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미쳤나봐, 정말!’
회의실을 나서는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첫사랑이라니! 첫사랑하고 재회했다니!’
조금 전, 회의실을 나서기 직전 그의 입을 빠져나온 말들이 어지러울 만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입만 열면 폭탄을 투하하는 그라서, 뭔가 또 제 심장을 덜컹이게 하는 소릴 내뱉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런 말은 짐작도 못 했다.
그것도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첫사랑과의 재회라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둘이 동창인 걸 알고 있는 송 과장님, 박 과장님, 미애 씨는 없던 오해라도 하고 남을 텐데!
‘아니, 그보다도 윤다경 넌 대체 거기서 뿜긴 왜 뿜은 건데!’
돌이켜보니 도하가 뱉은 말보다도, 그 순간 제가 보였던 반응이 더 미심쩍을 듯해 자책감과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엊그제 도하를 붙잡고 유혹했던 그날의 만행에 이어 두 번째로 접시물에 코를 박고 싶은 심경이었다.
혹시 송 과장님하고 미애 씨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음 어쩌지?
그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날 이상하게 보는 거 아니야?
아냐. 아닐 거다. 적어도 그들은 저와 권도하가 동창인 걸 모르니까···.
“옷은 안 버렸어?”
어찌저찌 수습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막 화장실을 나선 찰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회의실에 있을 거라 여겼던 도하의 등장에 깜짝 놀란 다경이 부리나케 주변을 살폈다.
“뭐,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뭘 그렇게 놀라?”
도하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고?
그 타이밍에 따라 나오면 남들 눈에 수상해 보일 게 뻔한데,
“너 좀 따라와.”
경각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질문에 다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야. 비상계단이 무슨 회사원들 비밀 아지트야?”
꼼짝 않고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순순히 끌려온 도하가 태평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박 과장하고도 여기서 이야기하더니···.”
“뭐 하자는 거야, 정말?”
거두절미하고 다경이 본론부터 꺼내 물었다. 구체적인 설명이 빠진 질문이었으나,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르지 않을 터였다.
“왜, 물어보길래 그냥 있는 그대로 답한 건데.”
역시나 질문의 의미를 파악한 도하가 빙긋 입꼬리를 당기며 능청스레 답했다.
묻길래 그냥 답한 거라고?
“거기서 그런 말은 왜 해서!”
“그러는 넌.”
기가 찬 듯 언성을 높이자 그가 그녀의 등 뒤를 짚어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워서 그 타이밍에 사레까지 든 건데?”
속이 비쳐 보일 만큼 새카만 눈으로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아님, 그 여자가 내 첫사랑이라는 게.”
비상계단의 창을 뚫고 쏟아진 빛줄기가 맞닿을 듯 대치한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렀다.
줄곧 그를 향해 날을 세우던 다경이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고서야 무겁게 답을 뱉었다.
“둘 다.”
“···.”
“둘 다 당황스러워.”
단단한 얼굴로 말하는 다경을, 도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피하면, 도리어 제 마음을 들킬 것 같아 다경은 부러 뻔뻔할 만큼 그를 마주한 채 건조하게 덧붙였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타인의 진심을 듣는 것처럼, 불편한 건 없으니까.”
아니. 실은 두근거렸다.
하필 그 상황에서 네가 그런 말을 한 게 당황스럽긴 했지만. 날 향한 네 감정이··· 나에 대한 너의 정의가 나는 퍽 심장이 저려올 만큼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됐다.
“남은 계산이 끝나면 거기서 종료될 관계야, 우린.”
10년 만에 재회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정의는 바로 이것이니까.
“그러니까 우리 계산이 다 끝났을 때, 혹시라도 직원들이 뭔가를 눈치채고 미심쩍어할 만한 건 없었으면 해. 그래야 너나 나나, 피차 이 회사에 다니기 덜 불편할 테니까.”
다경이 저를 벽 사이에 가둔 기다란 팔을 가만히 끌어 내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이쯤 되면 또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겠구나 생각하며 돌아올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예상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저 꿰뚫을 듯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쩐지, 그 시선에 모든 게 간파당하는 것만 같아 다경이 도망치듯 그의 옆을 지나치려던 순간. 그가 물었다.
“우리 계산이 몇 번 남은 줄은 알아?”
다경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모른다. 줄어드는 횟수가 두려워, 사라지는 그와의 미래가 안타까워 일부러 세어보질 않았다.
“그거 다 끝나면.”
지나친 채 멈춰있는 가느다란 팔을 가벼이 붙잡아 돌리며 그가 또 한 번 물었다.
“정말 나 보기 안 불편하겠어?”
