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래도 한 번씩, 서글퍼지긴 했다.
제가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부모의 업으로 인해 아파야 했던 유년 시절과 여전히 올가미처럼 저를 조여오는 과거가.
그러면서도 이따금 제 분수를 망각하고 도하에게 흔들리는 마음들 또한 저를 더욱 서글퍼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억지임이 분명한 도하의 제안에 마지못한 척 끌려가지만, 실은 그 우유부단함의 정체는 미련이었다.
더는 미련 따위 남을 일 없게 다 쏟아내겠다던 도하와 마찬가지로, 저 또한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도하의 곁에 있고 싶은 욕심에 가증스럽게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못났다, 정말.”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리석은 미련이 끝을 보기는 할는지. 이젠 그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10년이 지나도 떨치지 못한 너를, 이렇게 몸 몇 번 섞는 것으로 훌훌 털어낼 수 있을지.
“어딜 갔다가 이제 들어와, 자기.”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 앉자 옆자리인 송 과장이 힐끔 그녀 쪽을 내다보았다.
“속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구요.”
“그랬어? 점심때 먹은 게 뭐 문제 있었나?”
“그냥, 요즘 가끔 이렇네요.”
송 과장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던 찰나, 불현듯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들어온다. 얼른 받아.”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걸려온 전화에 다경이 서둘러 내선 번호를 확인했다. 동시에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를 깨닫곤 나직이 숨을 삼켰다.
팀장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보통 업무 시간 중에 호출을 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무슨 일일까.
요 며칠 사적으론 어떠한 연락도 없었던 터라 보자마자 철렁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마케팅 2팀 윤다경―.”
― 팀장실로 와.
말이 끝나기도 전 수화기 너머에서 간결한 명령이 들려왔다. 그러곤 그녀가 무슨 일로 부르는 건지 물을 새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다경이 다소 황망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무적인 용건으로 인한 호출이라기엔 다소 가라앉은 듯한 음성이 영 신경이 쓰였으나, 그렇다고 상사인 그의 호출에 배짱을 부릴 입장도 못됐다.
회사 안인데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저 잠깐 팀장실 좀 다녀올게요, 과장님.”
“그래애-.”
직전에 한바탕 속을 게워내고 온 터라 좋지 않을 낯빛을 단장하곤 팀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예의를 갖추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르셨···.”
“분명히.”
미처 고개 숙여 인사할 틈도 없이 손목이 붙잡히더니 그대로 벽까지 쿵, 몸이 밀어 붙여졌다.
“읏···.”
“말했을 텐데. 나랑 계산 끝날 때까지 딴 새낀 안 된다고.”
블라인드가 절반 정도 내려온 팀장실 벽으로 그녀를 몰아붙인 채 도하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비교적 강한 충격이었으나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당황한 다경이 행여 목소리가 새나갈까 싶어 숨죽인 채 속삭였다.
“그 새끼랑 단둘이 무슨 얘기 했어?”
그럼에도 도하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립스틱까지 새로 발랐네. 남몰래 키스라도 한 거야?”
대뜸 상스러운 호칭을 내뱉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말도 안 되는 억측까지 갖다 붙였다.
대체 지금 이게 무슨.
“미쳤니, 너? 이거 비켜.”
뿌리치려 힘을 준 양팔이 도리어 벽 쪽으로 단단하게 포박되었다.
“어, 미쳤어. 윤다경 네가 날 자꾸 환장하게 하잖아.”
코앞까지 바짝 얼굴을 들이민 채 속삭이는 그의 안광이 광기에 휩싸인 짐승처럼 난폭했다.
“그러니까 말해. 나 진짜 도는 꼴 보기 전에.”
스칠 듯 대치한 숨결이 뜨거웠다. 그럼에도 마주한 눈만은 서릿발처럼 싸늘해서 다경은 오싹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었다.
잠깐 사이,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해명할 문제가 있다면 응당 그리 할 테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숨을 뱉은 찰나.
“박 과장 그 새끼랑.”
그가 집착처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꽉 준 채 서늘하게 속삭였다.
“비상계단에서 뭔 짓을 하다 온 거야?”
그 순간, 그를 마주하던 눈매 끝이 희미하게 구겨졌다.
도하가 저와 박 과장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거라곤 미처 생각질 못했다. 그가 거길 지나쳤을 거라곤···.
“그건···.”
“무슨 밀어를 나누다 온 거냐고.”
도하가 동요하는 다경의 눈을 똑바로 직시한 채 싸늘히 다그쳤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화기가 그의 안에서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어디 처박혀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17층 곳곳을 헤맸다.
