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98)

 64화.

 “난 진심인데.”

 말을 마친 입매가 언제 웃긴 했냐는 듯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주미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의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산 채로 입이라도 찢어버릴 것 같은 섬뜩한 눈빛이었다.

 문득 입이 정말로 좌우로 길게 잡아 벌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타는 듯한 조갈이 밀려왔다.

 권도하는 고등학생 때도 딱 지금과 같았다.

 세상 무심한 듯 굴면서도 윤다경의 일이라면 눈빛부터 바뀌며 갖은 유난을 떨었던 녀석.

 마치 제 주변에 여자라는 생명체는 윤다경 하나뿐인 것처럼, 다경을 제외한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그 모습에, 아무리 유혹해도 눈길 한 번 안 줬던 도도한 도련님이 하필 빠져도 다방 마담 딸년한테 빠졌다고 모두가 한탄을 금치 못했더랬다.

 그런데 그 지고지순한 순정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니.

 ‘진짜 안다면 다들 탄복할 일이네.’

 하지만 여기서 한마디라도 잘못 더했다간, 저 사람 같지 않은 눈이 정말로 어떻게 뒤집혀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버티지 못한 주미가 긴장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뱉어냈다.

 “마,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냥 어제, 송 과장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회식 자리에서 눈치도 없이 윤다경 엄마가 하는 가게를 가겠다고 하길래, 고교 동창으로서 보호해주려던 것뿐이었다고.”

 조금은 억울하다는 어조로, 주미가 울먹이듯 말했다.

 그러자 그런 제 속을 이해한다는 건지 뭔지, 도하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지그시 주미를 내려다보았다.

 말이 좀 통한 건가?

 “사실이 그렇잖아? 사람들은 다경이 엄마가 식당 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데···.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아직도 다방일 하고 있을지 어떻.”

 “네 눈으로 봤어?”

 한참 간 말이 없는 듯싶던 입술이 느른하게 열렸다.

 네 눈으로 보았느냐고. 다소 당혹스러운 질문에 주미가 순간 멍청하게 말을 더듬었다.

 “머, 뭐?”

 “네 그 썩어빠진 눈깔로···.”

 저벅, 좁혀진 거리감과 함께 선뜩한 살기가 발끝까지 치달아 왔다.

 “걔 엄마가 뭘 하고 먹고 사는지. 식당일을 하는지, 다방 일을 하는지 확인한 거 있냐고.”

 도하가 속이 텅 빈듯한 검은 눈으로 주미를 겨눈 채 나직이 되물었다.

 말이 통한 게 아니라, 잠자코 들어주는 중이었던 거였어···.

 “그, 그게 아니라···.”

 “그래놓고 뭘 잘났다고 지껄여.”

 때늦은 깨달음과 함께 주춤 물러선 등이 차가운 벽에 가로막혔다.

 “그런 주제에 뭘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

 씹어뱉듯 읊조리는 그의 분노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섬찟하다.

 “그, 그게···.”

 “그런 주제에, 동창은 씨발!”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방긋댄 순간, 콱―! 하고 그의 맨주먹이 주미의 얼굴 옆으로 꽂혔다.

 “걔랑 같이 다니는 1년 내내 허구한 날 쓰레기 같은 짓거리만 한 네가 감히.”

 “···.”

 “동창이란 소릴 입에 올려?”

 목젖까지 겨누어진 살의에 주미가 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는 채로 몸만 바들바들 떨었다.

 10년 전,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상대가 다시 살아난 느낌에 온몸의 신경세포가 마비되었다.

 꽉 움켜쥔 빈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누구 하나라도 들어와 저를 이 상황에서 꺼내줬음 좋겠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문밖에선 인기척 한 번이 없었다.

 마찰음과 고성이 이토록 오가는데도 누구 하나 들여다 보질 않다니.

 이러다 나 진짜 얘한테 멱살이라도 틀어 잡히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던 순간.

 도하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건조하게 물었다.

 “너지. 10년 전에 걔네 모녀 그런 식으로 내쫓은 게.”

 주미의 눈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동요가 스쳤다.

 “무, 무슨 소리야?”

 “너잖아. 아니, 너희 엄만가?”

 피식, 웃으며 벽에 뻗고 있던 팔을 거둔 그가 불현듯 10년 전의 일을 상세히 읊었다.

 “너희 엄마 이정미 여사랑 몇이 같이 합세해서, 10년 전에 윤다경 엄마 상대로 소장 접수했다며. 그래놓고 두 모녀가 이 동네 뜨자마자 바로 취소하고.”

 궈, 권도하가 저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주미가 당혹스런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그런 낯짝에 대고 빙긋 웃으며 도하가 대놓고 물었다.

 “너랑 너네 엄마가 판 짜고 맞춘 거 아냐?”

 사람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섭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몸이 떨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젠 혀끝마저 떨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줄줄 불고 싶었으나, 약속한 게 있는 터라 주미는 차마 함부로 떠들 수는 없었다.

 “모, 모르는 일이야, 나, 난.”

 “모르는 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짧게 실소를 뱉은 그가 돌연 다정한 목소리로 주미의 이름을 불렀다.

 “주미야.”

 분명, 세상 나긋한 어조로 불리는 이름이었으나 듣는 이의 뒷골은 얼음 송곳이 스치듯 선뜩했다.

 “네 눈엔 내가 참 신사적인 놈으로 보이지.”

 아니나 다를까, 그 불길한 직감은 빗나가지 않은 채 도하가 웃지만 웃지 않는 얼굴로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자를 상대론 함부로 주먹질도 안 하고, 아무리 꼭지 도는 상황이 와도 이성적인 머리 회전이 되는 놈으로 보이지. 내가?”

