을 숨기지 않은 채 씹어뱉었다.

 막 중간휴식 시간이 끝난 무렵, 친구 놈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배후에서 여자들을 움직인 게 아무래도 네 누나인 것 같다는 얘기였다.

 철렁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뭔가 잘못 안 건 아니냐는 물음에 친구 녀석에게선 더 기막힐 소리가 들려왔다.

 ― 어지간히 단속을 시켰는지 아무리 찔러봐도 다들 도통 말을 안 하더라고. 그러다 딱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흘리더라. 동네 여자들이 그냥 누구 하나가 그러자, 라고 한다고 남의 인생 망치는 일을 겁도 없이 하겠냐고. 그만한 위력을 가진 사람이어야지 않겠냐고. 그래서 내가, 차마 너한테 말은 못 했지만 내심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네 누나 이름을 입 밖으로 슬쩍 꺼냈거든. 그랬더니 아주 사색이 돼선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떠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도 정운은 어쩌면, 친구 녀석이 잘못된 추측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존경하는 누나였으니까. 그리고 제 하나뿐인 조카가 의지하고 믿는 어머니였으므로.

 하지만 친구의 이어진 다음 말은 정운을 더는 부정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그것만으론 확신하긴 그렇지 않냐? 그쪽 입에서 우리 누님이다, 말이 나온 것도 아니고···.’

 ― 그래서 내가 좀 더 조사해 봤지. 네 말대로 딱 이렇다 할 물증은 없었는데, 다른 데서 구린 구석이 하나 잡혔어.

 ‘구린 구석?’

 ― 당시에 미술관 큐레이터로 있었던 이정미의 딸 말이야. 김주미라던가. 걔 뒤를 네 누나가 꽤 봐주고 있더라고.

 ‘뒤를 봐주다니, 그게 무슨.’

 ― 지방대 출신인 김주미를 C계열사에 입사시켜 준 게 네 누나더라. 게다가, 최근에 그 주미라는 애가 같은 부서 유부남이랑 불륜을 저질러서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겼던 모양이더라고. 그런데 그 일을 조용히 무마시켜 주고, 현재 회사로 전근 처리하도록 도와준 것도 바로 네 누나더라니까.

 직접 들으면서도 뭣 하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이었으나, 그렇다고 자격도 됨됨이도 되지 않는 애를, 데리고 있는 직원의 딸이라 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 앉혀줄 사람은 아니었다.

 하다 못해 본인 아들에게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베풀기보단 스스로 제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했던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누님이 왜, 왜 그런 애를···.’

 ― 그러니까. 네 누나가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줬겠어. 딱 각이 나오지 않냐? 누가 일개 직원의 딸을 그렇게까지 챙겨. 뭔가 연결 고리가 있으니까 그렇지.

 뭔가 연결 고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친구의 말에도, 그는 무턱대고 동의할 수가 없었다.

 분명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나 확신할 수 있는 정도의 증거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급히 학교에 조퇴까지 내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니라면, 분명 누나에게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의아한 표정과 반문이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의아해하기는커녕 싸늘하게 바뀌는 표정을 보자마자, 정운의 희미했던 의심은 결국 확신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떻게 누나가···.”

 엄청난 높이의 절망과 실망감이 한순간에 정운을 덮쳤다.

 그토록 따뜻한 사람이. 그토록 도덕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정운이 부정하는 것 없이 저를 마주 보는 얼굴을 직시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 불쌍한 애한테 어떻게!”

 “내가 뭘 했는데?”

 하지만 연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한 채, 오히려 그를 향해 뻔뻔하게 되물었다.

 “남자들 피빨아 먹으면서 살던 여자 딸이야. 내 아들 옆에 기생하면서 발목 잡을 게 뻔한데, 그럼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니?”

 마치 다른 사람을 대면하고 있는 듯, 낯선 반응에 정운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누나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걔가 뭘 잘못했다고! 걔 부모가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어린 애한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한때 스승이었다고 제자 생각 퍽이나 하나 보구나.”

 정운의 분노에 찬 반응에 연수가 날카롭게 코웃음을 치며 화병 쪽으로 돌아섰다.

 그 인정머리 없는 등을 보며, 정운이 아예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어린 가슴들에 대못 박아놓고 좋았수?”

 뻔뻔하게 꽃을 집어 들던 손이 그 순간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멈칫했다.

 “누나가 저지른 패악질 때문에, 도하 그 녀석 시들시들해져 가는 거 보면서 만족스러웠어?”

 정운이 제 누나의 손에 잡힌 꽃을 확 잡아채 바닥에 던져버리곤 날카롭게 외쳤다.

 동생의 경멸 어린 눈을 마주한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희미하게 차오르는 물기에 때늦은 후회가 넘실댔다.

 하지만 연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곤 부러 뻔뻔한 투로 받아쳤다.

 “어, 만족스러웠어!”

 항상 자애롭던 얼굴 만면에 표독스러움을 드리운 채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한테 발목 잡히느니 그편이 백배 천 배 나았어!”

 “누나!”

 “그러니까 쓸데없이 참교육자인 척 굴지 말고 나가봐. 10년도 더 된 지난 일로 괜히 사람 머리 아프게 하지 말···.”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깨질 것 같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내리누르며, 귀찮다는 듯 정운을 밀어낸 찰나였다.

 이 목소린···.

 “···!”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과 함께 열 올라 있던 연수의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가셨다. 정운의 눈 또한 찢어질 듯이 커져 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

 동시에.

 “두 분이 나눈 얘기가 대체 무슨 뜻이냐구요···!”

 우레와 같은 포효가 평화롭던 집안의 공기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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