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98)

 33화.

 “자꾸 나 똑바로 안 보고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면서, 없기는 뭐가 없는데!”

 흡사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거친 음성이었다.

 턱이 붙잡힌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는 다경의 눈자위가 어지럽게 너울거렸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답은 하나뿐이다.

 내가 그런 것들을 누릴 주제가 못 된다는 것.

 권도하도, 그가 제게 주는 이 마음들도. 시궁창을 벗어날 수 없는 제겐 그저, 누리고 나면 언젠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주제에 안 맞는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그것을 이 오랜 시간 동안 혼자만 모르고 있는 넌, 평생 이 속을 알 리가 없겠지.

 “권도하.”

 넘쳐흐를 것처럼 출렁이는 감정을 꾹 삼켜 넣고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난 너랑 하나만 하고 싶어.”

 하나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하나밖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터질 것 같은 진심들을 꽉꽉 눌러 담은 채 초연히 그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남은 계산 정리. 그게 나한텐, 지금 우리가 마주 보고 있는 이유의 전부야.”

 “하. 누가 너더러 뭘 더 하재?”

 어이없다는 듯 웃은 도하가 붙잡고 있던 턱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래, 하나만 해. 하나만. 연애니, 뭐니. 그 이상은 너한테 감히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정말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데. 문드러져 가는 제 속은 모르고 태평한 소리만 내뱉는다.

 “단지 난 그냥, 네가 이거 좋아했던 게 생각이 나서. 10년이 지난 널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 이거라도 주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그러니까 내가 좋아했던 거, 내가 했던 말!”

 결국, 둑을 넘고 흘러버린 감정이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쓸데없는 것까지 다 끄집어내서 구질구질한 추억팔이하지 말고, 그냥 할 거만 하고 빨리 끝내자고 제발!”

 울분을 쏟아내듯 소리를 지른 다경이 격하게 씨근거렸다.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날이 선 눈동자가 그 앞에 선 가슴을 엉망으로 그어낸다.

 “···구질구질하다고?”

 평정을 잃은 도하의 눈이 파도에 떠밀린 부표처럼 어지럽게 일렁였다.

 “그래. 구질구질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며 다경이 한숨처럼 말했다.

 “난 그래.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이 찝찝한 계산,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좀 편해지고 싶어.”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을 좀 더 아프게 할 수 있을까,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을까 궁리한 사람처럼 못돼먹은 말만 골라 그 앞에 쏟아냈다.

 “안 그래도 매일 대출 이자며 월세며 빠져나가는 것도 지긋지긋해 죽겠는데, 너라는 생각도 못 한 복병 때문에 정말이지 매일매일이 지옥 같다고.”

 그녀 대신 허공을 쥐고 있는 큼직한 손아귀가 무언가라도 깨트릴 듯 꽉 조여들었다.

 “네가 날 옭아매려고 만든 그 계산,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완전히 홀가분해지고 싶어. 더는 마음 무거울 일 없게.”

 차갑게 그를 외면한 채 뱉어내는 시린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 한가운데로 내리꽂혔다.

 홀가분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그런 생각으로 이 섹스에 임하는 거라고.

 너만 보면 옛 생각이 나고 속이 끓어 죽겠는 난 안중에도 없고, 넌 그저 돈 오백이 주는 현실적 부채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라고. 씹.

 “그러게.”

 허탈한 실소가 기어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그런 너랑 내가 뭘 하겠다고.”

 구질구질하긴.

 자조 섞인 말이 꿈틀대는 목울대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착해진 음성과는 달리 돌연 이채가 돈 눈동자가 서늘히 다경을 직시했다.

 하나만 하고 싶다고 했던가. 저와 나 사이에 남은 계산, 그게 윤다경과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이유의 전부라고?

 그런 거라면. 정말 그 이유뿐이라면.

 “그래, 하자. 계산.”

 그 하나 남은 이유, 원 없이 이용해주지.

 “무슨···!”

 단숨에 거리를 좁혀온 그가 턱을 잡아 올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성큼 기울어진 얼굴이 다경의 시야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하읍···.”

 씹어 삼킬 듯 입술을 벌리고 혀를 비집어 넣었다. 피할 새도 없이 덮쳐든 숨결이 무작스럽게 호흡을 앗아간다.

 줄곧 감정을 감추는 중이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동시에 외설스레 혀를 얽으면서도 감지 않은 까만 눈이 시야를 매섭게 강탈했다.

 마치 산 채로 먹잇감을 집어삼키는 것 같은, 잔악하고도 탐욕스러운 눈이었다. 네가 뱉은 말의 의미를 똑똑히 알고 감당하라는 듯, 그가 올곧은 눈으로 그녀를 직시한 채 난잡스럽게 혀를 빨아댔다.

 “흣···.”

 집요하게 빨리는 혀끝을 타고 가냘픈 신음이 샜다. 뒤늦게 두 눈을 감아보지만 도리어 선명해지는 감각에 괴로움만 가중될 뿐이다.

