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참··· 미치겠네.”
도하의 단단한 의지 앞에서 더는 회유할 의지를 잃은 정운이 답답한 듯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아픈 가시밭길을 택하는 도하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도 알고는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놓지 못하는 인연이라면, 제대로 된 끝을 보기 전까진 절대 후련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 한 번 알아볼게, 내가.”
“고마워, 삼촌.”
마지못한 정운의 답에 도하가 씁쓸히 입가를 당겨 웃었다. 상념이 너울지는 까만 눈이 짙푸른 어둠 속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은 도하의 진심이 정운은 안타까우면서도 어딘지 자꾸만 불안하다.
다 비우고도 차마 버리지 못한 캔이 그의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13. 좋은 여자
“불금이다아~!”
미애가 두 팔을 하늘로 쫙 펴며 외쳤다. 힘찬 목소리가 점심시간의 사내 로비를 경쾌하게 울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 과장이 대번에 미애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불금이면 뭐해? 소식 못 들었니? 오늘 우리 팀 회식 잡힌 거.”
“회식이요? 뭐야, 뜬금없이 웬 회식?”
“메신저 좀 제때제때 확인해라. 신임 팀장 들어오고 여태 환영회도 안 했잖아.”
“맞다, 환영회!”
그제야 미애가 휴대폰을 꺼내 들어 단톡방에 올라온 주간 일정을 확인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깜깜무소식이었던 다경도 뒤늦게 공지를 살폈다.
5시 20분까지 우사돈이라.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내용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냥 회식이면 정색했을 텐데, 우리 권 팀장님 환영회라 봐줬다~!”
“어련하시겠어? 왜, 축하 선물이라도 준비하지 그래?”
“전 백 번이고 그러고 싶지만 우리 팀장님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심 어떡해요?”
“우사돈이면 소고기집이죠? 오오- 웬일이래. 비싼 소고기를 다 쏘고?”
함께 커피숍으로 이동 중이던 은영이 장소를 체크하곤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마케팅2팀의 소식통인 송 과장이 정보 하나를 던져주었다.
“부장님이 권 팀장 숙부가 권현준 전무님이란 소스 접하고 아주 껌벅 죽는다더라.”
“아, 권 전무님이면 그 부회장님 직속 라인 아니에요? 권 팀장님 집안 좋다더니 그게 그렇게 연결된 거였네.”
“우와, 우리 팀장님 진짜 금수저 맞았구나?”
“남의 수저 색까진 관심 없고. 덕분에 오랜만에 배때지에 기름칠 좀 하겠다!”
송 과장이 저녁 시간에 고기를 영접하게 될 배를 달래듯 양손으로 문질렀다.
회식이라니. 모두가 소고기네 뭐네 하며 들떠 있는 속에서, 다경은 홀로 근심이 가득했다.
회사에서 보건 밖에서 보건, 불편한 얼굴을 계속 보고 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이토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는 바로 며칠 전의 그 일 때문이었다.
도하가 준비한 생초콜릿 하나를 순순히 받아먹지 않고 그와 제 가슴에 괜한 생채기를 냈던 일.
“어? 팀장님이시다.”
막 카페 안으로 들어선 찰나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리 권 팀장님이 호랑이만큼 근사하긴 하죠. 안녕하쎄요, 팀장니임!”
대놓고 팀장의 팬이라 자처한 미애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자네 팀원들 아냐?”
카페 통유리 벽면 옆에 앉아 이야기 중이던 그의 일행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인사 좀 해줘.”
마케팅2팀인 걸 알아본 경영지원부 팀장이 웃으며 도하를 향해 눈짓했다. 그제야 서류를 넘기던 그가 힐끗 눈을 돌려 직원들 쪽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끄덕,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무심히 되돌아가려던 눈이 그 속에 섞여 있는 다경을 발견하곤 잠시 멈칫했다.
그가 돌아볼 것을 짐작지 못하던 다경이 깜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돌린 옆얼굴로 찌를 듯이 박혀오는 눈빛에 심장이 따끔거린다.
며칠 전 그 일이 있은 후 급격히 어색해진 터라 짧게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상태로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까지 같은 공간에 있을 걸 생각하니, 다경은 목이 콱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방해 안 할 테니 일 보세용, 팀장님!”
“하하. 2팀 직원들이 아주 빠이팅 넘치네. 권 팀장.”
살가운 인사를 끝으로 돌아서는 직원들을 보며 경영지원부 팀장이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다경은 돌아서는 일행에게 이끌려 그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뭐 마실까?”
하필 거리가 가까워 신경이 쓰였으나, 다행히도 그는 그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느새 다시 경영지원부 팀장과의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계산이고 뭐고 관두자, 오늘은. 더는 못하겠다, 나도.’
