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98)

 55화.

 “네가 아주 권도하 등에 업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별 미친 짓을 해도 멀쩡할 것 같지?”

 행여 또 한 대 맞을까 봐 뜯어말리는 시녀들의 팔에 붙잡힌 채, 주미가 분노로 들뜬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래, 뵈는 게 없다. 왜?”

 다경이 제 발아래 떨어진 체육복을 밟아 뭉개며 주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뭐?”

 “그러니까 너도 작작 해. 그 고고하신 낯짝에 똥물 뒤집어쓰기 싫으면.”

 한 번만 더 이딴 돼먹지 못한 개수작을 했다가는 이보다 더한 수모를 겪게 해주겠다고. 다경이 섬뜩한 어조로 읊조린 뒤 주미의 어깨를 밀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두고 봐! 네년 그 겁 없는 눈꾸녕에서 피눈물 나게 해줄 거야, 내가!!”

 분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뒤통수를 따갑게 할 만큼 울려 퍼졌다.

 때마침 화장실로 들어서던 여자애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힐끗거렸으나 다경은 개의치 않았다.

 “언제까지 권도하랑 처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오!!! 아아아악!”

 “주미야, 진정해애!”

 미쳐 발광하는 악에 받친 소리와 그런 주미를 말리는 음성이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언제까지 권도하랑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저야말로 궁금한 사안이었으나, 김주미가 주제넘게 지켜보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었다.

 “또라이 같은 게.”

 눈 하나 깜짝 않고 막 화장실을 나선 찰나, 그런 다경의 앞으로 커다란 인영이 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너.”

 도하였다. 얼마나 급히 뛰어온 건지 거칠게 숨을 내몰아 쉰 도하가 초조한 눈으로 다경의 안색을 살폈다.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그새 이 일이 도하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별일 아냐. 막 정리하고 나와···.”

 “별일이 아니긴 뭐가 아냐! 김주미랑 또 한판 붙었다며. 씹, 아까 사물함 안 보여준 거랑 관련 있는 거지?”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도하가 다경을 스쳐 여자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이럴까 봐 안 보여줬던 건데.

 “어디 가!”

 “가만 안 둬, 그 기집애.”

 다급히 붙잡는 손마저 뿌리치곤 화장실로 향하는 걸음이 거침없었다.

 이러다 진짜 또 무슨 일이라도 치겠어!

 마음이 급해진 다경이 와락, 끌어안다시피 도하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제발.”

 얼어붙은 듯 멈춰선 등 뒤에서 다경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제발, 그냥 가자. 도하야.”

 더는 도하가 저로 인해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다.

 제가 쓸 구정물을 대신 뒤집어써주길 바라지 않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받을 필요 없는 피해라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널 향한 내 이 마음이 떳떳해질 수 있을 테니까.

 “···씨발, 진짜. 약아빠져가지곤.”

 거칠게 읊조린 도하가 덥석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느 틈에 교실 밖을 힐끔대는 시선들이 둘에게로 집중되어 있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나와.”

 도하가 빨개진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며 다짜고짜 다경을 끌었다. 끌리면 끌리는 대로 따라나서는 다경의 눈이 단단한 등을 담은 채 어지럽게 흔들렸다.

 * * *

 가을을 지나 어느덧 겨울에 가까워진 바람이 날카롭게 뺨을 할퀴었다.

 “한 성깔 해서 좋아했다니까, 아주 툭하면 싸움질이지.”

 매점에서 사 온 바나나 우유를 톡, 치마 위에 던져준 도하가 다경의 옆자리로 털썩 몸을 놓는다.

 “너 한 번만 더 나한테 숨기면, 그땐 진짜 가만 안 있어.”

 “가만 안 있으면 어쩔 건데?”

 한결 풀린 듯한 도하의 모습에 긴장감이 사라진 다경이 장난스레 물었다.

 “어쩌긴. 확 그냥.”

 도하가 음산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가 이내 한결 목소리를 누그러트리며 덧붙인다.

 “아무 데도 못 가게 집구석에 가둬버릴 거야, 너.”

 “어이구, 무서워.”

 다경이 바나나 우유의 은박지에 빨대를 톡, 꽂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봐라, 또. 수능 코앞이라 봐주는 줄은 모르고.”

 도하가 기가 찬다는 듯 정색했다.

 대꾸 없이 운동장을 바라보며 빨대를 쪽 빨아들이자, 어느새 이온 음료 한 캔을 비우곤 다경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냥 그 정도로 끝냈어?”

 “응. 어차피 사물함에 교과서밖에 없었고, 학기 다 끝나서 체육복 입을 일도 더는 없으니까.”

 “괜찮아, 너?”

 “뭐가?”

 “그런 말 들은 거 괜찮냐고.”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기고 있었는데,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가 의외로 심각했다.

 “뭐, 걸레 소리 들은 게 하루 이틀 일인가.”

 다경이 피식, 웃으며 긴 호흡으로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아 삼켰다.

 “야, 그래도 그게···.”

 “사실 전 같음 안 괜찮았을 텐데 이젠 괜찮아.”

 뭐라고 말을 얹으려던 도하가 이어진 다경의 말에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네가 있잖아.”

 “···.”

