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98)

 62화.

 아침이 밝았다.

 다경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심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오늘도 분명 김주미는 있는 대로 사람 속을 긁어놓을 터였다.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해봤자, 둘의 관계를 모르는 회사 사람들에겐 오히려 의아함만 줄 뿐이다.

 무서운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어제 알아들을 만큼 말했으니, 김주미도 생각이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겠지.

 전장에라도 나서듯, 다경이 비장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내디뎠다.

 “좋은 아침이에요, 윤 대리.”

 막 엘리베이터에서 벗어나 모퉁이를 돌려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설마.

 “권···, 아니. 팀장님.”

 도하였다.

 습관처럼 부르려던 이름을 고쳐 뱉은 다경이 눈앞에 있는 멀끔한 얼굴을 보곤 터질 듯 두 눈을 키웠다. 그러자 그가 빙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청량한 얼굴로 대꾸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못 볼 걸 본 건 아니었지만, 여기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인물을 봐서 놀란 마음은 있었다.

 주말이 지나야 팀으로 복귀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일찍 부산에서 돌아왔다니.

 “···다음주 월요일쯤 오시는 줄 알았는데.”

 다경이 주변 눈을 의식해 어색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일정은 그게 맞는데, 자꾸 눈에 밟히는 게 있어서요. 당최 일이 손에 잡혀야지.”

 그 눈에 밟히는 게 바로 너라는 듯,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검은 눈 덕에 다경은 돌연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의를 갖춘 말 때문일까. 괜스레 더 기분이 이상했다.

 “아, 그러셨구나.”

 무슨 로보캅이 답하듯 딱딱한 말을 뱉어낸 얼굴이 부리나케 그를 등지고 돌아섰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로 불긋하게 열이 올랐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귀여운 반응에 도하가 나직이 웃음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는지, 사람이 바로 등 뒤에 서 있는데도 까맣게 모르더니. 아니나 다를까, 알아채자마자 곧장 줄행랑이다.

 뭐, 저야 덕분에 4일 만에 보는 다경의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어 좋았지만. 한편으론 이 작은 머리에 무슨 근심이 그렇게 그득 차서 바로 등 뒤에 있는 사람도 못 알아채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경의 말처럼, 원래대로라면 주말까지 꼬박 부산에 처박혀 있어야 할 일정을 3일 이상 앞당긴 복귀였다.

 통역사와 발표자가 필요해 대동 된 자리라, 저를 대신할 유능한 통역사로 친구 하나를 호출해 전무에게 붙여주고 발표에 필요한 PPT 또한 완벽하게 준비해 친구 측으로 전달했다.

 그러곤 급한 프로젝트건 검토와 협력사 미팅을 핑계로 복귀를 요청하자, 숙부인 전무도 더는 붙잡질 못하고 그러라 허락해주었다.

 부산에 있는 나흘 중 이틀을 꼬박 날 새어가며 자료를 만들어낸 결과였다.

 남들이 했다면 일주일은 걸렸을 자료를 고작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낸 그였지만, 다경과 관련된 문제는 며칠을 고민해도 해결점은커녕 원인조차 명확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대체 뭐 때문일까. 네가 이토록 근심하는 이유가.

 날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을 반증하듯 붉어지는 얼굴을 보니, 그 근심이 나와의 관계에 대한 변덕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나 외에 네 머릿속을 차지할 만한 문제가 대체 무엇일까.

 뭐가 됐든, 널 아프게 할만한 근심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생각해 봤습니까?”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옆자리로 성큼 따라붙으며 그가 물었다.

 “네?”

 “주말에 먹을 메뉴, 생각해 봤냐고.”

 행여 누가 들을까 싶어 빨개진 얼굴이 부리나케 정면을 향했다.

 “···아직입니다. 보통 주말에 먹을 음식을 미리부터 고민하진 않으니까요.”

 이 대화를 듣는 사람들이 혹시나 주말에 둘이 만날 것을 눈치챌까 봐 뱉는, 나름의 술책인 듯했다.

 요령 없이 꼿꼿한 반응이 대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렇긴 한데.”

 문득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든 그가 총총 앞서 걷는 다경의 등 뒤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럼 먹고 싶은 게···.”

 슬쩍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기울여, 다경만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음식이 아니라 다른 거라고 생각하고, 종일 침대에서 안 놔줄 거니까.”

 귓전을 스치는 더운 숨결 덕에 안 그래도 달아올라 있던 귀가 녹을 듯이 뜨거워졌다.

 종일 침대에서 안 놔줄 거라니.

 ‘저 변태가 정말.’

 다경이 당혹감과 창피함을 숨기지 못하고 올려다보자, 그가 빙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들어가죠, 그럼.”

 특유의 장난기 어린 웃음과 함께 그가 손을 뻗어, 그녀 대신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못 말린다, 정말.

 김주미와는 다른 의미로 시시때때로 저를 해롭게 하는 그를 노려보며, 포기하듯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꿈에도 생각 못 했잖아. 어쩜 그래놓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본부장님 얘기에 장단을···.”

 아침부터 어쩐지 어수선해 보이는 사무실 분위기가 막 안으로 들어선 다경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얼굴이 좋질 않은데, 무슨 일 있나?

