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98)

 60화.

 “씨발, 예나 지금이나 고고한 척은 쩔어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친 주미가 상스럽게 지껄였다. 그런 주미를 보며 다경 역시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참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지. 더러운 주둥이 함부로 놀려대는 건.”

 “이게 씨···.”

 무슨 큰 약점이라도 잡은 양 고압적으로 굴던 낯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정말이지 김주미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온갖 센 척은 다 하면서도 막상 상대가 기죽는 법 없이 맞서면 목소리만 커질 뿐 맥없이 사그라들곤 했다.

 아무리 드센 척 해 봐야, 다경의 눈엔 다 보였다.

 김주미는 다른 누군가를 등에 업지 않은 채론 제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는 걸.

 “경고하는데.”

 다경이 주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나직이 읊조렸다.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니지 마. 회사에서까지 우스워지기 싫으면.”

 싸늘한 경고에 움찔 물러선 주미가 이내 기가 차다는 듯 실소했다.

 “아··· 뭐, 본인 나와바리다 이거야?”

 “잘 아네. 근데 그것도 알지?”

 다경이 같잖다는 듯이 웃으며 주미에게로 손을 뻗었다.

 “무, 무슨!”

 “그때나 지금이나.”

 머리채라도 잡으려는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뒤로 빠진 주미의 어깨를 툭, 털어주며 다경이 싱긋 입꼬리를 당겼다.

 “넌 내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

 “뭐?”

 존심 상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여럿이라면 모를까 일대일로 붙어선 승산이 없다는 걸, 주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착각하지마.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준 거야.”

 다경이 값비싼 실크 블라우스에 휩싸인 어깨를 꽉 그러쥔 채 주미의 귓전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10년 전 그때도 지금도, 너한테 쫄릴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입 단속 잘 하라고. 네가 내 뒤통수 치는 날···.”

 “···.”

 “나도 네 뒤통수 똑같이 날려줄 테니까.”

 희미한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그마저도 싸늘히 굳어버렸다.

 협박거리는 비단 김주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사회는 다방 마담 딸이었던 제게만 혹독한 게 아니라, 일진이니 왕따 주동자니 하는 쓰레기들에게도 똑같이 가차 없었으니까.

 “너 이씨···.”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을 리 없는 주미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입술을 들썩였다.

 “그리고 말 좀 곱게 해.”

 다경이 주미의 블라우스 자락을 슬쩍 건드리며 걱정하듯 말했다.

 “옷이며 가방만 명품으로 휘두르면 뭐하니? 주둥이가 싸구련데.”

 “머, 뭐?”

 “그러다 다 들켜버리면 너무 싱겁잖아, 주미야. 나도 당한 게 있는데, 한 번은 직접 돌려줘야지. 물론, 네가 주제 파악하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한번은 선처해주겠지만.”

 그러니, 이게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듯. 바들바들 떠는 어깨를 툭툭 다독이곤 서늘하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주미를 지나쳐 비상계단의 문고리를 잡는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과연 이 어설픈 협박이 김주미에게 먹힐지 알 수 없었으나, 언제까지 잠자코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위축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주미는 저를 헐뜯지 못해 안달을 낼 게 뻔했으니까.

 제발 이걸로 저 꼴도 보기 싫은 얼굴과 마주한 채 이야기 나누는 건 마지막이길 바라며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던 그때였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갔던 주제에 말은 잘해요.”

 비릿한 실소가 다경의 걸음을 잡아챘다.

 “설마하니 너, 권 도하랑 다시 만나는 건 아니지?

 동요를 감추지 못한 발이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주미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하. 첫사랑이니 뭐니 떠들어댈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너네 둘도 참···.”

 얄밉게 키들거리는 소리가 차가워진 귓바퀴를 긁었다.

 “걔네 엄마가 아니? 너 이 회사에 다니는 거.”

 걔네 엄마라고.

 불시에 언급 된 존재와 함께 다경은 순간 온몸이 차게 굳어내렸다.

 김주미가 제아무리 저를 물고 뜯어도 가소로운 상대인 것과는 달리, 방금 언급된 그 사람은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선뜩해지게 만들었다.

 “하긴, 알았음 본인 아들 오기 전에 일찌감치 쫓아냈겠지. 두 눈 뜨고 둘이 재회하는 꼴을 두고 봤을 리가.”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문고리를 쥔 손만 잘게 떨고 있자, 주미가 밉살맞게 비아냥댔다.

 설마 저게···.

 “너···.”

 “궁금하다.”

 잊고 있던 공포감이 스멀스멀 발 끝을 타고 기어올라왔다.

 “걔 엄마가 이번엔 어떤 수로 널 이 회사에서 내쫓을지.”

 줄곧 외면했던 현실을 눈앞까지 끄집어다 놓는 말에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붉게 충혈된 갈색 눈이 찢어발길 것처럼 눈앞의 주미를 응시했다.

