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일어났어?”
문 밖에서 건너온 목소리에 다경이 사색이 된 낯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냥 이대로 다시 누울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얼굴로 도하를 대할까. 그도 아니면 어제의 미친 짓을 기억에서 지워달라고 빌어보기라도 할까.
대꾸 없이 치열한 갈등만 반복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들어간다, 나.”
거부할 타이밍을 놓친 방안으로 그가 들어섰다.
어떡해!
다경이 깜짝 놀라 얼른 이불 속으로 쏙 몸을 숨겼다.
“뭐야, 아직 자?”
차마 머리까진 뒤집어쓰지 못해 가슴께에서 이불을 그러 쥔 손이 파들거렸다. 자칫하면 숨소리가 새나갈 것 같은 입술도 안으로 꾹 말아 삼켰다.
어차피 언젠간 일어나야 할 텐데 굳이 자는 척을 해서 어쩌자는 거니, 다경아!
한심한 짓을 연거푸 저지르고 만 스스로를 자책하자, 한층 가까워진 곳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난 줄 알고 왔더니, 아직이네.”
푹, 무게감이 실린 매트리스가 사뿐하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섰다.
‘어떡해애···.’
꺼졌다가 올라오는 스프링처럼 출렁, 가라앉았다 오른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적당히 자는 척하고 그냥 눈을 뜨는 게 차라리 나을지,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자려나.”
불현듯 뻗어온 더운 손이 시트 위로 드러난 맨살을 더듬고 올라와 목덜미에 닿았다.
간지러워.
아스스 솜털이 선 다경이 움찔 어깨를 떤다.
“옷도 이렇게 다 벗고 있고.”
목선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인 손끝이 보나마나 빨개졌을 귀끝을 장난처럼 슬쩍 매만졌다.
“넥타이도 아직 있는데.”
흡, 숨을 당긴 다경의 귓불로 조금은 짓궂은 음성이 파고들었다.
대체 어쩌면 좋지.
두근대는 심박 소리가 행여 상대에게 전해질까 두려워서, 두 눈썹 머리에 바짝 힘을 실은 순간이었다.
“이번엔 윤 다경 눈 가린 채로 모닝 섹스나 한 번 더···.”
벌떡! 다경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야, 깼네?”
놀란 기색도 없는 도하가 싱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지, 지금 완전 맨정신이야, 나.”
그러니 제 눈을 가리느니 어쩌느니 하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다경이 말아 쥔 시트를 목 밑까지 당기며 방어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맨정신이겠지. 그렇게 해댔는데.”
굳이 그 부분까진 말할 필요 없건만. 쓸데없는 부연을 붙인 도하가 수가 빤하다는 듯 픽- 실소를 터트린다.
쪽팔려, 증말.
누구처럼 대놓고 뻔뻔하지 못한 얼굴이 녹을 듯이 화끈거렸다. 마땅히 대꾸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일단 옷이나 좀 입을까···.
여전히 발가벗은 채인 저완 달리 멀끔하게 차려 입은 그를 보며 뒤늦게 옷을 찾아 시선을 돌리자 그가 말했다.
“옷 없어.”
“뭐?”
“어제 급하게 벗느라 단추가 다 뜯어져서 아침에 세탁소에 맡겼거든.”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단추까지 다 뜯어져야 했던 걸까.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쯤 되면 그냥 내 입으로 먼저 간밤의 일에 대해 말해야 하나. 격렬한 번뇌가 밀려왔다.
실수였다고 잊어달라고 빌어라도 볼까. 아니면 차라리, 술 취한 거 뻔히 알면서 그 장단에 박자 맞춰준 네가 잘못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나가 봐?
그러기엔 너무도 생생한 어제의 기억 탓에 의식 속에서 몇 번이고 이불킥을 반복하길 한참.
“좀 있으면 갖고 올 테니까, 일단 그거 입고 나와.”
툭- 가지런히 개어진 티셔츠와 파자마가 그녀 앞으로 놓였다.
“늦었어도 속풀이는 해야지.”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여전히 헐벗은 채인 그녀를 남겨둔 채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줄곧 가슴 아래서 휘몰아치던 한숨이 가쁘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못 살겠다, 정말.
앞에 놓인 옷가지를 꽉 움켜쥔 다경의 얼굴이 그의 체취가 스민 옷 위로 폭 처박히고 말았다.
* * *
“옷이 좀···.”
제 몸에 비해 턱없이 큰 옷을 만지작대며 다경이 우물쭈물 식탁 쪽으로 걸어 나왔다.
“너무 큰데, 이것밖에 없어?”
주방에 서서 아침을 준비하던 도하가 다경이 돌돌 말아 올린 소매와 바짓단을 보며 픽 웃었다.
“내 옷이니까 당연히 크겠지. 집에 있는 건 그것뿐이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 옷 있는 게 더 웃기잖아.”
그야 그렇지만···.