 무심코 안으로 들어서던 발이 잠시 멈칫했다.

 중앙 테이블 쪽에 모여 수군대는 직원들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터진 건가. 하필 도하가 복귀하자마자 이런 일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에 서있는 그에게로 힐긋 눈을 돌린 찰나, 어수선한 분위기의 원인을 추정케 하는 말소리가 귓속을 찔렀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김주미씨가 말했던 그 가정 파탄자가 윤 대리 모친이었던 거잖아요. 사기까지 쳐놓고 도망쳤으면서 어쩜 그렇게 멀쩡한 척.”

 출근길 도하의 도발 덕에 상기되어 있던 다경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를 향해 있던 얼굴이 천천히 사무실 중앙에 모인 직원들에게로 향했다. 그와 함께 무심히 정면을 향했던 그의 눈초리도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

 “난 전부터 윤 대리 어딘지 맘에 안 들었어. 무슨 말을 해도 별말 없이 웃기만 하는 게, 영 사람이 가식적이잖아.”

 “구리다 싶긴 했죠. 사적인 얘긴 절대 입도 뻥긋 안 하길래 설마설마 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다방 마담. 아니 꽃뱀 출신 엄마라니···.”

 “지금도 그냥 식당하는 거 아니고 비슷한 일 하는 거 아녜요? 주미씨도 그랬잖아. 국밥집 한다는 거 영 안 믿긴다고.”

 휴식 시간이면, 평소 함께 모여 앉아 티타임을 갖곤 했던 여직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다.

 저들이 이 사실들을 알았다는 것보다도, 저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추정과 그간 저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더 신랄해 다경은 차마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전부터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가식적인 느낌이었다고.

 국밥집을 한다는 것 또한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며칠 전 전근 온 김주미 한 마디를 듣고 내려진 결론들.

 “설마···. 근데 좀 의심스럽긴 하다. 윤 대리도 알고 보면 제 엄마 가게에서 그런 일 하고 있는 거 아···.”

 “어이, 거기!”

 점점 수위를 넘어서던 대화가 차단된 건 그때였다.

 “과장님, 참으세요.”

 “이거 놔!”

 미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송 과장이 중앙에 모여 서 있는 무리에게로 달려들 듯 다가섰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떠들다가 그대로 돌려받는 수가 있어. 당사자한테 확인한 거 있어? 알지도 못하면서 어딜 팩트인 양 지껄여!”

 송 과장이 날카롭게 고함치자, 잠시 위축된 듯하던 여직원 하나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입을 뗐다.

 “아, 아니. 과장님은 왜, 저, 저희한테 그러세요? 어제 김주미 씨가 그랬잖아요. 10년 전에 주미 씨 있던 동네에서 꽃뱀 짓 했던 모녀라고. 저희는 그냥 들은 얘길 한 것뿐인데···.”

 “그러니까 사실 확인했냐고. 꽃뱀인지 아닌지 당사자한테 물어봤냐고, 너희가.”

 “그, 그런 말을 어떻게 대놓고 물어봐요?”

 “묻지 못할 거면 떠들지도 말아야지, 이것들아! 까놓고 말해서 다방 일 한 게 뭐 어때서. 먹고살려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윤 대리가 회사에서도 너네들한테 그런 소리 들을 만한 행동한 적 있니?”

 “좀 진정하세요, 과장님.”

 점점 더 높아지는 언성에 안 되겠다 싶어진 미애가 다급히 송 과장을 붙잡았다.

 “누, 누가 그런 소리 들을 만한 행동을 대놓고 하나요?”

 하지만 반성하는 기미 없이 잘난 듯 나선 다른 여직원 덕에, 만류하려던 미애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뭐가 어째?”

 “그, 그렇잖아요. 원래 구린 애들이 겉으론 무결한 척해놓곤 안으론 온갖 알랑방귀 뀌는···.”

 “오호라, 네가 평상시에도 성실하고 예쁜 애 질투하는가 싶더니 이런 데서 자격지심을 드러내는 구나?”

 “과장니임···.”

 송 과장이 아예 옷 소매마저 걷어 올리며 뒤엎을 듯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어, 어머. 억울할 소리를 하시네에? 제가 언제 윤 대리를 질투했다고 그러세요?”

 “아니면! 어디서 굴러온 돌이 하는 말 그대로 믿고 4년을 알고 지낸 동료를 험담해, 험담하길!! 네들 명예훼손에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 한 번 당해 볼래?”

 “허! 고소라뇨? 본인 일도 아닌데 과장님 진짜 막 나가시는 거 아녜요?”

 “주은영, 너어!”

 “어디 한 번 고소해 보세요! 이런 걸로도 과연 고소가 되는지···!”

 “지금 회사에서 뭣들 하는 겁니까!”

 대기를 찢어발길 듯한 고함이 날카롭게 사무실을 갈랐다. 눈이 뒤집혀 금방이라도 서로를 쥐어뜯을 듯하던 송 과장과 은영이 얼음장처럼 굳어 문 쪽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가 분노에 찬 짐승 같은 눈으로, 제 옆에서 파르르 떠는 다경의 앞을 성큼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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