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입 안에 녹아 있던 달콤한 초콜릿이 얽히는 혀끝에서 끈적하게 뒤엉켰다. 도망쳐도 다시금 쫓아온 살덩이가 질기게 혀뿌리를 감아 당겼다. 흐윽, 가느다란 숨소리가 밀폐된 공간을 휘돌았다.
어떡하면 좋아, 정말.
한참 호흡을 뒤섞고도 당혹감에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하고 있을 때.
“눈감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끝으로 도하의 엄지가 닿았다.
“그렇게 봐도 못 멈춰, 이제.”
슬쩍 눈매 끝을 어루만지는 접촉과 함께 다시금 입술이 맞붙었다. 말캉하고도 뜨거운 감촉이 야릇하게 입 안을 가른다. 보다 짙어진 숨결이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마저 모두 증발시켰다.
아··· 이제 정말이지 모르겠다.
어지럽게 흔들리던 다경의 눈이 이내 포기하듯 꾹 감기고 만다.
열여덟 가을.
생초콜릿처럼 진하고도 달콤한, 첫 키스였다.
12. 아직도
왜 하필 그날의 일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다경은 쓸데없이 선명해진 옛 기억에 피로함이 역력하여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이래서 그의 집에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와 겹치는 현재의 상황은, 이렇듯 상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까지 선명하게 만들곤 하니까.
“들어와.”
주방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냈다. 다경이 이내 포기하듯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기억을 뒤로한 채 들어온 곳엔 한 상 걸게 차려진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집에서 볼 생각이었던 건가.
되도록 그와는 거리를 두고픈 저완 다른 도하의 태도가 오늘도 어김없이 숨통을 턱 쥐어온다.
“앉아, 빨리 먹고 가셔야지.”
그가 제 맞은편을 향해 짧게 눈짓했다.
밥만 먹는 자리라고, 몇 차례 약속 받던 말을 비꼬는 뉘앙스였다.
다경이 말없이 그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을 피력하듯 곧장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이해 되질 않았으나 더는 쓸데없는 논쟁을 할 여력조차 없었다.
뭐가 됐든, 얼른 하고 끝내자.
“···.”
도하가 조용히 밥술을 뜨기 시작하는 창백한 낯을 소리 없이 눈에 담았다.
도살장에 끌려온 개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다.
저랑 밥 한 끼 먹는 게 뭐 그렇게 죽을상을 할 일인지.
어차피 이런 반응일 걸 모르고 데려온 것도 아니면서, 어쩔 수 없이 속이 쓰리다. 그러면서 행여 저러다 그녀가 체하기라도 할까 봐 그건 그것대로 노심초사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럴 거면 애초에 그런 되지도 않는 억지나 부리지 말 것이지. 등신새끼.’
자조 섞인 욕설이 오늘따라 까슬하게 느껴지는 밥알과 뒤섞여 거칠게 입 안을 구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묻던 다경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가끔 저조차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윤다경을 향한 이 마음은 가지를 쳐내듯 쳐낸다고 해서 잘리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런다고 해서 네 마음이 나한테 되돌아올 것도 아닌데···.
잘 알면서도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미련이, 잡히지 않는 네 마음이. 가겠다는 널 억지로 붙잡아 놓은 지금도, 결국 서로를 아프게만 하고 있다.
* * *
식사 시간은 약속처럼 밥만 먹으며 조용히 흘러갔다.
사소한 대화나 눈빛조차 오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로의 앞에 놓인 음식들만 집어 올려 입에 넣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경이 주어진 소임을 다하듯 제 몫의 밥그릇을 비워냈을 무렵.
“커피 마실래?”
그에게서 건너온 물음에 다경은 잠시 말없이 두 눈을 깜박였다.
커피라니.
안 넘어가는 걸 꾸역꾸역 억지로 삼켰더니, 태평하게 같이 커피를 마시잔다.
“됐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하곤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러자 도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경은 문득 한숨이 새어 나왔다.
대체 여기 앉아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밥 한 끼로 퉁쳐주겠다는 말에 따라나선 것도, 결국 집까지 오고 만 것도. 하나같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선택들이었다.
‘애초에 그런 억지에 넘어간 것부터 물러 터진 거지.’
다경이 뭐가 얹힌 것처럼 답답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문질렀다.
도무지 권도하의 속이 읽히질 않는다.
성욕을 풀기 위한 섹스도 아니고, 이런 서로에게 고문과 다름없는 식사를 통해 대체 무엇을 얻겠다고 이러고 있는 걸까.
나아지지 않는 갑갑증에 물잔을 거머쥔 순간, 그녀 앞으로 툭 뭔가가 던져졌다.
“나 마실 동안 이거나 좀 먹고 있든지.”
무뚝뚝한 음성이 정수리 쪽에서 떨어졌다. 그와 함께 내던져진 갈색 상자가 다경의 시선을 잡아챘다.
그 순간 무표정하던 그녀의 낯이 그마저도 차게 굳었다.
도하가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생초콜릿이다.
