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잘 찾아왔네? 난 또 공항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런 비아냥과 삐딱한 성정은, 어쩌면 제 모친으로부터 일부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왜, 한국 들어오고 한 1년쯤 있다가 오지 그랬니? 조만간 호적에서 파버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50대 중반임에도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있는 외향과는 도무지 어울리질 않는 유치한 멘트였다.
“아무리 모자지간이라도 너무 식상한 협박인 건 아시죠? 한국에 불러들이실 때 이미 써먹으셨으면 양심상 레퍼토리 한 번은 바꿔주셔야지.”
가로막듯 버티고 선 어머니를 지나치며 도하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잖아. 호적 판단 소리에 들어와 놓고, 어쩜 온다 간다 연락 한 번이 없어?”
“바빴다니까요.”
바쁘다고 하면 다냐며, 등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으나 그 이상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이유를 들먹여봤자 서운함이 턱밑까지 차오른 어머니에겐 그저 궁색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사실 어머니가 저토록 서운해하는 것도 내심 이해는 됐다.
10년 전 유학길에 오른 뒤로 집에 온 날도 양손으로 꼽을 정도인 아들이, 정작 들어오고도 보름을 감감무소식인 채로 지냈으니. 당장에 빌라로 쫓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그래놓고 오늘 온 것도 결국 부모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아신다면, 아마 진짜로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하실지도 모른다.
“어쩜, 자식 하나 있는 게 저 모양인지 몰라.”
“하나라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나 같은 놈이 둘이었음, 우리 신 여사 그 고운 얼굴에 주름살만 두 배로 늘었지.”
“뭐어?”
“여기, 그래서 준비한 우리 여사님 선물.”
밉살맞은 말만 골라서 하는 아들을 마뜩잖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친의 품에 도하가 덥석 종이백을 안겨주었다.
“쓸데없이 이런 건 뭐하러 챙겨?”
쓸데없다면서도 내내 역정이 나 있던 목소리가 한풀 꺾인다.
“돈이야 우리 여사님이 더 많고 잘 쓰시지만, 그냥 오긴 섭섭하니까.”
빙글 웃으며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한적한 집안을 둘러 보며 물었다.
“아버진, 집에 안 계세요?”
“네 아버지야 항상 바쁘지. 곧 있음 총선이잖니.”
재단 일만으론 영 심심했는지, 최근 아버지는 정치판에도 발을 얹었다. 지역의 오랜 유지인데다가 신망도 두터워 의원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었으나, 제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아니라 별 관심은 없었다.
“작은아버진 종종 뵙고?”
어느 사이에 준비한 건지. 삼과 우유를 갈아 꿀을 넣은 잔을 아들 앞에 내밀며 모친이 물었다.
“아뇨. 발령 첫날 인사 한 번 드리고 그 뒤론 못 뵀어요. 부서가 다르기도 하고, 대외 활동을 많이 하시다 보니까 아무래도 얼굴 뵙기가 쉽지 않아서.”
“많이 바쁘신가 보네. 나라도 한 번 가서 인사 드려야 하는데···.”
“여어, 오랜만이네. 우리 조카!”
모친과의 밀린 담소를 주고받던 중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렸다.
“어휴, 면도나 좀 하고 내려올 것이지.”
올려다보자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외삼촌의 얼굴이 보였다.
나이는 대체 어디로 먹는지 도무지 마흔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입국한 날 바로 서울에서 같이 한잔해 놓고선, 오랜만이라니. 아무튼 저 천연덕스러운 연기력은 알아줘야 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우리 금쪽같은 조카님!”
삼촌의 연기에 피식 웃고 있는 조카를 덥석 끌어안은 그가 도하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이 마지노선이었어, 인마. 저 양반, 내일 네 빌라로 쳐들어갈 작정이셨다고.”
저녁 준비를 하겠다며 식당으로 건너가는 모친을 눈짓하며 삼촌이 생색내듯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전갈을 듣고 더 늦기 전에 달려온 것이었다. 행여나 다경과 있을 때, 모친이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까.
물론 저만 보면 여자 좀 만나라며 성화인 양반이라 제게 여자가 있는 걸 알면 쌍수 들고 환영할지 모를 일이지만, 다경은 다를 테다.
안 그래도 도망갈 궁리만 하는 입장인데, 그 상황에 제 모친이라도 마주친다면 아예 졸도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랜피딕 30년산 들고 왔잖아.”
소파에 놓아둔 술병을 눈짓하자 삼촌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돈다.
“역시, 우리 조카님은 예의를 알아!”
“하여간 기브앤테이크는 확실하시지.”
그렇게 말하곤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 집안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게 바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이 외삼촌이었다.
10년 전, 제가 윤다경을 잃은 절망에 엉망으로 무너졌던 때에도 정신 빠진 놈 취급하는 부모 대신 유일하게 위로를 건네주었던 사람.
“얼른 와서 밥 먹어!”
