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98)

 45화.

 “그 밤 이후로, 내가 처음이야?”

 도하가 중대한 결과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경험이 없긴 마찬가지라는 말의 의미가 자신이 해석한 내용이 맞는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단전 아래가 자글자글 끓었다.

 “난··· 내가.”

 다경이 그의 뜨겁고도 무거운 시선에 바짝 타들어 간 입술을 슬쩍 물었다 놓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차라리 경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왠지 모르게 울컥거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곤 빤히 내리 닿는 도하의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떨구었다.

 “그랬음, 이렇게 모든 게 부끄럽고 어설프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특별하지도 않았겠지.”

 우리에게 서로가 떨치지 못한 미련으로 남은 건 어쩌면 모든 게 처음이라서, 일지도 모르니까.

 “너, 진짜···.”

 다경이 울먹이듯 뱉어내는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던 도하의 얼굴로 만감이 교차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경험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저야 윤다경 말마따나 10년 전 그 밤 이후로 고자나 다름없이 살아와 윤다경이 처음이지만, 다경은 분명 경험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듯 다그치는 말들에도 한 번도 이렇다 할 부정을 한 적이 없는 그녀라, 그래서 남몰래 속도 끓어 왔는데.

 그런데 뭐라고?

 피차 서로가 처음이었다고?

 “씹···.”

 나직한 욕설이 씹어뱉듯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너 그걸 왜 이제야!”

 도하가 언성을 높이려다 말고,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애욕으로 들끓던 머릿속이 생각지 못한 사실에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냥 무시하고 넘겼던 첫날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프, 아··· 흣.’

 그래서 10년 만에 재회한 그 첫날, 그렇게 아프다고 울었던 건가.

 ‘이, 이걸 내가 왜···.’

 그래서 콘돔을 씌우면서도 손이며 입술을 발발 떨었던 거고.

 ‘너, 넌 무슨 그런 걸···.’

 뭘 어떻게 해줘야 하냐는 내 물음에도 그래서 모른다고, 순진하게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던 거였어.

 아는 게 없으니까. 뭘 어떻게 해줘야 좋은지 알 턱이 없어서.

 “하···.”

 그렇게 생각하자, 그제야 그간 의아하게 여겼던 반응들에 대한 앞뒤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씨발, 병신 새끼. 처음이라 뭘 알았어야지.

 차마 육성으로 자책하진 못하고 거칠게 이마를 쓸어올린 그의 눈이 제 아래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는 가느다란 인영에 가 닿았다.

 그와 함께 스스로를 향해 치솟던 화가 그나마 좀 차분해졌다. 그리고 곧,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연약한 어린양처럼 가느다란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있는 다경의 귓불을 슬쩍 매만지며, 도하가 다정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예쁜 곳에 몸을 맞춘 게 내가 유일하다. 그 말 아냐, 지금.”

 한결 풀어진 그의 음성에 다경이 물기 어린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취하지 않았다면 아니라고 시치미부터 딱 잡아뗐을 얼굴이,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미치겠네.

 멈춘 채로 그녀 안에 묻혀 있는 욕망이 터질 것처럼 발화했다. 다경이 이 상태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단숨에 한계점에 도달해버릴 것만 같았다.

 꿈인가.

 유치하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예쁜 거에 다들 용케 손도 안 대고 내버려 뒀던 건지.

 “그··· 만 좀 봐.”

 그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고 빤했는지, 다경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수줍어하는 반응에 다시금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겨와, 도하가 남모를 신음을 끙 하고 삼켰다.

 위험하긴 하다.

 지금 상태론 다경이 살짝 몸을 뒤틀기만 해도 그대로 꼴사납게 끝을 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넣은 채로 못 먹는 감 보듯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만 보라구, 창피하단 말야.”

 뭐가 그렇게 창피한 건지, 다경이 제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그의 눈마저 가리려 들었다.

 “뭘 자꾸 보지 말래.”

 “앗!”

 뻗어온 손을 가벼이 낚아채 시트 위로 밀어붙이곤, 그가 짓궂게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러게 좀 적당히 예쁘던가.”

 “뭐야, 그 느끼한 멘트는···.”

 취한 와중에도 애교라곤 없는 무덤덤한 성격은 도무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음담패설엔 대담해지면서, 이런 건 오히려 취약하네.

 “왜, 예쁘다니까 예쁘다는데. 예쁜아.”

 “하지마아, 그거.”

 10년 전에도 질색을 하던 호칭을 부러 반복하며 귓불을 살짝 물자, 다경이 바르르 몸을 떨며 부리나케 그를 밀어냈다.

 “그, 그만할래. 나.”

 그만하겠다니.

 아직 끝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린가 싶어, 도하가 빠져나가려는 다경을 도로 잡아 시트 위로 밀어 눕혔다.

