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98)

 42화.

 “제가 데려다주죠.”

 익숙한 듯 그렇지 못한 음성과 함께, 길고 짙은 그림자가 불현듯 그들 앞을 막아섰다. 덕분에 야멸차게 돌아서던 송 과장과 미애도 발길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팀장님께서요?”

 갑작스레 다경을 책임지겠다 나선 인물은 바로 다름 아닌, 권도하 팀장이었다.

 같은 부서에 부임한 지 기껏해야 보름밖에 안 된 신임 팀장.

 그의 조금은 뜬금없는 등장에, 일호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당황한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압니다, 윤 대리 사는 곳.”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묻지 않아도 그들의 황당함과 의문 어린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가 차갑게 덧붙였다.

 4년이나 같이 근무한 우리도 모르는 걸 보름밖에 안 된 당신이? 하는 얼굴로, 송 과장이 우물쭈물 말을 뱉었다.

 “아니, 팀장님께서 어떻게···.”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무심히 허공을 스쳐 닿은 검은 눈이 서늘한 뱀처럼 일호의 손을 훑어내렸다.

 “동창이거든요, 우리 둘.”

 윤 대리와 저, 도 아니고 우리 둘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꺼낸 그가 차갑게 일호를 응시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렸다.

 금시초문인 사실에 놀란 것도 놀란 것이었지만, 어쩐지 그의 말에 조금의 의아함도 얹어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다들 압도당한 탓이었다.

 “어? 두 분이 동창이셨어요?”

 그나마 덜 얼어붙은 미애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 과장도 떨떠름한 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게, 몰랐네요. 윤 대리는 별말 없던데···.”

 “굳이 사적인 내용까지 알릴 정도로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니었나 보죠.”

 냉담한 목소리가 차갑게 송 과장의 말꼬리를 잘라냈다.

 그러는 저는 꽤나 사적이고 친분 있는 사이라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송 과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그럼 좀···.”

 성큼 거리를 좁힌 그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목을 잡아채 제게로 당겼다.

 “비켜주시겠습니까, 박 과장님?”

 “···!”

 일호의 품에 기대어 있던 작은 몸이 단번에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당황한 일호가 급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를 응시하고 있던 검은 눈이 충돌하듯 부딪혀 왔다.

 동시에 일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어둠 속을 시리게 가르며 건너온 그 눈은··· 부하 직원을 챙기는 상사의 눈이 아닌, 제 것을 지키는 명백한 수컷의 눈이었다.

 * * *

 “기사님, 에어컨 조금만 줄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시린 에어컨의 소음마저 잦아든 차 안에 쌕쌕- 미약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가운 냉기가 혹여나 여린 몸에 닿을까 싶어, 도하가 다경의 어깨에 두른 옷을 더욱 단단히 여며주었다.

 그럼에도 다경은 미약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은 채 제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풀어져 있는 윤다경을 보는 건.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넌 내 앞에 있을 때면 항상 뭔가를 숨기기 급급한 모습으로 잔뜩 경계한 채 날 대하곤 했으니까.

 “잘도 자네.”

 도하가 얕게 흔들리는 차체 덕에 움직이는 고개를 제 어깨로 지그시 눌렀다.

 조심스레 옆 머리를 감싸 쥔 손아귀에 따스한 다경의 온기가 감돌았다.

 차에 타기 직전, 저 대신 이 체온을 느꼈을 사내놈의 얼굴이 불쑥 떠오르니 어금니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딴 놈이었다면 당장에 그 손모가지를 잡아 분질러 버렸을 텐데.

 “너한테 차인 놈이라 봐줬다, 내가.”

 나지막이 읊조린 그가 가만히 다경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지금 제 마음이 어떤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이 야속했다.

 이래놓곤 월요일에 회사에 가서 저와 제가 동창이란 사실을 직원들 앞에서 말한 걸 알게 된다면 또 길길이 날뛸 게 눈에 선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언제고 알게 될 거, 이런 식으로 알리는 것도 나쁠 건 없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재워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도하가 조심스레 다경의 어깨를 흔들었다.

 “윤다경, 일어나 봐.”

 “으음.”

 다경이 눈은 뜨지 않고 더욱 깊숙이 그에게로 얼굴을 묻어왔다. 덕분에 훅, 숨을 들이켠 그의 낯으로 짧은 갈등이 스쳤다.

 경계 없이 안겨드는 이 감촉이 좋아 그냥 좀 더 내버려둘까 싶었지만, 늦기 전에 기사에게 행선지를 정해줘야 했다.

 “잘 땐 자더라도 집은 말해주고 자야 할 거 아냐, 이 바보야.”

