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15. 진실
가짜였던 10대의 연애는 그날의 첫 키스를 기점으로 어느 순간 진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왜···.”
과학실을 나서려던 팔이 붙잡히며, 더운 입술이 촉, 하고 다경에게서 붙었다가 떨어졌다.
“미, 미쳤어?”
순식간에 귀끝까지 빨개진 다경이 깜짝 놀라 도하를 밀쳐냈다.
“아무도 없잖아. 뭐, 봐도 별 상관은 없지만.”
도리어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올린 도하가 늘씬한 입꼬리를 빙글 말아 올렸다.
봐도 별 상관은 없다니.
“저질 진짜.”
다경이 품 안에 안고 있던 책으로 도하의 팔뚝을 툭, 쳐버리곤 새침하게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숨기진 못한 귀끝이 발간빛을 내며 후끈거렸다.
“저도 좋았으면서 내숭은.”
과학실을 나서는 등 뒤에서 넘어온 목소리에 다경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언제!”
“시치미를 떼려거든 이 귀여운 귀부터 어떻게 좀 가리든가.”
도하가 피식, 웃으며 다경의 빨개진 귓불을 손끝으로 팅- 튕겼다. 그게 또 뭐라고 화르륵 달아오른 다경이 차라리 도망치듯 교실 쪽으로 냅다 걸었다.
“야, 같이 가!”
“저만치 떨어져서 와, 이 변태야!”
쫓아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세라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뛰듯이 교실 앞에 다다른 발이 그를 멀찌감치 뒤로한 채 먼저 사물함 앞에 도착했다.
“아무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진짜.”
후끈대는 귀가 간지러워 다경은 애꿎은 오른쪽 귀를 벅벅 문질렀다.
그날 이후, 도하는 툭하면 저런 식으로 스킨십을 시도하곤 했다. 물론 그때와 같은 진한 접촉은 아니었지만, 다경을 당황케 하기엔 충분한 자극이었다.
게다가 하필 그때,
‘더 하고 싶은데 이 정도에서 참는 거야.’
‘뭘···.’
‘여기서 좀 더 갔다간, 내가 너한테 어떤 허튼짓을 하게 될지 몰라서.’
그런 이상한 뉘앙스의 말까지 듣고 키스를 마친 터라, 뽀뽀라기도 뭐한 미약한 접촉만으로도 다경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당분간 접근금지령을 내리든지 해야지.”
다경이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앞에 있는 사물함 문을 열었다. 그러곤 막 책을 꽂으려던 순간.
“···!”
눈에 담기는 뜻밖의 상황에 다경이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책마저 털썩,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건, 설마···.
“야, 윤다경. 넌 같이 가자니까 뭘 그렇게···.”
“아···.”
등 뒤에서 넘어온 도하의 목소리에 화들짝 몸을 돌려 사물함을 가렸다.
“뭐야, 왜 그래?”
부리나케 문을 닫는 다경을 보곤, 도하의 매끈한 이마에 희미한 실금이 잡혔다.
“아무것도 아냐.”
“뭔데 그래? 나 몰래 언놈이 편지라도 넣어뒀어?”
뭔가 감추려는 기색을 눈치챈 그가 불쑥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편지는 무슨. 너 무서워서 다른 애들은 나한테 말도 못 거는데.”
다경이 발작처럼 도하를 밀어내며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사물함 속이 너무 지저분해서 그래. 얼마나 꽉 찼는지 책 넣을 데가 없네.”
“그렇게 더러워? 같이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됐어. 내가 천천히 정리할게.”
“그러지 말고 같이 하게. 그렇게 꽉 찼음 버릴 것도 꽤 있을 거 아냐.”
“글쎄, 됐다니까.”
다경이 좀 더 완강히 도하를 막아섰다. 그러자 도하가 조금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그런 다경을 바라보았다.
‘보겠다고 하면 안 되는데.’
혹시나 하는 불안함으로, 다경은 속이 바짝 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복도 중앙 계단에서 도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야! 담탱이가 좀 오라는데?”
“씹, 담탱인 또 왜···.”
도하가 짜증스런 얼굴로 욕설을 삼켰다. 이때다 싶어 다경이 얼른 도하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봐, 늦었다고 혼나려고.”
“네가 모르나 본데, 난 원래 선생들한테 혼 안 나.”
“어련하시겠어.”
이사장 아들다운 패기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몸을 돌린 도하가 다경을 향해 당부했다.
“교무실 다녀올 테니까 먼저 정리하고 있어. 뭐 버릴 거 있음, 힘쓰지 말고 그냥 놔두고.”
“알았어.”
뭔가 찝찝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 도하를 보며, 다경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급한 거 아님, 넌 뒈질 줄 알아.”
“왜 내가 뒈져, 부른 건 담탱인데.”
“토 달지 마, 새꺄.”
도하가 담임의 말을 대신 전한 친구와 티격태격하며 계단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사물함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린 다경이 안에 있는 뭔가를 덥석 집어 들었다.
“···.”
손안에 쥔 체육복을 내려다보는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새빨간 락카로 난장판이 된 사물함 안에는 ‘윤걸레’라고 큼직하게 적힌 체육복이 엉망으로 구겨진 채 처박혀 있었다.