 저도 모르게 옷깃을 움켜쥐고 만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덜컥, 그에게 떠밀려 위태로워진 몸을 아슬아슬하게 식탁에 기댔다.

 츳, 쯥― 빈틈없이 맞물리는 살점의 소리가 질척하게 공기를 갈랐다. 뜨겁지만 냉정한 손이 블라우스를 들추고 들어와 단숨에 브래지어를 풀었다.

 그가 말한 계산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케 하는 서늘한 해방감이 상반신을 덮친다.

 짓이길 듯 살덩이를 움켜쥐는 손아귀와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단단한 몸에서 저를 향한 그의 흉포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밀어낼까, 찰나의 순간 잠시 고민이 밀려들었으나 다경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하나만 하고 싶다고. 남은 계산을 마치고 하루라도 빨리 너로부터 홀가분해지고 싶다고 말한 게 바로 저였으므로.

 그러니 군말 없이 너의 욕정을, 화를 그저 받아내는 수밖에.

 “응, 흡···.”

 흐트러지는 숨결 사이로 일어서는 스스로를 향한 한심함이 명치 끝을 콱 짓누른다. 거칠게 입 안을 탐닉하는 호흡마저 원망스럽기는커녕 마음이 아렸다.

 이런 식으로밖에 받은 진심을 돌려줄 수 없는 스스로가 밉다. 그렇게 상처받고도, 제게 자꾸 미련을 품게 하는 도하 또한 밉다.

 이미 10년 전, 그토록 뼈저리게 느꼈으면서도. 어째서 너와 난 또, 이 아픈 도돌이표를 반복하려 하는 건지.

 “···말해 봐, 윤다경.”

 입 안을 엉망으로 헝클어놓는 숨결에 포기한 듯 순응하고 있는 얼굴을 붙잡고, 그가 읊조렸다.

 “진짜··· 아무 이유도 없어?”

 제게 물고 빨려 짓이겨진 입술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며 다그치듯 되물었다.

 다경이 하는 말들이 모두 진심이 아닐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독하게 뱉는 말과는 달리 순간순간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도무지 거짓말이라는 걸 할 줄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경은 이번 역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없어, 이유 같은 거.”

 앵무새 같은 소리만 반복한 채 입을 꾹 다물어버릴 뿐이다.

 말간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 한 줄기가 질끈 다물린 입술 위를 시리게 적신다.

 그 숨죽인 체념이 자꾸만 이성을 흐리고 머리를 돌게 한다.

 없다면서 울긴 왜 우는데.

 “그만 울어.”

 큼직한 손이 애처롭게 파들대는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텅 빈 유리알 같은 눈물이 새하얀 뺨을 그을 때마다, 제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겨우 이걸 보자고. 이렇게 우는 꼴이나 보자고, 오늘 내가.

 “씨발, 진짜 울고 싶은 게 누군데!”

 퍽! 둔탁한 마찰음이 다경의 등 뒤에서 터졌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초콜릿 케이스가 주방 귀퉁이 한구석에 엉망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어깨가 튀어 오를 정도로 동요하고도 애써 그를 외면한 다경이 억척스레 허공을 눈에 담았다.

 텅 빈 눈매 끝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도하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헝클어놓는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계산이고 뭐고 관두자, 오늘은.”

 결국 모든 전의를 상실한 그가 다경에게서 차갑게 손을 거두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나도.”

 오늘따라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체향이 시린 바람과 함께 다경의 옆을 스쳤다.

 흡, 하마터면 터질 뻔한 눈물을 가까스로 목 아래로 삼켰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한 울음이 깨물린 입 안에서 애처로이 맴돈다.

 차마 닿지 못한 진심만이 창백한 침묵 안에서 시리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 * *

 5년쯤 됐던가.

 오랜만에 마주하는 단단한 철제문이 그럼에도 여전히 익숙하다.

 높다란 성벽 같은 담을 바라보며 가벼이 한숨을 뱉은 도하가 벨을 누르곤 인터폰 너머에서 들려올 목소리를 기다렸다.

 ― 누구세요?

 “저예요.”

 당연한 듯 뱉어낸 그의 말에 이내 냉랭한 대꾸가 되돌아왔다.

 ― 저가 누군데?

 뭐 때문에 그리 반응하는 것인지 알기에 피식, 웃음부터 흘러나왔다.

 “죽여도 시원찮을 아들입니다.”

 ― 알긴 아네.

 냉소적인 한마디를 끝으로 철컥, 대문이 열렸다.

 괘씸죄를 물으며 뙤약볕에 세워두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건만 생각 외로 순순한 반응이었다.

 싱긋 웃으며 정원으로 들어서자, 달큼한 치자꽃 향이 뜨끈한 남풍에 휩쓸려 코끝을 감쌌다.

 녹음이 진 푸른 정원을 붉게 수놓은 배롱나무도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정원 가꾸기에 맛 들이시더니 여전하신 모양이네.

 까탈스러운 안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정원을 둘러보며 현관에 닿자, 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선 어머니가 냉랭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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