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대충 알아는 봤는데, 그냥 예상한 대로야. 엄마 앞으로 빚이 꽤 되더라고. 10년 전에도 그 빚 때문에 야반도주하듯이 도망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희한하게 빚은 그대로야.
“그래?”
― 어. 다방 때려치우고 상경했으면 새인생 살고 있어야 맞는데, 지금도 변두리 공사판 근처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더라고. 뭐, 금전 사정은 여전히 쪼들리는 상태고.
모두가 예상 가능한 것이었으나, 친구 말마따나 10년 사이 정신을 차린 다경의 어머니가 조금 의외이긴 했다.
당시에 듣기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자 손님들을 영업할 만큼 방탕했다고 알고 있는데.
다경의 얼굴에 수시로 나던 상처며 멍자국들을 봤을 때 가정폭력도 적잖게 이루어져 왔었던 것 같고.
어지간해선 깨달음이란 게 없을 것 같은 엄마가 그렇게 달라진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어차피 빚지고 사는 것이야 여기에 있건, 다른 데로 가건 마찬가지였을 텐데.
꼭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곡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떠나야만 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토록 변함이 없던 다경의 모친도, 그 날을 기점으로 변한 것이고···.
― 그래서 더 알아봤는데, 10년 전 그때 말이야. 걔 엄마 앞으로 접수 됐다가 취하된 고소 건들이 있어. 사기죄, 간통죄 여러 건이 엮여서, 그 동네 사는 사람들이 아주 조직적으로 걸고 넘어지려고 했던 것 같더라.
“소장이?”
― 음, 근데 이게 네가 말한 그 두 모녀가 사라지고 난 직후에 바로 한꺼번에 취하됐어. 뭔가 시기적으로 좀 구린내가 난다는 소리지.
“그때 다경이 엄마를 고소했던 사람 명단은 알고 있어?”
― 아니. 거기까진 아직. 이게 취하된 건이라 딱히 기록으로 남아 있진 않거든.
“그럼 넌, 그걸 어디서 들었는데?”
― 지금 그쪽 경찰서에 있는 과장한테 들었지. 그 양반한테 물어보면 뭐, 어느 정도 각이 나오지 않겠냐?
“그래. 그럼 좀 더 부탁하자. 고소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그냥 취하했는지만 좀 더 알아봐 줘.”
마지막 부탁의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풀릴 듯 풀리지 않는 실마리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정운이 습관처럼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다경의 모녀를 사기죄, 간통죄로 몰아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소를 취하하고 이 동네에서 떠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럴만한 이유와, 힘을 가진 사람.
누굴까. 대체 누구···.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심란한 얼굴로 필터 끝을 빨아들이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문득 한 사람이 스쳤다.
동시에 무심코 창밖을 향해 있던 그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설마.’
필터 끝을 문 입술이 불길함을 품고 가늘게 떨렸다.
절대 이 사람만은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싶은 한 사람의 얼굴이.
* * *
주말 중 가장 바쁠 저녁 장사 시간.
그 타이밍을 노린 다경이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스레 집 현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최대한 일찍 들어오는 게 맞는 것 같았지만 이미 늦어버린터라, 부러 제 엄마가 가장 바쁠 시간을 틈타 몰래 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소용없는 요행이었던 모양이다.
“뉘집 고양이가 이렇게 살금살금 기어들어오실꼬.”
잔뜩 움츠리고 있는 등 뒤편에서 넘어온 음산한 목소리에 다경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어, 엄마···.”
“정신 차리고 최대한 빨리 들어오라고 했어, 안 했어, 이 기집애야!”
외박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겨우 들어온 딸이 괘씸한 듯, 엄마가 살벌한 식가위를 손에 쥔 채 다경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참에 두 번 다신 밖에 못 기어나게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려야지!”
“어, 엄마! 일단 그 가위 좀 내려놓고 얘기해.”
다경이 제발 좀 진정하라는 듯 양손을 뻗으며 엄마를 막아섰다.
“아니, 난 그냥 오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같이 속풀이 좀 하고 가재서.”
“그래, 속풀이 잘 하고 온 것 같으니 아주 제대로 살풀이 좀 해 보자. 오늘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 엄마가 무섭게 번쩍이는 가위를 머리 위로 확 치켜 들었다.
“아악! 왜 그래! 술 취해서 실수 좀 한 걸 가지고!”
외박 한 번에 딸을 죽일 기세인 엄마를 막아서며 다경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듯한 엄마가 치켜들고 있던 가위를 툭 내려놓으며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바른대로 말해.”
“뭐, 뭘?”
“연애하지, 너.”