“정 불편하면 네가 좀 주기적으로 왔다 가든가. 그럼 드레스룸 한 칸 정돈 네 사이즈로 따로 채워둘 테니까.”
주기적으로 이 집엘 다녀가라니. 기함할 소리에 다경이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그냥 입을게.”
되지도 않는 수작을 차갑게 튕겨내며 식탁 앞으로 와 앉았다.
어떤 반응이 올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도하가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가벼이 웃었다.
하여간 틈만 나면 사람을 놀리려고 들지.
다경이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그나마 어제 일을 꺼내들며 대놓고 놀리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저래놓고 또 언제 어떻게 돌변해 놀릴지 몰라 경계 어린 얼굴로 앉아 있자, 그가 바글바글 끓여낸 콩나물국을 그릇에 담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사양 말고 먹어라, 주정뱅이.”
그럼 그렇지. 대놓고 놀려대는 말에도 각오하고 있던 바라 딱히 민망하고 말 것도 없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도하를 노려보던 다경이 이내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사실 도하와 했던 행위에 대한 기억들도 아주 완벽하진 않은 상태지만, 회식 자리에서 이 집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아예 통째로 도려낸 듯 깨끗했다.
혹시 술에 취해 동료들을 상대로 실수를 하진 않았을지도 걱정되었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집이 아닌 도하의 집으로 오게 된 것인지. 다경은 그 부분이 못내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진짜 하나도 기억 안나나 보네.”
제 몫의 국그릇을 챙긴 도하가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너 술 먹고 완전 뻗어 버렸잖아, 그것도 술집 앞에서. 취한 너는 잠들었고, 휴대폰은 꺼져 있고. 근데 다들 네 집이 어딘지 모른다고 난감해하길래 내가 데리고 온 거야. 그냥 그렇게 두고 올 수 없어서.”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어제의 상황을 읊는 그의 말에 다경의 얼굴로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다들 내 집이 어딘지를 모르길래 대신 날 데려왔다니.
그 말은 즉, 회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저를 데려왔다는 뜻이었다.
“사람들한텐 뭐라고 하고···.”
“뭘 뭐라고 해. 너랑 나 동창이라고 적당히 둘러댔지.”
당황한 다경의 목소리 끝이 일순 높아졌다.
“그게 어떻게 적당한 거야?”
우리 둘이 동창이란 사실을 회사 사람들에게 말했다니.
“적당하지 않을 건 또 뭔데?”
마찬가지로 단호한 얼굴로 받아친 그가 문제 될 게 뭐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학연, 지연, 혈연. 뭐만 있으면 묶어대려는 게 이 바닥인데, 너랑 내가 동창인 게 그렇게 덮어놓고 쉬쉬할 문제는 아니잖아?”
“하지만···.”
“너야말로 괜한 트집 잡지 말고 그냥 적당히 이해해. 그거 아니었음.”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빤히 맞추고 있던 시선을 식탁 위로 미끄러트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박 과장 품에 안겨 가는 네 꼴 봐야 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 순간, 따져 물으려 달싹이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바로 어제, 독한 말들로 도하의 가슴에 냈던 생채기들이 다시 한 번 눈앞에서 들춰지는 것만 같았다.
다경은 대꾸 없이 눈을 떨구었다.
그렇게 상처를 받고도 꺾이지 않는 도하의 마음이 버거웠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질릴 법도 한데, 어째서 넌 그렇게 날 향한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오늘은 택시 타지 말고 내 차로 가.”
착잡한 눈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향해 도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됐어. 그냥 나 알아서 갈···.”
“회사 사람들한테 동창이라 너 사는 집 안다고 했어.”
“···.”
“그래놓고 모르고 있으면 말이 안 맞잖아. 나중에 괜히 오늘 일 의심 받지 않으려면 똑바로 알고는 있어야지.”
그게 그가 저를 바래다주겠다는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뭐라 말해도 도하는 제 뜻을 꺾지 않을 테다.
“알아서 해.”
지친 목소리로 답하자, 그가 더 이상의 실랑이는 끝내자는 듯 앞에 놓인 콩나물국을 슬쩍 턱짓했다.
“한 번 먹어봐. 먹을 만한지.”
먹을 게 편히 목구멍으로 넘어갈 만큼 속 편한 상황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됐다며 일어섰을 텐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다 그런 밤을 보내고, 여기서 이렇게 도하가 손수 차려준 밥상까지 받게 된 건지. 다경은 돌이킬수록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제 입으로 너와 내게 남은 건 섹스뿐이라 선을 그어 놓곤, 이런 빌미나 만들고.
남모를 한숨을 삼킨 다경이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평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저를 바라보는 눈을 뒤로한 채 심드렁히 국 한 술을 떴다.
동시에, 별 기대 없이 국물을 맛본 다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꽤 먹을 만 하지?”
어떤 반응이 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도하가 씩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