화장실부터 휴게실, 하다못해 옥상까지. 다경이 있을 만한 곳은 이 잡듯이 전부 다 뒤지고 다녔다. 그러다 무심코 지나치던 계단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고 혹시나 하고 내다본 눈에 하필 둘의 모습이 들어오고 말았다.
수줍게 눈을 떨구며 웃고 있는 윤다경과 그 앞에서 마주 보며 서 있는 박일호가.
그간 썸타는 놈이냐고 다그치듯 묻곤 했지만, 속으론 내심 아닐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경의 입에선 딱히 부정도 긍정도 나온 적이 없었고, 그래서 저 속 편할 대로 결론을 지었다.
제 눈에만 예쁠 여자가 아니니 여기저기 좋다는 놈들이야 당연히 있었을 거라고. 박 과장 그놈도 그 가련한 짝사랑을 하는 여러 놈들 중 한 놈일 뿐이라고.
만에 하나 좋은 감정이 조금이나마 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지금 몸을 섞고 있는 건 저니까, 상관없다 여겼다.
비록 비겁한 술수를 써 옆에 묶어두곤 있지만, 진심이 통하는 날 제 것이 될 게 뻔했으니까.
매정한 윤다경은 사람 속도 모르고 걸핏하면 10번이면 끝날 관계라 말하지만, 10번이고 100번이고 딴 놈에게 옆자리를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되찾은 인연인데. 네 옆에 딴 놈이 있는 꼴을 두고 보라니 가당치도 않은 개소리다.
내가 없었던 지난 10년, 네 옆을 스쳐 지나갔을 놈들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데. 감히, 내 눈앞에서 딴 놈이라니.
그런데 오늘.
‘고맙습니다, 과장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 꼴을 목격하고 말았다.
제 앞에선 보여준 적도 없는 미소를 지어가며 딴 놈과 마주 서 있는 다경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것도 인적 드문 비상계단 안에 남몰래 처박혀서.
무슨 밀어를 주고받는 중인지 수줍디수줍은 미소까지 지은 채.
씹,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무 짓도 안 했어.”
눈이 반쯤 뒤집힌 그를 바라보며, 다경이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그냥 박 과장님이랑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그 긴히 한 얘기가 뭐였냐고 묻잖아, 내가!”
줄곧 억누르고 있던 화기가 날카로운 고함이 되어 팀장실을 찢어 갈랐다.
밀폐된 사무실의 공기가 격하게 흔들렸다. 굳이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던 다경의 눈에 그 순간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폭주하는 기관차와 다름없는 도하의 반응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누군가는 괜한 오해를 살까 봐 그와 겹치지 않게 사무실에 들어오는 시간조차 계산하며 조심하는데. 어떻게 넌···.
“내가.”
돌연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도하를 향해 냉정하게 물었다.
“내가 왜 너한테 그걸 다 말해야 하는데?”
“뭐?”
“너랑 나랑 몸만 섞기로 했지, 사귀기로 한 건 아니잖아?”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되묻자, 도하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윤다경.”
“막말로 우리, 10번 자면 끝날 사이 아냐? 근데 내가 누굴 만나건, 무슨 얘길 하건, 네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배려 없는 그에게 저 또한 아무런 심정적 배려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왜 상관이 없어.”
도하가 광기 어린 눈을 서늘하게 번뜩였다.
“내가 왜 그딴 억지 부려가면서 널 붙잡고 있는데.”
손목을 쥔 손아귀에 집착 같은 악력이 가해졌다.
“내가 왜, 같잖은 사채업자 코스프레 해가며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읊조리는 음성이 흡사 상처 입은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았다.
“내가 왜, 못된 말만 골라 하는 네 옆에 꾸역꾸역 붙어서 이 오지랖을 떨고 있는데!”
고조되는 감정을 이기다 못해 높아진 목소리를 온갖 힘을 다해 밖으로 끌어내며 도하가 물었다.
“너 진짜로 내 맘 몰라?”
간절하기까지 한 그의 물음에 억척스레 허공을 담고 있는 다경의 눈자위로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모를 리가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믿기 힘들 만큼 참 한결같은 너였다.
못난 나의 독설에 상처 입고 으르렁거리다가도 종국엔 이렇게 널 좀 봐 달라고 울먹이는, 안타깝고도 미안한 너였다.
그런데 그런 네 마음을 내가 모르고 있을 리가.
다만···.
“···몰라.”
거기까진 더 이상 가지 말아야 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우리는 딱 여기까지가 맞는 인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