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연하게 홍조가 올라온 뺨이며, 웃음이 헤퍼진 눈이 이미 꽤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마음 같아선 테이블로 건너가 그만하라며 술잔을 잡아채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다경이 반병도 채 안 된다는 주량으로 저렇게나 술을 마시는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권 팀장, 한 잔 더 받아야지.”
착잡한 눈으로 먼 곳만 바라보는 그의 앞으로 술병이 내밀어졌다.
“주인공이 돼서 이렇게 잔 비워 놓고 있음 쓰나?”
정작 주인공인 저보다도 더 즐기고 있는 부장이 빨개진 코끝을 킁킁대며 그의 빈 잔을 지적했다.
받아들 생각 따윈 없다는 듯 마뜩잖은 표정을 한 채 버티고 있자, 옆자리에 앉은 최 팀장이 적당히 맞춰주라며 옆구리를 툭 쳤다.
“네, 부장님.” 하고 잔을 올리면서도 차마 떨어지지 못한 시선이 끈질기게 다경을 따라붙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 관계를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어이, 권팀. 우리 2차는 어디로 갈까?”
이제라도 내가 널 그냥 놓아주는 게, 최선일 뿐인가.
“자네 노래는 좀 하나? 노래방 어때? 아니면, 룸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몸과 달리 자꾸만 귀퉁이로 향하는 주의를 붙잡지 못하고 겉돌기를 한참.
“얘, 윤대리! 그만 마셔. 반병 이미 넘었잖아아.”
“조절해서 드셔야죠, 대리님. 그러다 진짜 취하세요―.”
어지러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온 소음과 함께 결론이 났다.
“아뇨.”
“뭐야, 노래는 영 아니야?”
나는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님.”
널 놓을 수 없다는, 미련한 결론이.
* * *
“아니, 2차는 영 안 되겠어?”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부서장이 도하를 붙잡고 늘어졌다.
“죄송합니다.”
그가 냉정히 대꾸하며 대리 기사를 호출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아까부터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 익숙한 인영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시작부터 겁도 없이 마시는 것 같던데.’
아까부터 다경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같은 테이블에 있는 직원들이 어련히 잘 챙겼을 걸 알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거, 사람이 영 매정하네!”
아무리 달래보아도 넘어올 기미가 없자 부장이 결국 서운함을 터뜨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본인 환영식인데 말이야! 이런 식으로, 어?”
“아휴, 부장님.”
포기를 모르고 엄포마저 놓는 부장을 보다 못해, 옆에 있던 최 팀장이 정리에 나섰다.
“힘들다는 권 팀장은 그냥 보내시고 마음 맞는 저희들이랑 한 잔 더 하시죠?”
“아니. 그러니까 나는! 오늘 우리 권 팀장이랑 마음을 좀 맞춰 보고 싶다고오.”
최 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부장의 질척임은 끝을 모르고 늘어졌다.
“어이, 권도하! 그냥 그렇게 갈 거면 자네 대신 자네 숙부님이라도 모셔놓고 가.”
급해졌는지, 종국엔 아예 대놓고 한 인물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자네 숙부님 권현준 전무 말이야아. 내가 우리 권 전무님께 긴히 좀 드릴 말씀이···.”
“아이고 참, 우리 부장님이 정말 왜 이러실까.”
결국, 이 이상 그대로 두면 감당 안 되겠다 싶어진 최 팀장이 서둘러 부장의 팔을 끌어 잡았다. 그러곤 식당 앞에 모여있는 직원들을 향해 환영회를 정리하는 멘트를 날렸다.
“자자. 보다시피 부장님도 많이 취하셨고 해서, 아무래도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야 될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자기 주변 사람들 잘 챙겨서 안전하게 귀가들 하시고, 월요일에 쌩쌩한 얼굴로 봅시다!”
“네, 팀장님!”
최 팀장의 해산 명령에 직원들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환호의 음성이 터졌다.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에 술 취한 상사의 비위를 맞춰가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권 팀장 자네도 얼른 들어가고.”
“감사합니다, 팀장님.”
“가긴 어딜 가아, 권 팀장! 자네 숙부 불러놓고 가라니까아!”
정신 못 차리는 부서장이 끝까지 애먼 숙부를 찾아댔지만, 결국 최 팀장이 꺼낸 비장의 카드에 마지못해 풀이 꺾였다.
“부장님, 자꾸 그러심 사모님께 전화 드리겠습니다.”
“으흠. 우리 집이 어디더라.”
비척댈 땐 언제고 사모님 소리에 발라진 부장의 걸음새를 보며 도하가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면 좀 실없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상황이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상황 따라 유치해지는 건 나도 마찬가진가.
자조하듯 입술을 비튼 그가 막 고개를 든 찰나였다.
“자기야, 윤 대리!”
소란스런 음성에 실린 세 글자가 매섭게 귓불을 잡아챘다.