그 순간. 가위에 머리카락이 댕강 잘려나갈 상황 속에서도 소리를 지를 뿐 감정적 동요는 없던 얼굴에 옅은 망설임이 스쳤다.
연애를 하냐고. 차라리 제가 하는 것이 진짜 연애였다면 등짝 몇 대 후려 맞더라도 솔직하게 말했을 텐데.
다경은 도저히 그렇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냐, 그런 거.”
다경이 완강히 부정하며 기운이 쏙 빠진 얼굴로 엄마에게서 물러섰다.
“아냐? 아닌데 다 큰 지지배가 자꾸 밥 먹듯이 외박을 해?”
아무래도 의심이 가시지 않은 엄마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다경을 다그쳤다.
“말했잖아. 취해서 부서 과장님 집에서 잔 거라고.”
”그러니까 어느 상사께서 취한 여직원 잠까지 재워주시냐고.“
애초에 통하지 않을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엄마가 이 정도로 집요하게 나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10년 전 그날 이후로는 다경이 어떻게 사는 줄 알기에 뭐든 적당히 그래~ 하고 넘어갔던 엄마라 더 쉽게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따라 엄마는 집요했고 그냥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과장님은 원래 잠도 재워주고 그러···.“
“연애해, 이것아.”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다경에게 엄마가 대뜸 말했다.
다경이 당황한 얼굴로 그런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엄마가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전처럼 이유 없이 너 잡고 드잡이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연애를 안 해? 서른 줄이 코앞인데.”
어렸을 적. 남자 문제라면 학을 떼며 손찌검을 했던 엄마는 10년 전 그날을 이후로 두 번 다신 제게 손을 대지 않았다.
물론 이성 문제를 대놓고 얘기한 적도 없었지만, 적어도 이젠 그때처럼 결벽을 떨 듯 유난스럽게 굴진 않았다.
그럼에도 다경은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제대로 연애하는 모습조차 보인 적이 없었고, 그런 다경을 바라보며 엄마는 내심 불안해 했다.
이제 그만 지난 일 따윈 훌훌 털어버리고 편해질 때도 됐는데, 딸이 여전히 남모를 상처 속에 스스로를 꽁꽁 가둬두고 있는 것만 같아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아님, 너 아직도 엄마 출신 걸려서 그래?”
대꾸 없이 마주 서있기만 하는 다경을 향해 엄마가 웬만해선 꺼낸 적 없는 말을 끄집어 냈다.
엄마의 출신이 걸려서냐니.
“아냐, 그런 거.”
다경이 펄쩍 뛰며 제 엄마를 향해 답했다.
사실 어렸을 적 그녀는 엄마가 남자에게 기생하는 삶을 살았던 걸 원망했었다.
성인이 되면, 그래서 엄마 품에서 제일 먼저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10년 전 그날, 제 앞을 막아서던 엄마를 보고 알았다.
엄마야말로 나 때문에 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너만 아니었어도, 라는 엄마의 악에 받친 말들로 인해 엄마 또한 나로 인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의 일로 인해 다경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부끄럽다고 생각 안 해.”
물론 여전히 사람들에게 엄마와 저의 과거가 알려지는 게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진 않았다.
“지금 엄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계시잖아.”
10년 전 그날 이후, 180도로 달라져버린 엄마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살고 있고 누구보다도 더 저를 딸로서 아껴주고 있었다.
술 몇 잔 엉덩이 몇 번 내어주는 게 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곡을 떠나온 후론 얼음장 같은 찬물에 손을 담그고 무거운 뚝배기를 머리에 이고 지며 눈물과 땀으로 저를 키워 내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만, 제가 이토록 제 마음을 부정하고 도하를 밀어내는 이유는 모두.
“나 때문이야.”
다경 자신 때문이었다.
10년 전, 예의 없고 비겁했던 나 때문에.
미련과 복수를 구분치 못했던 나 때문에.
그래서 애꿎은 도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10년의 지옥을 준 바로 나 때문에.
그러므로 이 모든 불행과 후회의 원인은, 엄마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때문이라니.”
엄마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경을 향해 말했다.
“아냐, 나 때문인 게 맞아.”
다경은 반복해서 읊조린 채,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게 못 먹는 감은 탐내는 게 아니야, 얘야.’
작정하고 상처주기 위한 밤이었다.
못 먹는 감은 탐내는 게 아니라던 누군가의 말에 오기가 나서. 어차피 못 먹을 감, 저로 인해 곪아 터지게 만들어주겠다고. 버러지가 돼서 그 안에 깊게 파고들겠다며 독을 품고 도하를 찾아갔었다.
그 애가 무슨 죄라고. 권도하는 단지 제게 진심이었던 죄밖에 없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라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