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98)

 61화.

 “여보세요.”

 ― 왜 계속 통화가 안 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선 걱정 어린 음성부터 들려왔다.

 제가 연락이 없는 동안 전전긍긍했을 그를 생각하자 마음이 쓰였으나, 입 밖으론 맘에도 없는 퉁명스런 말이 튀어나갔다.

 “사무실이 바빴어. 무슨 일이야?”

 ― 아무튼 까칠하긴.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해야 되냐?

 도하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어조로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일 없이 전화할 사인 아니지.”

 ― 무슨 일 있는 거 맞나 본데. 또 괜히 안 예쁜 소리 하는 거 보니까.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이라 생각했는데, 예리한 그에겐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만으로도 제 감정을 캐치하는 도하인데, 이러다간 지금 제 불안한 마음을 그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할 말 없음 그냥 끊을게.”

 ― 있어, 할 말.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하자, 그가 다시금 그녀를 붙잡았다.

 “뭔데, 할 말이.”

 다경이 짙은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전화기를 다시 귀에 붙였다.

 ― 며칠 전에 한 약속 기억하지? 서울로 복귀하면 같이 밥 먹기로 했던 거.

 초점 없이 허공을 담던 눈이 잠시 흔들렸다.

 혼란스러운 삶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래. 그런 약속을 했었다.

 김주미라는 변수가 덜컥 둘의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고.

 ― 뭐 먹을지 메뉴 미리 생각해 놔. 사 먹어도 좋고, 네가 원하면 직접 만들어줄 수도 있어.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붙잡고 있자, 도하에게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난번에 봐서 알 거 아냐. 나 생각보다 요리 솜씨 괜찮은 거.

 그의 너스레에도 다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1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상황 따윈 모른 채 내게 보이는 네 진심이 못내 안타깝다.

 하지만 절대 너에겐 말할 수 없었다.

 10년 전 널 아프게 했던 내가 이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몰라도 될 아픔과 죄책감으로부터 널 지켜주는 것뿐이었으니까.

 “고민해 볼게. 그럼 그만 끊는다.”

 ― 잠깐. 나 또 할 말 있는데.

 마지못해 대꾸한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가 다시 한번 다경을 붙잡았다.

 “뭔데, 자꾸. 나 이제 회사에서 나가야···.”

 ― 보고 싶다.

 귀찮다는 듯 읊조리던 말이 뚝 그쳤다.

 ― 많이 보고 싶어, 윤다경.

 수화기 너머에서 거푸 되뇌어지는 그의 음성이 심장을 찌를 듯이 파고들었다. 전화기를 쥔 손끝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나도.

 나도 그래, 도하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왔지만, 다경은 한참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끊을게.” 하는 무뚝뚝하고 건조한 한 마디를 끝으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하···.”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이마에 가져다 댄 다경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를 쥐어짜는 걱정들 때문에 눈앞마저 아득했다.

 결론은 하나인데.

 끝을 알면서도 접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다경은 못내 아프고 서러웠다.

 * * *

 ― 끊을게.

 한숨 같은 한 마디를 끝으로 통화가 종료 된 화면이 그의 손안에서 위태롭게 깜박였다.

 액정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부러 장난스럽게 끌어 올렸던 입술도 차게 굳었다.

 다경은 내색하지 않았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윤다경 주변에, 그녀를 심란하게 하는 뭔가가 생겼다는 사실을.

 ‘뭔가 있다, 분명히.’

 심장 끝을 불길하게 짓누르는 불안감과 함께 휴대폰을 거머쥔 손아귀에 바짝 힘이 실렸다.

 그 뭔가라는 것은 그저 심중에 인 변화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기치 못했던 외부적인 요인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둘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이대로 시간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건 능사가 아니다.

 시간이 제가 원하는 지점에 닿지 못한다면, 제가 시간을 당기는 수밖엔 없었다.

 불길함을 인지해놓고도 혹시나 하는 안일함으로 기회를 놓쳐버렸던 그때처럼, 또다시 10년 전의 그 후회를 반복할 순 없으니까.

 도하는 화면 꺼진 휴대폰을 다시 켜곤 이내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김주미 씨의 마케팅2팀 입성을 축하하며, 다 같이 건배!”

 짝짝짝- 환호와 박수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감사합니다.”

 주미가 싱긋 웃으며 제 앞에 채워진 잔을 한 번에 비워냈다.

 “오, 주미씨 술 좀 하는데?”

 “에이, 아녜요. 부장님.”

 바로 채워지는 술 잔을 흔쾌히 받으며, 주미가 교태 어린 목소리로 내숭을 떨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술 잔 꺾는 스냅이 보통이 아닌데.”

 “그런가요? 호호호.”