 이번엔 슬쩍 콧방울도 손으로 쥐어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푸흐, 고개를 흔들더니 일어나긴커녕 도로 품 안으로 폭 안겨버린다.

 힘이 바짝 들어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아···.”

 심란한 한숨이 목울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박 과장 그놈한테 안 넘기길 천만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딴 놈 차를 얻어타고 가는 도중에도 이랬을 걸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냐, 너.”

 그가 심란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다경의 머리칼을 연거푸 넘겨주었다.

 동창이라며. 다경의 집을 알고 있노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렇게나 몸을 섞어 놓고도, 끝나고 나면 매번 도망치듯 택시를 타고 사라져버린 탓에 다경이 어디에 사는지 모르고 있는 건 저 또한 매한가지였다.

 박 과장 그 인간은 적어도 집 근처 지하철역은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나보다 낫네.”

 무턱대고 데리고 와놓고 답이 보이질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에게로 기사가 물었다.

 “손님, 정확히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출발해 달라는 그의 요구 탓에, 차는 벌써 10분째 주위만 뱅뱅 돌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람 속도 모르고 곤히 잠든 말간 얼굴이 두통을 가중시킨다.

 쌕색- 숨소리만 내뱉을 뿐 달싹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입술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도하가 이내 포기하듯 말을 뱉었다.

 “그냥 삼성동으로 부탁드릴게요.”

 그와 함께 목적 없이 헤매던 차가 결국 그의 집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 * *

 안고 온 다경을 조심스럽게 제 방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잠에서 깬 다경이 여기가 어딘지 안다면 기겁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취한 여자를 호텔 방으로 데리고 가는 것 또한 그림이 좋지 않을 걸 알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으음···.”

 안겨 올라오는 내내 꼼짝 않은 여자가 눕혀 놓자 자연스레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몸을 웅크렸다.

 잘 때 얼굴을 비비는 게 버릇인가.

 옅은 술 냄새가 아니었다면 취한 줄도 몰랐을 말간 얼굴을 들여다보며 도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예쁘긴 참, 한결같이 예쁘네.”

 잠이 들어 평소처럼 날을 세우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윤다경은,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어여쁜 것 같기도 했다.

 그려 놓은 듯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과 알콜 덕에 연한 홍조가 올라와 더욱 탐스러워 보이는 복숭앗빛 뺨.

 미약하게 숨을 색색- 대는 입술은 살짝 벌어져 안이 보이는 게, 꼭 대놓고 그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취해서 인사불성 된 모습까지 예쁘고 난리다, 이건.

 혹시나 저 아닌 딴 놈이 챙기다가 이 꼴을 봤더라면, 애국가를 100번은 더 부르고도 남았을 테지.

 “오늘부로 술 금지야, 넌.”

 착잡한 얼굴로 다경을 내려다보던 그가 어지러운 상념을 끊어내듯 이불로 손을 뻗었다.

 평상시였다면 몰래 입술이라도 훔쳤을 텐데, 지은 죄가 막중한 터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지.’

 목 아래까지 이불을 추켜 올려주던 그의 손이 단단하게 채워진 블라우스를 보곤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취한 채라지만 딱 붙는 H라인의 스커트와 목까지 채워진 단추가 그냥 못 본 척 넘기기엔 너무 답답해 보였다.

 그렇다고, 잠든 다경의 몸에 손을 대자니 그건 그것대로 양심에 걸린다.

 아닌가. 여태 물고 빨고 할 거 다 해놓고선 이제 와 내외하는 게 더 우스운가.

 뒤늦게 양심 따윌 찾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없어 헛웃음을 뱉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자는 애를 상대로 뭘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답답할까 봐 단추 몇 개 풀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오해 마라. 단추만 풀어주는 거다, 단추만.”

 어지간해선 깰 것 같지 않았지만, 혹시 다경이 보면 괜한 오해라도 할까 싶어 부러 들으란 듯이 말했다.

 블라우스의 맨 윗단추에 닿은 손이 조심스럽다.

 톡, 하고 풀리며 그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목선이 입 안을 바짝 마르게 했다.

 씹, 왜 자꾸 윤다경 앞에만 서면 사춘기 애새끼가 되는지.

 답지 않게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굳게 잠긴 두 번째 단추로 손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권··· 도하.”

 “···!”

 낮고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를 잡아챘다.

 그와 함께 꾹 감겨 있던 눈꺼풀이 예고도 없이 갈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꿈을 꾸는 건지, 현실인지, 구분 중인 듯 멍한 눈이 그를 담은 채 느리게 깜박였다.

 “···뭐해, 지금?”

 “···.”

 아, 좃됐다.

 차마 대꾸치 못한 도하의 입 안에서 그 말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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