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12월 31일.
수능이 끝나고 하고 싶은 일 중 마지막 체크리스트를 달성하는 날이었다.
둘은 도하의 제안에 따라 각자 하고 싶은 항목을 5개씩 적어 리스트에 올렸다.
영화 보기, 맛있는 거 먹기, 놀이공원 가기, 만화방 가기 등 단조롭고 소소한 다경의 리스트와는 달리 도하가 적은 항목들은 꽤 구체적이었다.
주변 맛집 리스트 뽑아서 그중 윤다경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점 찾기.
보고 싶은 영화 골라 DVD방에 종일 처박혀 있기.
놀이공원 손 잡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기.
크리스마스에 눈 오는지 내기하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뽀뽀해주기.
12월 31일, 같이 스무 살 기념 해돋이 보러 가기.
한 번으로 한정하지 않은 밥 먹기와, 하필 영화를 볼 장소로 DVD방을 고른 것, 크리스마스 내기의 벌칙이 뽀뽀라는 것 등 대체로 권도하 본인의 음흉한 사심을 채우는 항목들이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간 놀이공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것이었기에 다경에게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뭐야, 나이가 몇 갠데 여태 놀이공원 한 번을 안 갔어?’
‘가고 싶다고 나 혼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엄마도 많이 바쁘시고.’
‘뭐···, 그래. 잘됐네. 그럼 크리스마스이브에 같이 놀이공원 가자. 종일권 끊어서 야간 퍼레이드까지 보고 오게.’
‘야간 퍼레이드?’
‘응. 놀이공원 처음 가보는 우리 다경어린이, 불구경 좀 시켜줘야지. 밤에 쉬 안 싸게 조심해라.’
‘아, 뭐야아! 자꾸 놀릴래?’
스무 살을 코앞에 두고 처음으로 가본 놀이공원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처음 와봤을 그곳을 다경은 도하의 손을 잡고 처음 거닐었다.
그래서인지. 다경은 둘이 함께 간 놀이공원에서 그야말로 아이처럼 들떴다.
‘윤다경 너 속 괜찮아? 난 너무 탔더니 이제 슬슬 울렁거리는데.’
‘온 김에 싹 다 타봐야지. 많이 힘들면 좀 쉬게 귀신의 집이나 갈까?’
‘뭐어? 귀신의 집?’
‘저긴 그냥 걷기만 하면 되잖아.’
‘야, 난 영화도 공포영화는 취급 안 해.’
‘에게에- 설마 지금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지?’
‘왜 아니야? 당연히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그냥···.’
‘어, 입장한다! 가자!’
‘야! 윤다경! 싫다고오, 귀신!’
놀이공원의 개장시간인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강행군이었으나, 도하는 싫다면서도 다경이 원하면 어디든 못 이긴 척 다 따라와 주었다.
놀이공원이 처음인 다경은 그 처음인 모든 것들이 그저 재밌고 신기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옆에 있는 도하는 보기 드문 해맑은 윤다경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다 해가 지고 시작된 야간 퍼레이드 중.
‘뭐야, 눈 오네.’
화려한 불빛이 수놓인 놀이공원의 밤하늘에 새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어! 진짜!’
몇 년 만에 맞이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신기해 눈송이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다경의 입술로 촉-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떨어졌다.
‘졌다, 내가.’
올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도하가 치른 벌칙이었다.
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도하의 미소가, 다경은 놀이공원의 화려한 밤을 수놓은 불빛보다도 눈부셨다.
그래서였을까.
‘겨우 그걸로 돼?’
순간 답지않은 충동이 치밀어 도하의 회색 머플러 끝을 홱 당겨 쥐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둘의 시간이 멈추었다.
퍼레이드를 구경 중인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지만, 그 많은 이들 중 둘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키스, 첫사랑, 첫경험.
도하와 함께 하는 처음인 것들이 다경은 그저 좋았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길.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해서,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면 잠들기 전까지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꿈이 아니게 해달라고.
만에 하나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욕심을 품고, 걷잡을 수 없이 그 마음을 키워갔다.
그리고 오늘은, 둘에게 남은 마지막 리스트인 스무 살 기념 해돋이를 보러 가는 날이다.
“버스 시간이 몇 시랬더라.”
다경은 촉촉한 체리향 립밤을 입술에 슥 바른 뒤 도하와 주고받았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5시까지 내가 너네 집 앞으로 갈게.]
[안 돼! 엄마가 너 보면 큰일 나. 그냥 버스터미널에서 봐.]
[-_-; 알았어. 그럼 6시 20분에 출발하니까 5시 반까진 오는 거다.]
5시 반까지라. 도하가 당부한 시각까지 아직 2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집에서 터미널까진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니까 5시쯤 움직이면 되는데, 마음이 들떠서인지 너무 일찍부터 준비를 마치고 말았다.
