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 이상 가봤자 결국 다시 아파질 뿐이다. 어쩌면 10년 전 그때보다도 더 괴로워질지도 모른다.
굳이 알 필요 없었던 것들까지 다 들춰져서 너 또한 나와 같은 나락으로 빠트리느니, 그냥 혼자 안고 가는 편이 나았다.
아픔도, 원망도, 죄책감도, 그리고 이 끝나지 않을 미련까지도.
“설마 너···.”
제 마음 따위 알고 싶지 않다는 그녀를 향해, 도하가 물었다.
“정말로 그 새끼랑 연애라도 할 생각이야?”
연애라. 그 꿈도 못 꿀 단어를 되뇌며 허탈하게 웃자, 손목을 움켜쥔 악력이 살을 파고들 듯 거세졌다.
“대답해.”
다그치듯 묻는 목소리 끝이 좀 더 거칠게 갈라졌다.
“나랑 다 끝나면, 진짜 박 과장 그 새끼랑 사귈 작정인 거냐고.”
음산한 어조로 건너오는 물음을 다경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러고 싶다면, 내버려 두긴 할 거야?”
“뭐?”
“계산 다 끝내고 박 과장님이랑 연애하겠다고 하면, 그땐 정말 나 놔주긴 할 거냐고.”
도하가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대꾸 없이 악물린 턱이 선명한 분노를 삼킨 채 꿈틀거렸다.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반응에, 다경이 비웃듯 입꼬리를 당겼다.
“아니잖아, 너.”
시린 바람 같은 실소가 서늘하게 둘 사이를 지난다.
“나 놔줄 생각 없잖아.”
혀끝에 맹독이라도 바른 듯 독하디독한 음성이 도하의 안면을 싸늘히 굳게 했다.
“너랑 약속한 그 10번이 끝나면, 또 새로운 협박거리 찾아서 날 네 옆에 매어놓겠지. 걸핏하면 내 엄마 일 들먹이며 날 비난하고 짓밟았던.”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얼굴을 올곧게 직시한 채 그녀가 쐐기를 박듯 읊조렸다.
“10년 전 그 애들처럼.”
귓속으로 박혀드는 경멸 어린 말에 힘줄이 서도록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에서 순간 힘이 탁 풀렸다.
10년 전 그 애들처럼이라니.
그 옛날 다경을 괴롭혔던 애들과 저를 같은 취급하는 그녀의 눈앞에서, 도하는 온몸의 피가 씻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너, 무슨···. 아무리 그래도, 날.”
“긴히 한 얘기가 뭐냐고 물었지?”
가까스로 달싹이는 입술을 무시한 채 다경이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박 과장님 마음 거절하고 오는 길이었어.”
철저히 그를 외면한 얼굴이 시리게 시선을 튕겨냈다.
“당신이 호감 갖고 있는 내가, 당신에 비해 턱없이 수준 이하인 여자라 도저히 그 마음 받아줄 수 없다고.”
예상을 빗나간 답이었다. 마주 선 채 웃는 얼굴, 수줍게 떨구어진 시선. 그것들을 바탕으로 내린 제 결론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사실이 그렇잖아. 내 주제에 지금 무슨 연애를 하니? 10년 전 받은 돈 오백에 저당 잡혀서 너하고 이러고 있는 내가, 그런 좋은 사람 마음 받을 자격이나 돼?”
이어진 다경의 자조 섞인 말과 함께, 그녀가 지었던 미소와 눈빛이 또 다른 의미로 뇌리를 스쳤다.
수줍어하는 게 아닌, 미안해서 차마 바로 보지 못하는 눈이었던 건가. 그리고 그 앞에서 마주 웃고 있던 박 과장은, 그런 다경이 마음 쓸까 봐서 배려하고 있던 거였고.
그런데 난···, 그걸 보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오해해서 꼴사납게 윤다경을···.
“그러니까 걱정 마, 권도하.”
다경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내 주제 파악은, 너보다도 나 자신이 제일 잘하고 있으니까.”
차갑게 그를 외면하던 눈이 부딪힐 것처럼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네 입으로 그랬지? 더는 미련 따위 남을 일 없게 원 없이 날 먹어치울 거라고.”
10년 만에 재회한 날 밤, 그녀를 몰아치며 제가 했던 말을 되뇐 다경이 선선한 어조로 뒤늦은 대답을 뱉었다.
“그래. 네 못다 한 미련 다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너 원하는 만큼 네 밑에서 울어줄게. 대신···.”
힘 빠진 손아귀에 순순히 붙잡혀 있던 손목이 천천히 비틀어져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너도 그 이상은 나한테 바라지 마.”
그게 바로 너와 나의 관계가 지닌 한계라는 듯, 명백한 선을 그은 다경이 차갑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탁― 굳게 닫힌 문소리가 홀로 남은 공간을 시리게 휘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이내 힘없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파들거리는 검은 눈에 창백한 공허가 깃들었다.