 말투만 나긋할 뿐 온몸으로 험악한 기운을 뿜어내며 그가 낮게 몸을 기울였다.

 “오늘 한 번 나랑 끝을 볼래?”

 “머, 뭘···.”

 “10년 전에 윤다경 개새끼라고 불렸던 놈이···.”

 한계치를 넘어선 공포가 이성적인 사고를 흐리고 원초적인 생존본능만을 일깨운다.

 “진짜 개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철컥, 시계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이성이 확 달아나버린 순간이었다.

 “그, 그래! 내가 했다, 왜!”

 질끈 두 눈을 감은 주미의 입에서 견디다 못한 악이 빠져나왔다.

 “나랑 우리 엄마가 했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소리를 빽 지른 주미가 돌연 두 눈을 치켜뜨며 제 앞에 선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쥐뿔도 없는 게 자꾸 나대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 천박한 아줌마한테 홀려서 날이면 날마다 다방 들락대는 울 아빠 보기 싫어서 저질렀다, 왜!”

 악에 받친 듯 소리를 내지른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하가 이미 그럴 걸 예상했다는 듯한 눈으로 여상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나름 이유가 있는 패악질이었으나, 일말의 동정심도 이해도 보이지 않는 싸늘한 눈초리.

 그걸 보자, 주미의 안에서 10년을 가둬 놓은 비밀이 꿈틀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아니, 나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걜 힘들게 한 건 너면서.

 권도하,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사지로 내몰아가는 건데!

 “근데, 그러는 너라고 뭐, 나한테 이럴 자격 있는 줄 알아?”

 참다못한 악이 주미의 목구멍을 긁고 뛰쳐나왔다.

 “뭐?”

 동시에 줄곧 냉혹한 눈길로 주미를 내려다보던 눈매가 슬쩍 일그러졌다.

 단단한 얼굴 위로 스친 그 미묘한 균열을 보자, 주미는 줄곧 위축 되어 있던 마음에 묘한 쾌감이 스쳤다.

 이대로 제가 품고 있는 최악의 진실을 풀어버리고픈 욕구가 머릿속에서 자글자글 끓었다.

 “우리 엄마 혼자서 그런 일 벌였을 것 같니?”

 주미가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건 채 도하를 향해 물었다.

 “나나 우리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 단체로 선동할 만한 힘이나 있었을 것 같아?”

 삼촌에게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 또한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도하의 눈앞으로 던져 놓으며, 주미가 피식- 바람 같은 실소를 내뱉는다.

 그리고 곧, 그는 감히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존재가 비릿하게 틀어 올려진 입술을 뚫고 불시에 흘러나왔다.

 “너, 네 엄마가 너랑 윤다경 만나는 거 알면서도 아무 말 않는 거 이상하단 생각 전혀 안 해봤어?”

 무표정하던 미간 위로 날카로운 선이 잡혔다.

 네 엄마라니.

 혹시 이 미친 게 정신이 나가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건가 생각하던 찰나, 주미의 입에서 날카로운 코웃음이 빠져나왔다.

 “너도 진짜 웃긴다. 제 엄만데 어쩜 그렇게 몰라. 진짜 걔 인생 망친 게 누군데···.”

 실성한 듯 지껄이는 말에 그의 눈 또한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게 진짜 미쳤나.

 “야.”

 결국 참다못해 주미의 턱을 바로 잡아 제게로 고정시키곤 두 눈을 똑바르게 응시했다.

 “너, 지금 자꾸 뭔 소릴 하는 거냐?”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렇지. 어디 그 더러운 입에 윤다경 만으로도 모자라 내 어머니를···.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야.”

 주미가 겁에 질려 있던 직전까지와는 다른 뻔뻔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윤다경 걔 인생 망친 건.”

 그의 눈을 빤히 본 채로 작정하고 되새겨주듯 또렷하게 읊조렸다.

 “내가 아니라 너라고, 권도하.”

 “뭐···?”

 줄곧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도하의 눈동자가,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를 지켜보는 주미의 입가에 짜릿한 쾌감이 번졌다.

 10년째 이어진 순정이 아닌, 10년째 현재 진행 중인 불행이겠지.

 “궁금하거든 네 엄마한테 가서 한 번 직접 물어봐.”

 그러게, 그냥 내버려 뒀으면 더 좋았을 것을.

 무섭게 윽박지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힘이 빠져버린 손을 툭 옆으로 밀어내며, 주미가 저주를 퍼붓듯 싸늘하게 뇌까렸다.

 “여기서 죄 없는 나 붙들고 삽질하지 말고.”

 그와 함께 주미가 차갑게 몸을 돌려 그를 스쳐 지나갔다.

 공허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이 주미가 지나간 자리 아래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응시했다.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그의 머릿속을 깨트릴 것처럼 쥐어짰다.

 윤다경의 인생을 망친 게 나라고. 내 어머니한테 직접 들으라고.

 주미가 팀장실을 나서기 전 쏟아냈던 말들이 불길하게 심장 전체를 죄어온다.

 “저 미친 게 무슨 개소리를···.”

 아닐 거라 부정하듯 읊조리면서도, 불안감이 한계까지 치밀어왔다.

 동시에 며칠 전 들었던 삼촌 정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뒤에서 조장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알아보는 중이야.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조장한 사람.

 그럴 만한 이유와,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내···.

 차마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려온다.

 엇박자로 뛰는 심장의 박동이 창백한 침묵을 싸늘하게 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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