 “너나 나나 지금 이 난린데, 여기서 관두겠다고?”

 수습불가인 두 몸을 네 눈으로 직접 보고나 말하라는 듯, 도하가 두 눈을 맞춘 채 몸 아래쪽을 턱짓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만 보랬잖아. 창피하게, 자꾸.”

 뭐가 그렇게 쑥스럽고 창피한지 다경이 차마 그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못하고 완강히 고개만 돌렸다.

 아까 전에 아주 대담한 얼굴로 섰네, 어쩌네 떠들어 댔던 그 위인이 맞나.

 도하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이건 이것대로 귀여우니, 이쯤 되면 내가 중증인가 싶다.

 “또 웃는다, 또오.”

 희미하게 웃고 있는 그를 새침하게 돌아보며 다경이 힐끔 눈을 흘겼다.

 “너만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오는데 어쩌라고.”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개진 뺨을 손끝으로 슬쩍 튕기자, 다경의 입에서 야트막한 신음이 터졌다.

 “흣···.”

 미약하게 진동하는 몸의 가느다란 떨림이 고스란히 그에게로 전해졌다.

 동시에 줄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경을 바라보던 도하의 얼굴 위로 희미한 확신이 스쳤다.

 아무래도 자꾸 창피하다 그만 봐라 한 게, 달아오른 제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였나?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그런 말도 했었지.

 ‘차라리 경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그랬음, 이렇게 모든 게 부끄럽고 어설프지 않았을 테니까.’

 어설픈 제 모습이 부끄럽다는 듯, 원망 어린 눈을 한 채로.

 ‘하··· 그런 거였나.’

 도하의 입가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속 모를 웃음을 입가에 건 채 그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어때? 차라리 내가 눈을 감아버리는 건.”

 “눈을··· 감아?”

 줄곧 그를 외면하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걸려들었네.

 “내가 널 보는 게 싫은 거잖아. 그게 부끄럽다는 거고.”

 어르듯, 다경의 발개진 눈가를 문지르곤 이내 깊게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눈을 감은 채로 이 짓을 하는 거지. 대신, 난 보이질 않으니 네가 움직여야겠지만.”

 유연하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 아찔한 호선을 띄웠다.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해주겠다는 듯, 그가 늘씬한 눈초리를 부드럽게 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다정하고도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런 눈빛에 다경은 괜스레 뱃속이 자르르 떨리는 듯했다. 고양된 기대감이 배꼽 어딘가를 꽉 쥐어짜는 것 같다.

 눈을 감은 채로. 도하는 날 보지 못하게.

 꼴깍, 마른침을 삼키던 눈에 조금 전 그의 손에서 이탈한 넥타이가 보였다.

 “그럼···.”

 그와 함께 맨정신이었다면 차마 말 못 할 충동이 목젖까지 기어 나왔다.

 해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될까. 망설였지만 어느새 손은 시트 위에 흐트러져 있는 그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걸로 네 눈을 가려줘.”

 이 밤을 다시 쓸 주문이 다경의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 *

 미쳤다.

 단단히 미쳤나 보다, 윤다경.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인 다경이 그 안에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간밤, 울적한 기분에 술을 들이켤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감히 꿈조차 꿔본 적이 없었다.

 제 입으로 직접 고자니 뭐니 하며 권도하를 유혹하는 것도. 그가 저의 처음이자 유일한 경험임을 고백하는 것도.

 그런데 그만으로도 모자라 막판엔 넥타이를 건네며, 제 몸으로 직접 도하의 위에서···.

 “악···!”

 차마 생각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다경이 베개에 입술을 틀어막고 막힌 비명을 질렀다.

 숙취 때문인지, 창피함 때문인지.

 지끈대는 이마를 베개에 문지르다가, 하필 스치듯 바닥을 향한 눈에 어제 도하의 눈을 가렸던 넥타이까지 보이고 말았다.

 나가 죽자, 윤다경!

 자괴감에 휩싸인 머리가 혼미할 지경이었다. 제가 대체 어떤 미친 짓을 더 했을지 알 수 없어 초조함과 걱정스러움이 가중되었다.

 얼른 정신 차리고 들어오라던 엄마와의 통화 같은 건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옆에 없는 걸 보니 먼저 일어난 거겠지?

 보기 민망해서 자리를 피한 걸까.

 아니야, 놀리면 놀렸지 민망해 할 성격은 아니잖아. 그럼 어딜 갔길래 이렇게 조용한 걸까.

 차라리 아예 밖이라도 나간 거였으면 좋겠다.

 그럼, 그 사이에 얼른 집으로···.

 ― 똑똑

 “···!”

 주인 없는 방을 조심스레 울리는 묵직한 노크 소리가 한 줄기 남은 희망마저 와장창 부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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