그와 함께 그토록 찾아 헤맸음에도 보이지 않던 실루엣이 시리게 눈을 파고들었다.
후미진 식당 뒷골목에서 여린 새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윤다경이.
* * *
“자기야, 윤 대리! 정신 좀 차려봐!”
“괜찮으세요, 대리님?”
무릎에 얼굴마저 묻은 채 쪼그리고 앉은 다경을 흔들며 송 과장과 미애가 발만 동동 굴렸다. 흔들면 흔드는대로 휘청이는 몸이 누가 봐도 술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술 마시는 내내 헤실헤실 웃기만 했을 뿐 별다른 기미가 없더니, 해산 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이 지경이 되어 있었다.
“어쩐지 너무 달린다 싶더라. 평소엔 죽어라 들이밀어도 안 마시던 애가 대체 웬일이래.”
“어떡해요, 과장님. 대리님 휴대폰도 꺼져 있는데. 혹시 윤 대리님 어디 사시는지 과장님은 아세요?”
집에 전화라도 걸어볼까 싶었으나 전원마저 꺼져버린 휴대폰을 보며 미애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전혀. 언제 같이 술이라도 마셔봤어야지.”
“우리 부서에 윤 대리님 집 주소 아는 직원이 있으려나.”
“글쎄. 우리가 모르는데 다른 직원들이라고 알까? 그나마 제일 많이 붙어 다니는 게 너랑 난데.”
“그렇긴 하죠, 그건.”
냉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곁을 주지도 않는 터라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은 그녀였다.
그나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바로 송 과장과 미애였으나, 그들조차 다경의 사적인 부분들까진 세세히 알지 못했다.
적당히 분위기는 맞춰주어도 좀처럼 풀어지는 법은 없는 다경인데, 오늘은 어째 평소 같지가 않았다.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저조해 보인다 싶더니, 남모를 고민거리라도 생긴 건가.
“어떡하지, 참···.”
잠이 든 듯 미동조차 않는 다경을 보며 난감해하던 송 과장의 눈에 막 사람들과 인사하며 돌아서는 한 사람이 보였다.
“어? 맞다, 박일호!”
송의 우렁찬 목소리에 박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그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윤 대리가 많이 취해서. 전에 박 과장이 윤 대리 집에 데려다 준 적 있지 않아?”
“윤 대리가 취했다고?”
그제야 일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인영이 다경임을 알아채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완전 꽐라야, 꽐라. 얘는 무슨 기미도 없이 이렇게 훅 가는지 몰라. 아무튼, 전에 윤 대리 집 데려다준 적 있어 없어?”
다그치듯 묻는 송의 말에 걱정스런 얼굴로 다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일호가 조심스레 말을 뱉었다.
“전에 같이 외근 나갔을 때 한 번 데려다준 적은 있는데, 한 번뿐이라 기억이 정확지 않아서···.”
“뭐 그럼 정확히 기억해 보면 되겠네. 박이 오늘 우리 윤 대리 좀 책임져.”
“뭐?”
당혹스러운 그녀의 주문에 일호의 얼굴로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보다시피 애가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데 우리 중에서 윤 대리 집 아는 사람이 박 과장뿐이잖아. 그러니까 자기가 데리고 가.”
송 과장이 태연한 얼굴로 그에게 다경에 대한 책임을 떠밀었다.
“아니, 그 동네가 골목이 좀 많아서 정말 자세히는···.”
“맞아요, 과장님. 제대로 기억도 못 하시는데 괜히 데리고 가셨다가 밤새 동네만 빙빙 돌면 어쩐대요?”
“조용해, 넌. 알아서 기억해 낼 거니까.”
만류하는 미애의 말에도 뜻을 꺾지 않으며 송 과장이 말했다. 나머지는 박이 알아서 할 거라는 그 말에 일호는 송이 무슨 속셈으로 제게 다경을 맡기는 것인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낮의 일만 없었다면 또 모를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당사자가 원치 않을 방식을 택하기는 찝찝함이 남았다.
물론 동료로서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호의이기는 하나, 이 일로 인해 괜히 또 다경에게 마음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이봐, 송. 뜻은 알겠는데···.”
“알겠으면 쥐어 짜내서라도 윤 대리 집 기억해 내. 가!”
솥뚜껑 같은 손이 등짝을 사정없이 밀었다.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린 몸이 성큼 다경의 곁으로 점프했다.
“억!”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일호는 난감한 얼굴로 송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을 찡긋대며 손을 펄럭이는 송의 짓궂은 배려는 도통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어쩌지, 참.”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일호가 결국 포기하듯 다경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저··· 윤 대리, 일어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인사불성이 된 건지 어깨를 조금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는 그녀를 막 자리에서 일으킨 순간이었다.
“자, 다리에 힘을 좀···.”
“제가 데려다주죠.”
익숙한 듯 그렇지 못한 음성과 함께, 길고 짙은 그림자가 불현듯 그들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