그렇게 도하의 집에서 돌아온 날 이후. 그로부턴 더 이상 사적인 연락이 오지 않았다.
밥을 먹자는 말도, 남은 계산을 하자는 말도 없었다.
어쭙잖은 수작으로 당황케 하던 요 며칠과는 달리, 둘 사이에는 철저히 사무적인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어쩌면 질린 것일지도 모른다. 저였더라도 질렸을 테니까.
어떤 호의를 베풀건 사사건건 부정적으로 받아치는 제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못돼먹은 말만 지껄이는 저 같은 자격지심 덩어리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일이겠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권 팀장님은 나이스 하시네요.”
한 테이블 건너 앉은 도하의 일행을 보며 미애가 호들갑을 떨었다.
“일 좀 빡세면 어때? 눈호강을 이렇게나 하는데.”
“저 이완용. 또 시작이다, 또.”
못 말리겠다며 혀를 내두른 송 과장이 지갑을 꺼내 들며 물었다.
“곧 있음 점심시간 끝난다. 윤 대리는 뭐 마실래? 내가 오늘 우리 아들 돼지저금통 턴 기념으로 커피 쏘려는데.”
“아니! 무려 돼지저금통을 터셨으면서 꼴랑 그걸로 퉁치시려구요? 고기쏴, 짝! 고기쏴, 짝!”
“와, 이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날강도를 봐라. 너 엊그제 적금 만기 됐다면서, 뭐 쐈어? 어? 오늘 회식 자리 가서 골든벨 한 번 울려 볼래?”
적금 그거 타봤자 원룸 보증금 값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너무 한다며 곡소리를 내는 미애의 말을 듣고 다경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제가 이쯤에서 저지해줘야 할 모양이다.
“전 그냥 시원한 아메리카노 마실게요, 과장님.”
“그럼 전 달달한 바닐라 라떼 아이스요~.”
“에이, 대리님들. 더 비싼 거 드시지. 전 그럼 휘핑크림 잔뜩 올라간 자바칩 프라푸치노에 샷 한 잔 추가요!”
“자바칩이 뭐 어쩌구 저째? 제왕절개 하고부터 기억력 딸려 죽겠는데, 따라와서 네 입으로 직접 말해!”
결국 같이 앉아 있던 세 사람이 함께 카운터 쪽으로 끌려가면서 소란이 조금 소강 되었다.
다경이 활기찬 세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무심코 돌린 눈에 잡힌 낯익은 옆모습을 보곤 나직이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까진 말하지 말걸.’
며칠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상처 받은 눈이 가슴을 문득 짓눌렀다.
도하의 집 주방에 홀로 남겨진 순간부터 사실 후회했다.
구질구질하다고. 홀가분이라고.
부러 독한 말만 골라 내뱉었지만, 진짜 구질구질한 건 그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걸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제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야말로 구질구질함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차피 바뀌지 않을 현실 앞에서 너와 난 또 상처받게 될 테다.
어쩌면 너의 그 억지에 휘둘려 주는 이 순간이 너에겐 또 다른 희망 고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나마 네 체온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에 자꾸만 합리화를 하게 된다.
이로써, 너에 대한 부채감을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이로써 네가 내게 남은 미련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고.
“요즘 경영권 승계 때문에 회사가 어수선하다면서요?”
주문을 마친 세 사람이 진동벨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짧은 사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 관련 이야기로 화두가 바뀐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얘기 들었어. 회장님 건강은 날로 안 좋아지시는데, 차기 경영권자가 딱 정해져 있질 않으니까 그렇다더라.”
“아니, 재벌가에서 후계자야 뻔하지 않아요? 어차피 집안싸움이면서.”
“그 집안싸움 때문에 시끄러운 거지. 다들 알다시피 부회장님 자식 관계가 영 그렇잖아.”
“왜요? 지금 백화점 사업 관리하고 계시는 차 본부장님이 대표이사 쪽으로 물망에 오른 거 아니었어요?”
“능력으로 보면 그런데, 알잖아. 차 본부장님 서자인 거.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RS그룹이 어떤 그룹인데 그런 모계를 받아들이겠어?”
“왜, 모계가 어때서요?”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정보가 어두운 미애가 귀를 쫑긋 세우며 질문을 얹었다.
“서자라면 뭐 본부인 자식이 아니다, 그건데. 어차피 재벌가에 그런 일이야 흔하지 않아요? 본부장 자리까지 앉혀 놨다는 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뜻 아닌가?”
“아, 자기 모르는구나. 차 본부장님은 서자인 게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젠데요?”
주변 눈치를 보는 듯하던 은영이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히 속삭였다.
“친모가 텐프로 출신이거든.”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