 “두고 보자고. 누가 먼저 이 회사에서 나가 떨어질지.”

 피식, 싸늘한 비웃음이 계단 안을 크게 휘돌았다.

 쾅― 하고 닫힌 비상구의 문 소리가 잠시 안온했던 세상 전체를 뒤흔들 듯 울려퍼졌다.

 * * *

 도하가 알 것만 두려워했지, 다시 그의 어머니를 재회할 상황은 미처 가정해 보질 못했다.

 ‘궁금하다. 걔 엄마가 이번엔 어떤 수로 널 이 회사에서 내쫓을지.’

 비상계단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김주미의 음성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좀처럼 갉아먹었다.

 대체 왜 그렇게나 우매했던 걸까.

 나 혼자 숨기려고 바동거린다 해서 숨겨지는 게 아닌데.

 도하가 10년 전 그 일을 몰랐으면 한다는 이유로 화대니 뭐니 하며 그 마음에 잔뜩 상처까지 내놓곤, 도하와의 행복한 한때에 눈이 멀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하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걸.

 그렇게 되면 제게 또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는 것은 물론이며, 이 상황을 도하가 모두 알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왜 이렇게 바보 같니, 정말.’

 다경은 아까부터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꾹 쥐며 잠시 눈을 감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막막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김주미가 권도하 어머니에게 내가 같은 회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건 아니겠지.

 그 소식을 들은 도하의 어머니가 회사로 찾아온다면?

 그래놓곤 10년전 그때처럼 내게 떠날 것을 종용한다면···.

 아냐. 아닐 거다. 설마 그렇게까진···.

 ‘두고 보자고. 누가 먼저 이 회사에서 나가 떨어질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엔 심히 불길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불안함을 삼키고 있던 그때.

 퇴근 시간을 알리는 사내 알람 음과 함께 오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나갑시다. 다들 장소 어딘 줄 알죠?”

 나가자니?

 단체로 어딘가를 가는 듯한 그의 말에, 다경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옆자리에 앉은 송 과장의 팔을 붙잡았다.

 “저, 과장님. 오늘 퇴근하고 우리 어디 가기로 했어요?”

 “아, 자기 톡방 확인 안 했구나. 오늘 주민지 수세민지 하는 자기 동창 환영회 하기로 했잖아.”

 “아···.”

 종일 정신이 없어서 휴대폰은 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단톡방에 따로 공지가 떴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환영회 소식을 접한 다경이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송 과장이 고개를 까닥하며 채근했다.

 “뵈기 싫어도 일어나자. 가서 고기나 좀 먹고 오게.”

 사실 환영식에는 어지간해선 빠지지 않는 것이 과내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터라, 다경은 아무래도 참석하기가 망설여졌다.

 업무 중 잠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그토록 사람 속을 긁어놓은 입이다. 그런 입이 회식 자리에선 또 얼마나 대놓고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 겪지 않아도 이미 눈에 선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과장님, 죄송한데, 전 오늘은 좀 빠져야 할 것 같아요.”

 다경이 조심스럽게 송 과장에게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요즘 엄마 식당 일이 바쁘셔서요. 들어가서 일손 좀 도와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음. 그래도 잠깐 들러서 밥이라도 먹고 가지.”

 송 과장이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녜요. 앉아 있음 도중에 일어나기도 눈치 보이고···. 그냥 오늘은 조용히 빠질 테니까 과장님께서 저 대신 말씀 좀 해주세요.”

 “알았어, 그럼.”

 다경의 간곡한 부탁에 송 과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건 그렇고, 진짜 조만간 미애랑 얘기해서 어머니 식당에 가는 거다.”

 “네, 상황 봐서요.”

 며칠 전에 이은 식당 방문 얘기에 다경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남들보다 바쁜 일상이 오늘 같은 때는 적당한 핑계가 되어주는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책상 위를 정리하려던 찰나, 키보드 옆에서 진동음이 느껴졌다.

 “자기야, 전화 들어온다.”

 송 과장의 눈짓을 따라 옮겨간 시선에 잘게 떨고 있는 휴대폰이 보였다.

 “아.”

 뒤늦게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다경이 숨기듯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저 그럼 통화 마치고 슬쩍 퇴근할게요, 과장님.”

 “그래, 우리 먼저 갈게. 내일 보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을 살피곤, 손안에서 질기게 울리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확인했다.

 어젯밤부터 벌써 십여 통 가까이 찍혀 있는 이름과 같은 발신인. 도하였다.

 그냥 받지 말고 넘겨버릴까, 갈등하던 순간 잠시 끊어졌다 싶었던 전화가 다시 한번 울렸다.

 결국, 계속 피하기만 해선 답이 아니라는 결론과 함께 다경이 포기하듯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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