10년 전, 처음 도하의 집에서 맛본 뒤로 그가 저를 위해 줄기차게 사다 날랐던 바로 그것.
“먹어, 좋아했잖아. 초콜릿.”
무심한 척 건네고 있으나, 결코 무심하게 받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대꾸 없이 케이스만 내려다보는 다경의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끝에 바짝 힘이 실린다.
미치겠다.
못되면서도 다정한 너 때문에. 밉다면서도 옛일을 추억하는 너 때문에. 그냥 잊어버려도 될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굳이 기억해 내서 내 마음을 들쑤시는 너 때문에. 정말이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대체 넌, 날 어디까지 뒤흔들 작정인데.
“커피 다 마시는 대로 바래다줄 테니까···.”
“안 좋아해.”
초콜릿을 건네놓곤 캡슐 머신 쪽으로 옮겨가던 도하의 손이 멈칫했다.
“이젠 안 좋아한다고, 단 거.”
고집스레 읊조린 다경이 앞에 놓인 초콜릿 케이스를 옆으로 탁 밀어버렸다.
순식간에 주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다경이 단호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더는 10년 전, 초콜릿 하나에 제 분수를 망각하던 어린 애가 아니다. 달달한 초콜릿 몇 개가 제 쓰디쓴 인생을 바꿔줄 수 없다는 걸, 10년 전 그날 이후로 뼈저리게 배우고 말았으니까.
“···.”
가만히 허공에서 손을 거머쥔 도하가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예상하던 반응임에도, 매번 그 이상 열 받게 하는 재주는 아무튼 알아줘야 했다.
이젠 안 좋아한다고. 구태여 그런 단서를 갖다 붙인 의도야 빤했다.
더는 불필요한 과거와의 연결고리 따윈 이 관계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선긋기일 테지. 이렇게나마 뭐 하나 연결해 보려 애쓰는 제 얄팍한 속셈을 간파하고.
그래서일까.
“몰랐네. 그새 취향이 바뀐 지는.”
유치한 오기가 그의 목젖 아래서 꿈틀거렸다.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람 입맛 바뀌는 거야 당연한가.”
그냥 그래, 하면 될 일에 목숨이라도 건 듯 고집이 섰다.
“그래도 준비한 사람 성의가 있는데 먹는 시늉이라도 하지? 어차피 너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거.”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윤다경 역시 저만큼이나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는 걸.
“그럼 그냥 버려.”
“···뭐?”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한 템포 늦게 빠져나온 목소리 끝이 거칠게 갈라졌다.
“내가 안 먹으면 버릴 거라며.”
다경이 초연한 얼굴로 제 자리를 정돈하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난 생각 없으니까 그냥 버리라고.”
네 성의 따윈 내가 고려할 대상이 아니라는 듯 냉정한 어조로 덧붙였다. 덕분에 오랜 시간 눌러 참던 화기가 결국 뒷목을 타고 올라오고 말았다.
“야, 윤다경.”
“그럼 나 먼저 좀 일어날게.”
“거기 서.”
“굳이 바래다줄 거 없어. 나 알아서 갈···.”
“아, 그냥 좀―!”
버럭 높아진 언성이 얼어붙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막 한 발을 뻗은 가느다란 다리가 붙박인 듯 멈춰섰다.
거친 목소리를 끝으로 찾아든 싸늘한 정적이 둘 사이를 매섭게 휘돈다. 시린 공기완 달리 화마에 휩싸인 머리는 녹을 듯이 철철 끓었다.
“너 뭐야, 대체.”
열에 들뜬 눈을 잠시 꾹 감았다 뜬 도하가 치솟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목소리로 차갑게 뇌까렸다.
“좋게 갈 수 있는 길 다 버리고 자꾸 삐딱선 타려는 이유, 대체 뭐냐고.”
낮지만 거친 목소리가 함께 하는 공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10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그 첫날부터, 줄곧 가진 의구심이었다.
왜 자꾸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며 내 속을 긁는 건지.
분명 눈빛은, 몸짓은, 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것 같지 않은데 저 예쁜 입술로 뱉는 말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나 차갑고 독한 건지.
혹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지.
10년 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인 건지.
날이 가면 갈수록 짙어지는 의구심에 하루에도 열댓 번씩 갑갑증과 화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추궁하듯 묻는다 하여 답해줄 윤다경이 아님을 알기에 참았다. 기다리다 보면 답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거 없어.”
“없기는, 씨발.”
억척스레 허공만 바라보며 지껄이는 답에 결국 속이 확 뒤집혀버렸다.
“없긴 뭐가 없어. 초콜릿 이깟 게 뭐라고 굳이 안 좋아한다고 유치하게 선 긋고. 10년 전 그 밤도 화대 받고 치른 거란 개소리나 하고!”
대화 내내 그를 외면 중인 턱을 붙잡아 돌리며 도하가 몰아세우듯 사납게 내질렀다.
“자꾸 나 똑바로 안 보고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면서, 없기는 뭐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