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 왜 가만있는 애한테 그딴 건 묻고 지랄이야.”
나지막이 욕설을 삼킨 도하가 벌려보고 있던 우드 블라인드에서 신경질적으로 손을 뗐다.
10년 전에도 어머니가 하는 일 때문에 애꿎게 괴롭힘을 당했던 애라 남모를 속앓이가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강단 있고 성격이 당차서 저 나름대로 잘 헤쳐나가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아까 전의 그 반응은 마치···.
“대체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핏기 걷힌 듯 창백하던 얼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걱정과 의문, 불안으로 뒤엉킨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려왔다.
아니, 그보다도 그런 다경에게 제가 처음 만나 했던 짓이 협박과 다름없었음이 뒤늦게 머릿속에 떠올라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아무리 윤다경을 제 옆에 잡아두고 싶어서 그랬다지만, 10년 전에 그렇게 떠나야 했던 이유가 만약 그것과 관련이라도 있는 거라면···.
“무슨 짓을 한 거냐, 권도하.”
자책하듯 읊조리던 그가 참다못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딜 가건 전화는 들고 갔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야속한 신호음만 들려올 뿐 다경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떨치지 못한 불안감에 벌떡 몸을 일으킨 도하가 서둘러 팀장실을 나섰다.
“어? 팀장님, 어디 가세요?”
때마침 앞에 서 있던 여직원 하나가 서류를 품에 안아 든 채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려구요.”
“저 결재 받을 거 있어서 왔는데.”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세요.”
“아, 네.”
여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도하가 팀장실 문도 채 닫지 않은 채로 빠르게 사무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무슨 화장실을 저렇게 박력 있게 가셔.”
다급히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보며, 여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 * *
아무래도 화장실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인적이 드문 비상계단 쪽으로 그와 이동했다.
“무슨 할 말이 있길래 그래요? 사람 긴장 되게.”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남자가 말투에서부터 풍기는 긴장 어린 얼굴로 다경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경은 미소 짓고 있는 그와는 달리 어색한 웃음조차 입가에 걸지 못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운을 떼는 게 맞는 걸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과장님 혹시, 절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상대에 따라 이상한 뉘앙스로 들릴지도 모를 말이었다.
만약 송 과장과 저의 착각이라면 정말이지 창피한 해프닝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리를 하려면 확인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었고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당하다 여길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무슨···.”
“좋은 후임, 딱 그렇게만 생각하세요?”
다경이 조금 더 직설적으로 질문을 바꾸어 물었다.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이어진 다경의 물음에 비로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떤 생각으로 묻고 있는지 명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 고백을 하는 여자라 치기엔 어쩐지 의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그를 불안케 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뇨. 윤 대리도 짐작하다시피 후임으로만 생각하지 않은 지는 꽤 됐습니다.”
그가 직전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한 채 진솔히 답했다.
“보통 그저 좋은 후임으로만 생각하는 부서 직원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진 않으니까.”
다경이 잠시 숨을 삼켰다.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그녀가 그의 마음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뱉을 수 있는 직구였다.
알곤 있었지만, 막상 듣고 보자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잠시 침묵하던 다경이 이내 망설임을 뿌리치고 운을 뗐다.
“갑작스런 질문에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과장님.”
“아닙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게 써주시는 마음과 오늘 같은 이 배려들도. 모두 너무 감사드려요.”
종전에 비해 한결 온화해진 얼굴로 다경이 감사하다는 말을 재차 반복해 내뱉었다.
깍듯해서 더 명확하게 느껴지는 선이었다.
남자의 안에 피어있는 불안감이 어쩐지 더욱 선명해졌다.
“윤 대리.”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리고 역시나.
“제겐 지금 그런 마음과 배려를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어요.”
미미하던 웃음기를 거둔 단단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아직 본격적인 거절의 말을 듣기도 전이었으나,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남자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 다급히 덧붙였다.
“다경 씨에게 부담을 줄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부담 느낀 적 없어요. 그렇게 행동하신 적도 없구요.”