 “누가 뭐라든, 넌 나 그렇게 안 보잖아. 그거면 됐어, 난.”

 정말 그거면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유 없는 그 비난과 괴롭힘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늘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그 난리를 친 것이지만, 도하가 있어서 괜찮았다.

 제 엄마가 무슨 일을 하건, 남들이 무슨 소릴 하건,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권도하가 있어서.

 “···뭐야, 안 어울리게 간지러운 소리도 할 줄 아네.”

 잠시 말이 없던 도하가 괜스레 머쓱한 얼굴로 받아치며 비워버린 캔을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뱉어놓고 보니 쑥스러워, 다경이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새 날씨가 많이 쌀쌀해진 게, 수능을 볼 때가 되긴 됐나 보다.”

 수능이 가까워지면 날씨가 꼭 급격하게 쌀쌀해지곤 했다.

 제법 살갗을 긁는 것처럼 싸늘한 바람에 다경이 작게 어깨를 웅크렸다.

 “우리 수능 보면 뭐 할까?”

 어느 틈에 교복 재킷을 벗은 녀석이 작은 어깨 위로 툭, 제 것을 걸쳐주었다.

 도하가 덮어준 재킷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품이 넉넉한 옷자락으로 몸을 꽉 여몄다.

 “왠지 확 심심해질 것 같지 않아? 수능 그거 하나만 보고 몇 년째 열심히 달렸는데, 갑자기 목표점도 할 일도 사라져버리니까.”

 “심심할 틈이 어디 있어. 공부 땜에 못한 밀린 숙제들 해야지.”

 “밀린 숙제?”

 도하의 뜬금없는 숙제 발언에 다경이 무슨 뜻이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잊었냐?”

 씩― 어딘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도하가 불현듯 거리를 좁혀들었다.

 “이 이상 손댔다간 허튼짓할까 봐 당분간은 참는 거라고 했잖아, 내가.”

 “허튼··· 짓?”

 “그래. 공부도 끝났으니까, 이제 이 짓 저 짓 꼴리는 대로 해야지. 물론 네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이 짓 저 짓 꼴리는 대로라니.

 그 말에 도하가 말한 허튼짓의 의미를 깨달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변태가···.”

 찬 바람에도 꿋꿋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녹을 것처럼 화끈댔다.

 “글쎄. 무슨 상상을 하길래 얼굴이 또 이렇게 빨개지실까, 이 변태는?”

 도하가 짓궂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발개진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아무 상상도 안 했거든?”

 다경이 발작처럼 몸을 일으키며 빽― 소리를 내질렀다.

 “솔직하게 말해봐. 19금 마크 띄웠어, 안 띄웠어.”

 “없어, 그딴 거! 없다고, 이 미친 변태야!”

 얻어 입고 있던 교복마저 도로 돌려줘버리곤 다경이 씩씩대며 몸을 돌렸다.

 “하하. 하여간 귀여워 죽겠다, 진짜.”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리까지 내어가며 웃은 녀석이 습관처럼 다경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저만큼 떨어져서 걸어. 제 머릿속이 19금이면서.”

 뚱한 얼굴로 정수리에 닿은 손을 쳐내고 다경이 빠르게 앞서 걸었다.

 아무튼 취향 한 번 저질스러운 건 알아줘야 했다.

 저런 말들로 내가 당황하는 걸 보는 게 저 녀석은 재미있나?

 불퉁스레 입술을 내밀며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도하가 뒤처지지 않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그러곤 조금 전 내던지다시피 돌려준 교복을 다시 어깨에 둘러주며, 장난기가 덜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능 끝나면 일단 너 하고 싶은 거부터 쭉 적어보자.”

 코끝을 감싸는 익숙한 체향과 함께 건너온 도하의 제안에, 다경이 솔깃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고, 놀러도 가고. 지금까지 안 해본 거 다 하자.”

 빙긋 웃으며 할 일들을 나열한 도하가 교복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어 다경의 손을 잡았다.

 “단, 둘이 같이.”

 자연스레 깍지를 끼며 도하가 붙인 단서에 괜스레 마음이 울렁거렸다.

 “응.”

 나지막이 답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되돌린 다경이 소리 없이 입가를 당겨 웃었다.

 제 몸을 단단하게 둘러준 도하의 교복 때문인지.

 시린 바람도 어쩐지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았다.

 파고들 듯 단단하게 얽어져 오는 마디 굵은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은 채, 다경은 온몸으로 전도되는 도하의 체온을 마음껏 받아들였다.

 * * *

 수능이 끝났다.

 역대급 불수능이라며 우려했던 것 치곤, 의외로 결과는 나쁘지 않다.

 여기저기 학교를 옮겨 다닌 탓에 내신이 좋질 않아 수시는 쓰지 못했지만, 정시를 넣었을 때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에 갈 수 있을 만큼의 성적은 나왔다.

 모든 건 권도하 덕분이다.

 수능 직전까지도 저를 붙들고 중요한 부분들을 함께 공부해줬던 권도하.

 정작 본인은 수시로 합격이 거의 정해진 터라 쉬엄쉬엄해도 됐지만, 자신을 위해 부러 같이 강행군인 스케줄을 따라가며 애썼다는 걸 다경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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