 주미는 부서 사람들과 한 잔 두 잔 술잔을 건네 받으며, 눈으로는 흘깃 회식 자리를 둘러보았다.

 어딜 갔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지?

 어쩐 일인지 윤다경이 아까부터 보이질 않았다. 좀 늦는 건가 싶었더니 감감무소식인 게 아무래도 안 올 모양인가 보다.

 ‘겉으론 쎈 척 하더니, 무서워서 꽁무니 뺐나 보네.’

 주미가 피식 웃으며 손안에 든 소주잔을 입술에 기울였다.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이 재수없는 계집애였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성질머리만 오지게 더러워선, 한 마디를 안 지고 끝까지 맞서던 잡초 같은 계집애.

 오늘 일만 해도 마찬가지다.

 쫄리는 게 있음 그냥 입 닥치고 있을 것이지, 그 주제 모르고 고고한 계집애는 되려 저를 벽으로 몰아세우며 발칙한 경고를 해댔다.

 ‘그러니까 입단속 잘하라고.’

 ‘네가 내 뒤통수 치는 날, 나도 네 뒤통수 똑같이 날려줄 테니까.’

 “미친···.”

 생각하니 또 열이 확 솟구쳤다.

 그 타이밍에 쫄긴 왜 쫄아서!

 윤다경의 손이 뻗어온 찰나 움찔 물러섰던 제 몸뚱어리를 떠올리자 주미는 때늦은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두고보자. 이번에야말로 피를 말려줄 거야, 내가.

 으득 이를 간 주미가 오랜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든 찰나였다.

 “그러고보니 윤 대리가 안 보이네?”

 신경을 거슬리는 이름 석 자가 귓불을 잡아챘다.

 “아, 제가 깜박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윤 대린 오늘 어머니 일손 도와드려야 해서 참석이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윤다경 옆에 딱 붙어다니는 송 과장이라는 여자가 당사자를 대신해 부장에게 말했다.

 어머니의 일손이라고?

 잠자코 듣고 있던 주미의 눈썹 끝이 삐죽 솟았다.

 “그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일손까지 도와드려?”

 “작은 식당을 하신다나 봐요. 보니까, 퇴근하면 주로 집에 가서 어머니 가게 일 도와드리는 것 같더라구요.”

 식당? 웃기시네.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이 지역 저 지역 전전하며 다방에서 남자나 후리고 다녔던 여자가 소박하게 식당 따윌 한다고?

 윤다경 이게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쳐?

 “참, 얼굴만 이쁜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곱네. 우리 윤 대린.”

 얼씨구, 퍽이나.

 “그러니까요. 회사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집에 가선 또 식당 일까지 도와드리고.”

 “효녀야, 효녀. 나도 그런 이쁘고 마음씨 고운 딸 하나 있음 참 좋겠다.”

 줄줄이 이어지는 소리가 하나같이 우습고 기가 찼다.

 그 성질 드러운 게 대체 얼마나 가식을 떨어댔으면 다들 이 난리일까. 주미는 어처구니가 없어 남몰래 혀를 찼다.

 한심하긴. 그 여우같은 계집애한테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안그래도 윤 대리한테 슬쩍 얘긴 했는데요, 부장님.”

 송 과장의 오지랖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조만간 윤 대리 어머니 식당 가서 매상 좀 올려드림 어때요?”

 “아, 거 좋지! 무슨 식당 하신다던가?”

 “글쎄요, 듣기론 작은 국밥집 하신다는 것 같던데.”

 “오, 그래? 그럼 언제 한번 가서 밥 한끼들···.”

 “풉.”

 미처 붙잡지 못한 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터져 버렸다. 부장의 말까지 가르며 제법 크게 터진 웃음소리에 주변 시선들이 일제히 주미에게로 모여들었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주미 씨?”

 송 과장이 미간을 모은 채 조금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갑자기 웃긴 일이 생각 나서···.”

 말끝을 흐리면서도 도통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던 주미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근데··· 다방에서도 국밥을 파나?”

 “다방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그게?”

 옆에 있던 다른 여직원이 듣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걸려들었구나. 회심의 미소를 지은 주미가 이내 표정을 싹 감추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 제가 알기론 윤 대리 어머니가 국밥집이 아니라 다방을 하셨거든요. 10년 전에도 유명했는데. 화다방이라고.”

 “···.”

 “뭐, 이젠 거기서 국밥도 파나보죠.”

 주미가 심드렁하게 덧붙이며 앞에 놓인 안주로 손을 뻗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듯 싸해졌다.

 선뜻 말을 얹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색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개중 적극적으로 말했던 송 과장은 얼굴까지 붉히며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흘러가는데?

 십년 묵은 체증이 가신듯 만족에 찬 미소가 비릿하게 입술 끝을 당긴다.

 주미가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대며 오늘따라 다디단 술을 홀짝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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