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가 끓인 국은 그의 말처럼, 그냥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식당을 운영 중인 엄마 덕에 나름 까탈스런 입맛의 소유자임에도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만큼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맛이었다.
애초에 권도하가 직접 국을 끓이고 밥을 차리는 그 상황자체가 매치가 되질 않아서 별 기대조차 하지 않았건만···.
“···뭐, 그렇네.”
차마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민망한 다경이 짐짓 태연한 척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보다 요리를 좀 해.”
칭찬 받은 아이처럼 신이 난 그가 들뜬 표정으로 답하며 밥 한술을 국에 말았다.
남이 해다가 주는 밥이나 겨우 먹을 줄 아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생각했는데, 이래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건가.
의외네, 하고 생각하며 다시금 국그릇에 수저를 담갔을 때였다.
“입맛은 토종 한국인인데 유학 가서 살다 보니까 자급자족이 필요했거든.”
별생각 없이 그의 말을 넘겨 듣던 다경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콩나물국에 담겨 있는 숟가락이 미처 두 번째 술을 뜨지 못하고 다시 국물 안으로 박혔다.
유학이라.
그 단어에서 잠시 사고가 멈추었다.
사실 도하와 처음 재회했을 때, 그가 미국 유명대를 졸업한 유학파 출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로부터 듣고 줄곧 의아함이 남아 있었다.
둘이 헤어질 당시 그는 S대 경영학과 입학이 확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당연히 예정된 대학에 진학해 한국에서 지내왔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유복한 가장에서 나고 자랐으니 잠시 어학연수 정도는 다녀왔을 수 있지만, 10년이나 미국에 있었다니.
왜 갑작스레 예정에도 없던 유학을 다녀오게 된 것인지.
줄곧 남모르게 품고 있었던 궁금함이 기회를 틈타 혀끝까지 기어 나왔다.
“유학은···.”
그냥 묻지 말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가버린 목소리를 주워 담기엔 늦은 상태였다.
“왜 갔어?”
조심스럽게 빠져나간 물음과 함께 일순 식탁 위로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대꾸 없이 앉아 있던 그의 입술이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참 빨리도 물어보네. 글쎄, 왜 갔을 것 같냐?”
대답이 아닌 반문을 던진 그가 빤한 눈으로 다경을 직시했다.
역시나 괜한 물음이었나 보다.
왠지 감당 못 할 답이 건너올 것 같은 분위기에 다경이 때늦은 수습에 나섰다.
“아냐, 됐어. 굳이 말하지···.”
“너 때문인 게 뻔하잖아.”
도망갈 구멍을 찾아 중얼거리는 음성을 도하가 직설적이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차단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병신 짓만 골라 하는 아들 꼴 보기 싫어서 강제 유학 보낸 부모.”
“···.”
“예상 가능한 그림 아니야?”
숟가락을 국에 담근 채로 차마 앞을 바라보지 못한 다경의 손에 작게 힘이 실렸다.
“뭐 그렇게 꼭 강제도 아니었어. 따지고 보면 나도 어느 선에선 동의했던 유학이었거든. 별 미친 짓을 다 해도 안 잊히길래, 한국이라도 뜨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 뭐 결국,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덤덤하게 그때의 상황을 읊은 도하가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밥술을 뜨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의 상황을 듣던 다경이 떨리는 혀끝을 꾹 이로 짓눌렀다. 그러자 피식 웃은 그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뭐 그렇게 심각해. 10년 지나서도 이 지랄 하는 나 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 텐데.”
그의 말마따나, 어느 정도 예상하고 이유였다. 하지만 막상 직접 듣고 보자 심장이 턱 짓눌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도하의 예정에 없던 유학의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었다니. 10년 전 그렇게 떠나버린 저로 인해 부모도 못 두고 볼 만큼 미친 짓을 했다고···.
“···.”
괜히 물었다는 후회와 뒤늦은 죄책감에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차마 밥술을 뜨지 못하고 앉아만 있자, 씁쓸하던 표정을 어느새 갈무리한 그가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그러는 넌 어떻게 살았는데?”
내 10년은 너로 인해 그러했는데, 그 10년 동안 넌 어떻게 살았느냐고.
그렇게 되묻는 듯한 음성에 허공을 담은 다경의 눈망울이 잘게 떨렸다.
“난 말했잖아. 잘···.”
“잘 살았다, 좋았다.”
그녀에게서 나올 법한 예상 가능한 답이 도하의 입술을 뚫고 선수치듯 내뱉어졌다.
줄곧 도망치듯 아래로 떨구어져 있던 눈이 낚싯바늘에 채이듯 그에게로 향했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 그만하고 솔직하게 말해 봐.”
“···.”
“어떻게 살았는지까지는 굳이 말 안 해도 되니까. 그렇게 나 떠나고 지난 10년 동안 내 생각, 한 번도 안 했는지.”
새카맣게 가라앉은 진중한 시선이 자꾸만 대답을 회피하려 드는 그녀를 올곧게 꿰뚫었다.