“응.”
거기엔 정해놓은 답처럼 단호하게 응답했다.
불편해도 내색을 해선 안 됐다. 미련이 남아도 내색해선 안 된다.
애초에 그 남은 계산이 너와의 관계에 응하는 이유였다는 듯, 태연하고도 당연하게. 그 불편함과 미련들을 감내해야 했다.
“거짓말.”
하지만 도하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 밖의 답이 흘러나왔다.
“다경아. 넌 네가 꽤나 거짓말에 능숙한 줄 알지?”
그가 피식 웃으며 붙잡은 그녀의 앞에 마주 섰다.
“근데 그거 알아? 네가 10년 전 그 밤, 허튼짓하자고 날 찾아왔을 때부터.”
“···.”
“난 네가 그럴 심정이 아니었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
예상치 못했던 그의 고백에 줄곧 평정을 가장하던 갈색 눈 위로 숨길 수 없는 파문이 번졌다.
10년 전 그 밤부터 알고 있었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다경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네가 날 그렇게 이용하려 한다는 걸.”
사실이었다.
도하는 그 밤, 절박하게 저를 붙드는 다경의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나 좀 쉬고 싶은데. 어디 갈 데 없어, 둘이?’
다경이 지금 내키지 않음에도 오기로 저를 붙잡고 있다는 걸.
‘둘이?’
‘응. 둘이.’
무언가의 돌파구로서 저를 택했다는 걸.
‘허튼짓하자, 도하야.’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나··· 너랑 지금, 허튼짓하고 싶어.’
그토록 떠는데, 세상이 다 무너진 눈으로 날 쳐다보는데, 죽어라 윤다경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던 내가 그 속내를 모를 리가.
다만···.
“욕심이 나서 그냥 모른척한 거지.”
도하가 당황하여 올려다보는 연한 눈을 깊게 직시한 채 말했다.
“왠지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거든. 그러면 널 영영 못 안게 될 것 같아서.”
그러곤 이내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뭐, 결과적으로 그 밤이 나한텐 진짜 널 안은 마지막 밤이 되고 말았지만.”
기회라 생각했던 밤에 오히려 널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게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 도하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다경이 혼란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도하가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눈앞이 울렁거렸다.
알면 안 되는데, 네가 알면 안 되는데.
그래서 여태 네 마음에 있는 대로 생채기를 낸 건데.
네가 설마···.
“근데, 다경아. 이번엔 너 그렇게 허무하게 안 놓쳐, 나.”
혼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다경을 보며 도하가 다짐하듯 읊조렸다.
“네가 아무리 날 세우고 거짓말해도, 싫다고 밀어내도 내 눈엔 다 보인다고.”
피할 곳 없이 마주친 두 눈을 서늘하게 번뜩이며 그가 덧붙였다.
“네가 나 좋아죽는 거.”
줄곧 진심을 부정하던 갈색 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 동요를 놓치지 않고, 도하가 말했다.
“그러니까 알아낼 거야, 기필코.”
“···뭘?”
네가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지만 넌 내가 이 사실들을 캐고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서든 숨기려 발버둥 칠 테지. 아니, 아예 너 자체가 내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도망친 10년일 테니까.
“네가 네 입으로.”
그러니까 네가 내게서 떠나야 했던 그 이유를 다 알게 될 때까진,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도하야, 네가 좋아 죽겠어··· 라고 말할 방법을 찾고 말 거라고. 바보야.”
내가 널 아프게 한 그것들을 찾는 중이란 걸.
“무슨···.”
순간, 긴장하고 있던 얼굴에서 힘이 탁 풀리며 다경이 한숨을 놓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 내일 출장 가.”
그 틈을 타, 도하가 가볍게 화두를 돌렸다.
출장이라니.
“부산에서 컨퍼런스가 있는데, 전무님께서 보좌하라고 하셔서 다녀오기로 했어.”
전무라면 그의 숙부라는 권현준 전무님을 말하는 모양이다.
예정에도 없던 그의 출장 소식에, 다경은 문득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주말 지나야 올 것 같은데. 혹시 그 안에 나 보고 싶으면 우리 집 왔다 가도 되고.”
도하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안에 제가 보고 싶으면 다녀가라니.
“내가 너 없는 집엘 왜 가니?”
실없는 소릴 다 듣겠다는 듯, 다경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수리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다정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인다.
“혹시 또 알아?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도 모르게 발길이 내 집으로 닿을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난 아마.”
무방비하게 있던 뒷머리가 그대로 당겨지며 이마에 불현듯 그의 입술이 맞붙었다.
“부산에 있는 내내 네 생각뿐일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