다경이 그렇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분이시잖아요, 박 과장님.”
부담을 줄 의도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은 실로 사실이었다.
그가 제게 했던 행동 중, 무언가를 기대하고 베푼 호의는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옆에 있는 송 과장이 혼자 오버한 것이었을 뿐, 그는 제가 습관처럼 뱉는 감사하다는 말들조차 동료끼리 당연한 거라며 부담을 갖지 말라 했던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해주고 티를 내거나 생색 따윌 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나름의 진심을 내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 그래놓곤 그조차도 행여 제게 부담이 될까 전전긍긍했던 사람.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가 바로 이 사람 같지 않을까, 라고 종종 생각했다.
‘좋은’이라는 말이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다경은 이제 그만,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더 늦기 전에.”
이 좋은 사람에게 이 이상 보답 받을 수 없는 미련한 기대를 심어주기 전에 확실히 말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가 박 과장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처럼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걸.”
다경의 조곤조곤한 음성이 둘뿐인 비상계단을 잔잔하게 울렸다. 그럼에도 남자에겐 그 목소리가 그 어떤 소음보다 크게 다가올 터였다.
“난 윤 대리가 좋은 여자이길 기대한 적 없는데.”
본론이 나오지 않아도 이미 의도가 빤한 답을 나직이 받아치며, 그가 설핏 매너 좋은 웃음을 짓는다.
“좋은 여자라는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는 거니까요.”
가령 사람 자체의 선함이나 능력 같은 것보다도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 배경 등이 그 ‘좋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니까.
“전, 제가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 무결한 여자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박 과장님께서 어떤 기대를 하시건, 어디까지 포용하고자 하시건···.”
다경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다가 이내 덤덤히 덧붙였다.
“전 무조건, 그보다 수준 이하인 여자일 테니까.”
지나치게 담담해서 더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무조건 수준 이하일 거라니.
자학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남자 또한 더는 웃으며 말을 받아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런 생각으로 내몬 걸까.
“왜 그렇게까지 다경 씨 본인을···.”
“그러니까.”
듣다못해 다급히 운을 뗐으나 단호한 음성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좋은 후임으로 남고 싶어요, 과장님.”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해진 목소리로, 하지만.
“좋은 여자가 아니라, 성실하고 믿음직한 후임으로요.”
위태로운 아픔을 얼굴 만면에 두른 채 그를 향해 말했다.
더 이상 제 마음을 밀어붙이지 못한 남자가 망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여자가 여태껏 봐온 중에 가장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거절이 아니라, 새로운 제안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감히, 과장님의 마음을 거절할 주제는 못 되니까.”
참으로 아프고도 슬픈, 거절이었다.
* * *
박 과장과의 대화 뒤, 그를 뒤로하고 먼저 사무실로 돌아왔다.
행여나 누군가 둘이 같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불편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그의 배려 때문이었다.
줄곧 모른 척 해온 그 마음을 오늘에서야 안다고 말해놓곤 그조차 거절한 저인데, 그는 참으로 끝까지 상냥하고 사려 깊었다.
거기에 그는, 자존감 낮은 저를 향한 걱정 또한 잊지 않았다.
‘윤 대리가 뭐 때문에 스스로를 수준 이하라고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주변인들의 시선 따위 때문에 스스로를 위축시키진 말았으면 좋겠어요.’
‘윤 대리의 예쁜 겉모습도 물론 좋았지만, 난 그보다도 항상 열심인 윤다경의 모습이 좋았던 거거든.’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항상 열심인 내 모습이라.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열심히 일했는지도 의문이었으나, 만약 남들 눈에 그렇게 비쳤다고 하더라도 안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성실함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저 같은 건 평범의 범주 속에 발조차 디딜 수 없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입사해, 나이 어린 동기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랜 눈칫밥과 알바 생활로 이골이 난 사회성으로 비비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야, 이미 늦어버린 시작점에서 그 이상 도태되지 않고 남들 꽁무니라도 쫓아갈 수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