에두른 변명과 회피를 모두 차단한 채 날아든 직구에 다경이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난 10년 동안, 네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느냐고?
아니. 그렇게 도망치고 얼마간 매일매일, 뿌리치지 못할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 꿈엔 항상 네가 있었고, 잠에서 깼을 때 난 항상 베개가 젖도록 울고 있었다.
그렇게 너와 마지막을 보내고 끝내면, 널 향한 미련으로부터 홀가분할 줄 알았다. 날 도망치게 한 것들로부터 통쾌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안. 급히 마련하느라 이것밖에 안 돼서.’
마지막까지 영문도 모르면서 내게 모든 걸 내어주는 널 보면서.
‘아파서 우는 거야?’
‘아니. 좋아서, 너무 좋아서··· 흑.’
내 살결을 스칠때마다 떨리던 그 길고 단단한 손이 집요하게 뇌리를 따라붙어서.
‘하··· 좋아 미치겠다, 다경아.’
그냥 그때, 복수니 뭐니 하는 핑계로 어설픈 미련 따위 내보이지 않고 도망쳤어야 했다고.
두고두고 그날의 선택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경은 차마 제가 그때 느꼈던 그 진심을 있는 그대로 그 앞에 털어놓을 수 없었다.
왜 그날 그렇게 널 두고 떠나야 했는지. 하곡에서 도망치듯 사라져야 했는지.
그때의 일에 대해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로는, 내 이런 감정들을 네게 말할 방법은 없으니까.
그래서.
“미안했어, 많이.”
고작 미안했다고, 단조로운 말로 제 지난한 마음을 대신 전했다.
진실할 수 없는 제 진심을 대체할 유일한 단어는 미안하다, 는 닳고 닳은 사과뿐이었으니까.
다경이 하마터면 흐느낌이 샐 것만 같은 목구멍을 꽉 조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참, 난 예나 지금이나 너한텐 쭉 나쁜 계집애다.
지난 10년이 나로 인해 지옥이었다는 네게 이런 고문과 다를 바 없는 미련만 남겨주고.
그래서, 이렇게나 괴로운 걸까. 그 짙고 무거운 미련 속에 한없이 침몰해가는 걸까.
이런 부질없는 짓은 나 하나만으로 족한데.
그래서···, 그래서 최대한 너와 남는 것이 없도록 이 관계를 마무리 짓고 싶었던 건데.
“그러니까···.”
회피하는 답을 끝으로 마음을 갈무리 짓는 다경의 귓가에 생각지 못한 답이 흘러들었다.
“내 생각을 하긴 했다는 거잖아, 그치?”
애써 그를 외면 중이던 눈동자가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많이 미안해 하면서.”
많이 그리워했던 게 아니냐고.
그렇게 묻는 듯한 그의 말에 어렵사리 동요를 감추던 가슴 속으로 묵직한 돌덩이가 던져졌다.
눈물이 핑 돈 시야가 어지럽게 굽이쳤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지은 그가 반찬을 집어 다경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다행이네. 나 혼자만 네 생각 한 건 아니라서.”
차마 꺼내지 못한 진심이 그 앞에 벌거벗겨진 채로 나부꼈다.
왈칵 치솟은 감정이 목울대를 시큰하게 울렸다.
다경이 하마터면 그에게 들켜버릴 뻔한 얼굴을 재빠르게 바닥으로 떨구었다.
발간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그가 손수 만들어준 말간 국물 위로 툭-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게 어떻게 다행이니.’
차마 밥알을 삼켜내지도 못하는 입안에서 뱉지 못하는 슬픔이 어지러이 맴돈다.
‘어떻게 다행이야, 그게.’
다경이 어느새 주체 안 될 정도로 흐르는 제 눈물을 가리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툭- 투둑- 떨어지는 눈물이 자꾸만 국 안으로 스몄다.
모른 척 밥공기 위로 고정된 짙은 눈에 다경의 젖은 얼굴이 흐릿하게 담겼다.
소리없이 우는 다경을 보며 도하는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너의 그 동요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고.
내가 널 놓지 않아도 되는, 이 미련한 기대를 붙잡고 가도 될 충분한 이유가.
* * *
“뭐해, 벗고 들어가.”
물이 넘칠 듯 담긴 욕조를 고개 끝으로 가리키는 도하를 하며 다경이 기갑을 하며 물었다.
“뭐야? 넌 안 나가?”
“왜 나가? 같이 씻으려고 들어온 건데.”
그러곤 입고 있던 팬츠와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져 버렸다.
같이 씻으려고 들어온 거라니.
감히 상상조차 못한 상황에, 욕조로는 발도 들이지 못한 다경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익었다.
분명, 물을 받아줄 테니 씻으라고 했지 같이 씻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나가!”
눈앞에서 드로즈마저 벗으려 드는 그를 황급히 밀어냈으나 그는 장승처럼 버티고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입은 채로 그냥 들어갈 거야?”
“무슨 소리야! 나 혼자 씻을 거니까 나갓··· 꺅!”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밀던 손이 홱 낚아 채이더니 눈 깜짝할 새에 번쩍 몸이 들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