“오늘따라 시간 참 안 가네.”
다경은 이것저것 간소하게 챙겨 넣은 가방을 툭 바닥에 내려놓으며 잠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냥 집 근처에 놀러 나가는 게 아니고, 차로 몇 시간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정동진까지 함께 가 하룻밤을 넘기고 오는 거라 그런가.
아직 집 밖으로 나서기도 전인데 오늘따라 심장이 둥둥 뛰고, 자꾸만 답지 않게 긴장이 되었다.
해만 보고 오는 거겠지?
도착하면 밤 9시쯤 될 텐데, 그때부터 해 뜰 때까지 어디서 뭘 해야 할까?
걱정하지 말고 오라던데 도하가 알아서 준비했으려나?
혹시라도··· 단둘이 어디 들어가자고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걱정의 끝에서 퐁, 하고 몇몇 장면이 튀어 올랐다.
동시에 다경은 익을 듯이 빨개진 얼굴을 아래로 푹 숙여버리고 말았다.
“못살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윤다경.”
정동진에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부터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망상이었다.
물론 권도하가 DVD방이며, 만화방에서 보인 모습들이 있기에 아주 근거가 없는 의심도 아니었으나, 저 스스로 그 일을 미리부터 떠올리고 있다는 것에 다경은 왠지 모를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정말로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면 어쩌지?
권도하라면 ‘우리도 이제 어엿한 스무 살인데 어때~’ 하며 은근슬쩍 선을 넘으려 들 수도 있고.
너무 완강히 거부하면 도하가 상처 입을까?
아냐, 얼마 전에도 내가 싫다니까 바로 손 떼고 기다려줬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야 할까?
괜히 설레발 쳤다가 그거 때문에 오히려 도하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면···.
― 우당탕!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부산스럽게 머리를 돌리고 있을 때, 갑자기 가게 쪽에서 들려온 파열음이 상념을 끊어냈다.
“···뭐지?”
뭔가 연달아 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정동진에 갈 생각에 빠져 있다가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때였다.
“이 여편네들이! 단체로 미쳤어? 이게 무슨 짓들이야!”
홀 안쪽에서 엄마의 숨넘어갈 듯한 비명이 들리더니, 이어서 여러 아줌마들의 고함도 잇따랐다.
‘무슨 소리야, 이게.’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다경이 쥐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고 서둘러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 남자들 후리고 다니는 잘난 낯짝이 어떤지 궁금했는데, 별 볼 일 없잖아?”
빠르게 주방 쪽을 통과하는 다경의 귀에 중년 여성의 것으로 파악되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종 빚쟁이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울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것처럼 아줌마들이 떼로 몰려와 경을 치는 일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또 무슨 사고를 친 걸까.
아니, 행여 사고를 쳤대도 대체 무슨 일이길래 다방까지 찾아와서 이 난리를···.
“동네 남자들 꼬셔서 얼마 뜯어갔어, 이 꽃뱀 년아.”
안집과 홀을 구분하려 세워 놓은 파티션 너머로, 다방 안을 풍비박산 내며 악다구니를 쓰는 대여섯 명의 아줌마들이 보였다.
꽃뱀이라니.
“듣자 하니 고등학교 졸업 앞둔 딸년도 주제 모르고 이사장 아들 꿰차서 활개 치고 다닌다던데, 이참에 딸도 같이 꽃뱀으로 뛰게 하려고?”
“누구더러 꽃뱀이야, 이 여편네야! 우리 딸이 왜!!!”
다경을 언급하는 말에 참지 못하고 따져 묻던 엄마의 뺨이 쫙···! 소리를 내며 옆으로 돌아갔다.
“꽃뱀 주제에 어디 잘났다고 눈을 부라려, 부라리길!”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을 보곤, 다경이 하마터면 비명이 샐 뻔한 입술을 급히 틀어막았다.
“시치미 그만 떼고 바른대로 말해, 이 사기꾼 년아!”
순식간에 뿌연 막이 드리운 시야가 위태로울 만큼 흔들렸다.
“얼마 뜯어갔어. 순진한 내 남편 꼬셔서 얼마나 뜯어 갔어어!”
뺨만으로도 모자라 아예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아줌마들을 보며,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다리가 지진이라도 난 듯 휘청였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돈 내놔, 이년아! 우리 남편한테서 뜯어간 돈 당장 토해내애!”
“어디 근본도 모르는 년이 다방 차고 기어들어 와서 동네 물을 흐려! 너 같은 년은 이참에 아주 콩밥을 먹여줘야 돼!”
날 선 욕과 함께 또 한 번 엄마의 뺨을 향해 손이 날아든 순간.
“뭣들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