식사 준비를 마친 모친의 경쾌한 음성이 너른 집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외삼촌과 옥신각신하며 주방으로 들어서자 한 상 걸게 차려진 저녁 식사가 눈에 들어왔다.
“와아- 역시 아들이 오니까 올라오는 메뉴들이 달라지네.”
몸보신에 좋다는 문어 숙회부터 고기까지.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밥 다운 밥상이었다.
“만나는 여자는 있고?”
뽀얀 국물이 우러나온 해신탕에 막 숟가락을 담근 무렵이었다.
“너도 슬슬 여자도 만나고 그래야지.”
잘 구워진 떡갈비 한 조각을 앞접시에 놓아주며 모친이 말했다.
“누나는 엊그제 한국 들어온 애한테 무슨.”
옆에 앉아 같이 한술 뜨던 삼촌이 그 대신 혀를 내두른다.
“엊그제 한국 들어온 거랑 연애 사정이 무슨 상관인데? 네 조카까지 너랑 같은 꼴로 만들 생각 있니?”
“아, 왜 또 가만히 있는 날 갖고 난리야?”
괜히 애꿎은 삼촌만 모친으로부터 한 소리를 들었다.
외국에 있던 저를 불러들인 부모의 목적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경과 그렇게 되고 정신 못 차리는 아들을 등 떠밀 듯 외국으로 보내긴 했으나, 부모 또한 제가 마음을 잡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몰랐을 터였다.
때문에 일단은 하고 싶다는 대로 내버려두었지만 제가 혼기에 가까워지자 슬슬 조바심을 냈다. 특히 그에게 극진했던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쯤 들어올 것인지, 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계속 그러고 있으면 모친께서 이참에 저 있는 곳으로 오겠다 반협박을 하기에, 같이 살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올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한국행을 결정했을 당시만 해도 정말 도살장 끌려오는 개가 된 심정이었는데···.
만약 그때 미국에 있길 고집했더라면 아직까지 윤다경의 코빼기조차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자 문득 머릿속이 아찔해진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넌 여전히, 내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구나.
“아직은 회사 일이 바빠서요.”
남몰래 자조 섞인 웃음을 삼키며 모친의 성화에 대꾸했다.
“좀 정리되면 생각해 볼게요.”
빤한 핑계와 진정성 없는 미소를 끝으로 그가 대화를 갈무리했다.
“그래~. 급할 거 없으니까 쉬엄쉬엄해~.”
“넌 좀 조용히 해!”
눈치 없이 말을 얹는 외삼촌의 옆구리를 모친이 젓가락 끝으로 쿡 찔렀다. 그러고선 차마 그 이상 말은 못 하고 착잡한 눈으로 힐긋 아들을 바라본다.
과연 저 복잡한 마음이 정리될 날이 오기는 할는지.
도하가 걱정스레 건너오는 시선을 모른 척 피한 채, 마저 젓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집에 오고서도 떨쳐내지 못한 말간 얼굴이 가슴 끝을 자꾸만 짓누르고 있었다.
* * *
식사를 마친 뒤 외삼촌과 함께 2층 테라스로 올라왔다.
맴맴― 집 앞마당에서부터 올라온 우렁찬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스럽게 공기를 울린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남풍이 좀처럼 차가워지지 않는 이마를 휩쓸고 그의 주변으로 흩어졌다.
여름이구나.
한국에 들어온 며칠간 계절을 가늠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흘려보냈는데, 윤다경이 눈앞에서 멀어진 지금에서야 겨우 앞이 좀 보이는 것 같다.
“회사는 좀 어때.”
칙― 경쾌한 소리를 내며 거품을 뿜어낸 맥주캔이 도하의 앞으로 턱, 하고 놓였다.
“미국에 있을 때랑은 그래도 방식이 좀 다를 텐데.”
“뭐, 일하는 거야 다 똑같지. 그럭저럭 할 만해. 진상 꼰대들 상대하는 게 좀 피곤한 것 빼곤.”
삼촌으로부터 건네받은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도하가 선선히 답했다.
“그나마 다행이구만.”
비교적 잘 적응 중인 것 같은 조카의 대꾸에 한시름 놓으며 정운 또한 캔을 입가에 기울였다.
둘은 도하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테라스에 앉아 담소를 나누곤 했었다.
즐겨 하는 게임에 관한 이야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이사장 아들로서 겪어야 했던 저 나름의 고민까지.
난생처음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는, 부모에겐 차마 말 못 할 고백을 처음 한 대상도 바로 외삼촌인 정운이었다.
누나인 어머니의 온화한 성품을 닮아 사려 깊은 그의 삼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비 대신 저의 든든한 상담자가 되어주었고, 그래서 도하는 가끔 견딜 수 없이 힘이 들 때면 그를 찾아와 제가 가진 고민을 토로하곤 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그렇게 집에 좀 들러라 잔소리 해댈 땐 꼼짝 않고 버티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