뭔가에 얻어맞은 듯 도하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 * *
팀장실에서 나와 묵묵히 자리로 돌아오는 다경의 등 뒤로, 걱정과 호기심이 담긴 눈들이 웅성거리며 따라붙었다.
자리에 앉자, 고성이 울리고부터 걱정하고 있었던 듯한 송 과장과 미애가 옆으로 바짝 다가와 소곤거렸다.
“뭐야, 팀장이 자기한테 소리 지른 거 맞아?”
“그러게. 방금 그거 뭐였어요, 대리님?”
설마하니 사적인 감정이 엮였을 거라곤 짐작조차 못 하는 표정들이었다. 다행히도 둘이 나눈 대화 내용까지 문밖으로 새나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한테 그러신 거 아니에요.”
다경이 지친 기색을 숨기곤 태연하게 답했다.
“A 거래처랑 문제가 좀 있었는데, 팀장님께서 저 대신 통화하시다가 말이 안 통하니까 언성이 높아지셔서.”
상황을 들은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난 또, 자기한테 화낸 건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야.”
“저두요. 밖에 있는 우리도 놀랐는데 바로 앞에서 그런 소리 들으신 대리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
순수하게 저를 향해 걱정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괜찮아요.”
그들의 진심이 고마운 한편, 다경은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저들이 아무리 제게 진심으로 대해도, 앞으로도 저는 온전히 그들 앞에서 진실 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없을 걸 알기에.
“아무튼 다행이다. 이따 환영회도 해줘야 하는데 한 소리 들은 채로 박수 쳐 주기도 영 그렇잖아.”
송 과장의 우스갯소리에 잊고 있던 오후의 일정이 떠올랐다.
환영회라. 가야겠지. 어떤 이유로든 불참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 권 팀장님 기분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팀장바라기인 미애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음··· 아마도?”
다경이 미세한 동요를 숨긴 채 부러 웃으며 답했다.
괜찮다고 답하기엔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렸으나,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내며 모니터 앞으로 몸을 돌렸다.
‘너 진짜로 내 맘 몰라?’
작정하고 내뱉는 독설 앞에서 간절하게 되묻던 음성이.
‘너, 무슨···. 아무리 그래도, 날.’
상처 입은 짐승처럼 무너지던 그의 얼굴이 자꾸만 아프게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쩌면 도하는 아직도, 홀로 남은 팀장실 안에서 넝마가 된 마음을 삼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 따위가 대체 뭐라고 너에게.
다경은 잠시 두 눈을 꾹 감았다.
매정하게 돌아서 놓고도 잊히지 않는 그 뒷모습이 아픈 화인처럼 그녀를 따라붙었다.
14. 한계점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나.
팀장실을 나서던 싸늘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도 없이 고민했다.
10년 전 그 애들처럼 널 괴롭히고 비난하려 했던 건 아니라고. 단지, 너에게 닿지 않는 내 진심과 순정이 서러워 널 옆에 매어둘 빌미를 찾았던 것뿐이라고 울분이라도 토했어야 했는지.
하지만 잠시 한 발자국 떨어져 스스로를 바라보자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게 제 꼴사나운 짓을 포장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라는 걸.
어떤 이유를 붙여본들, 제가 다경을 상대로 한 짓은 그녀의 약한 점을 빌미로 저 유리할 대로 몰아치려 했던 협박과 다름없었다는 걸.
‘사실이 그렇잖아. 내 주제에 지금 무슨 연애를 하니?’
질투에 눈이 뒤집혀 박 과장과의 관계를 추궁하던 제게 자조하듯 되묻던 음성이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10년 전 받은 돈 오백에 저당 잡혀서 너하고 이러고 있는 내가.’
제가 한 짓이 그 옛날, 다경을 하루하루 절망케 했던 사람들과 한 끗도 다를 바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줄곧 그녀를 원망하기만 바빴던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조여왔다.
‘걱정 마, 권도하. 내 주제 파악은 너보다도 나 자신이 제일 잘하고 있으니까.’
아니다. 아니었다. 널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만들려고 행한 짓이 아니다.
‘네 못다 한 미련 다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너 원하는 만큼 네 밑에서 울어줄게.’
내 밑에서 우는 널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다만, 그냥은 놓아지질 않는 내 이 못난 미련 때문에 그렇게나마 네 옆에 붙어 앉아 네 눈길 한 조각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오늘 너무 달리는 거 아냐, 윤 대리?”
회식 자리의 맨 귀퉁이. 그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이름에 도하의 눈이 이끌리듯 움직였다.
“그러게요. 천천히 좀 마시세요, 대리님. 속도 안 좋으시다면서요.”
동료들의 걱정스런 눈초리를 뒤로 한 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다경이 보였다.
“괜찮아. 오히려 마시니까 속이 더 차분해지는데?”
“뭐야아, 그 주당 같은 발언은. 누가 들음 병나발깨나 부는 양반인 줄 알겠다.”
“그렇게 들렸어요? 저 주량 반병도 안 되는데.”
비워진 잔에 도로 술을 채운 그녀가 송 과장의 타박에 푸흐흐,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