“미친···.”
누가 저지른 짓인지 모를 수 없을 만큼 유치한 결과물이 싸늘한 시선 아래서 참혹하게 구겨졌다.
소리 없이 욕을 삼키다가 교실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없다. 이 수준 떨어진 짓을 할 유일한 계집애가.
‘그렇다면 갈 곳이야 뻔하지.’
성큼성큼, 옮겨간 걸음이 3층의 여자 화장실 앞에서 멈춰 섰다.
선뜩한 눈으로 화장실 안을 빠르게 스캔한 다경이 창가 쪽 칸막이를 벌컥 열어젖혔다.
“뭐야, 이건?”
좁아터진 칸막이 안에 셋이나 틀어박혀 있던 김주미 일행이 가소롭다는 눈으로 다경을 훑어내렸다.
“이거 네가 한 짓이지?”
다경은 여러 말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체육복을 툭- 주미의 얼굴을 향해 던져버렸다.
“이 미친년이, 이 더러운 걸 어디 감히 내 얼굴에 던져!”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주미가 제 얼굴을 덮은 체육복을 홱 끌어 내리며 소리쳤다.
“당연히 더럽겠지.”
“야, 이 미친!”
앞을 막아서려는 주미의 시녀들을 옆으로 밀치곤, 다경이 주미에게로 성큼 한 발을 좁혔다.
“더러운 네 손 닿아 그 지경이 된 옷이니까.”
뒷골이 서늘해질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주미를 찢어발길 듯 응시하는 갈색 눈에 선명한 살의가 어려 있었다.
고함 따위를 지르지 않아도 확연하게 전달되는 분노에 주미와 그 일행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순간 저도 모르게 위축된 게 쪽팔렸는지, 버럭 언성을 높인다.
“새, 생사람 잡지 마. 난 모르는 일이거든?”
“하.”
시치미를 떼는 주미를 보며 다경이 나직이 실소했다.
모르는 일이라는 어설픈 변명 따윈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지랄 맞은 성질 못 참고 저질러 놓곤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하는 게, 바로 김주미와 그 시녀들의 특기였으니까.
다경이 처음 이 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날부터 시작된 전쟁이었다. 김주미가 좋아하던 권도하와 제가 엮이고서부턴 더욱 악의적이고 노골적으로 변해갔던 괴롭힘.
그러다 요 근래는 좀 잠잠해졌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가만히 있긴 영 좀이 쑤셨던 모양이다.
“진짜 몰라?”
다경이 선선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어, 몰라. 근데 너 왜 이렇게 빡친 얼굴이냐?”
뻔뻔하게 받아친 주미가 이내 얄미운 얼굴로 빈정댔다.
“윤걸레. 네 이름 딱 적혀 있는 게, 뭐 어때서?”
검정색 체육복에 휘갈겨진 글자를 읽더니, 내던지듯 다경의 가슴팍에 체육복을 밀어 안겼다.
덕분에 뒤로 밀린 몸을 차례로 밀치며 주미와 그 일행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히야. 누가 썼는지, 완전 명필이네.”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갈색 눈이 텅 비었다.
“그러게. 서예대회 나가면 장원급제하겠는데?”
깔깔대며 화장실을 나서는 일행들의 뒤에서 다경이 기민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조금 전 화장실을 들어설 때 봐두었던 걸레통을 번쩍 양손에 집어 들었다.
동시에.
“오호. 그 정도? 그럼 이참에 수능 때려치우고··· 꺄악!”
쏴악― 쏟아진 회색빛 물이 주미와 그 일행의 온몸을 순식간에 덮쳤다.
“아악! 이게 뭐야!”
“저 미친년이 진짜아!!”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주미와 시녀들이 길길이 날뛰며 다경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뭐긴.”
들고 있던 걸레통을 바닥에 툭- 내던지듯 내려놓은 다경이 싸늘하게 입가를 당기며 대꾸했다.
“주둥이가 걸레라 걸레 빤 물 좀 부어줬는데, 왜. 너무 향기로워?”
“이씨, 미친···!”
눈이 확 돌아 달려드는 주미를 다경이 발로 뻥! 차버렸다.
“주미야! 괜찮아??”
“저년이 진짜 미쳤나 봐!!!”
주미와 딱 어울리는 꼴로 젖은 시녀들이 저만치 나가떨어진 주미를 부리나케 부축하며 경악하는 얼굴로 다경을 돌아보았다.
그럼에도 다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제 발밑에 나가떨어진 셋을 싸늘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무심코 열어젖힌 사물함 안에 놓인 제 체육복을 본 순간 뒤집힌 눈이었다. 아마도 그 타이밍에 권도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더 크게 터졌을 감정이다.
행여나 도하가 본다면 더 걷잡을 수 없이 큰일로 번질까 봐 막아선 것일 뿐, 그렇다고 이 억울한 상황을 그냥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저 썅년이!”
부축하는 팔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미가 더러운 걸레 냄새를 풍기며 코앞까지 바짝 다가섰다.
“네가 아주 권도하 등에 업더니 눈에 뵈는 게 없지? 별 미친 짓을 해도 멀쩡할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