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98)

 29화.

 동시에 직전까지만 해도 사색이던 뺨이 돌연 붉어졌다.

 아무 짓도 안 하겠다 장담했음에도 그 뒤에 붙은 허락 없인 이라는 말이, 꼭 제가 허락한다면 그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야릇한 뉘앙스로 들렸기 때문이다.

 “···누가 허락 따윌 한다고.”

 다경이 상기된 얼굴을 숨기듯 돌렸다. 정수리 위에서 한 번 더 짓궂은 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안심하라고. 도도하신 댁께선 절대 허락 안 하실 거니까.”

 머리 위를 덮도록 커다란 손이 다경의 가지런한 정수리를 작게 헝클어놓았다.

 장난스러운 듯 다정한 손길에 괜스레 귀 끝이 후끈거렸다.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넘긴 손에 방금 제 머리에 닿았던 도하의 온기가 엉키는 듯했다.

 아무튼 저 속 편한 변태는, 내가 왜 망설이는 줄도 모르면서···.

 “들어가게, 그만.”

 구차하게 느껴질까 봐 차마 입 밖으로 이유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도하로부터 손목이 당겨졌다. 방심하던 차 마당을 딛고 만 발끝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마음을 불편케 했다.

 정말 이대로 따라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당당히 앞을 나아가는 뒤통수를 보면서도 다경은 도무지 가슴이 편해지질 않았다.

 잘 가꾸어진 정원도, 입구부터 대리석이 깔린 화려한 현관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도하야, 있잖아.”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붙잡힌 손목에 힘을 준 찰나.

 “도하 왔니?”

 집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주방 쪽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한 실루엣이 시야에 시리게 들어왔다.

 동시에 다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딱 보기에도 도하와 닮아,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 피할 수 없이 둘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로, 권도하의 어머니.

 “집에 계셨어요?”

 손발 끝에서 빠르게 핏기가 가신다.

 늦기 전에 나가려고 했는데, 그럴 새도 없이 마주치고야 말다니.

 “나가신다면서요?”

 “나가려다가 네 전화 받고 다시 들어왔지.”

 어느덧 바로 앞까지 가까워진 목소리를 듣곤 다경은 등허리가 뻣뻣하게 곧추섰다.

 “우리 아들이 웬일로 집에 친구를 다 데리고 온다는데 어떻게 그냥 가니?”

 오가는 대화에도 도무지 집중이 안 되고 정신이 산란했다.

 “뭐하러 그러세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시라니까.”

 심드렁한 아들의 답에 싱긋 웃은 눈동자가 곧 그 옆자리로 옮겨 닿았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 냉큼 고개를 숙인 다경이 그녀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윤다경입니다.”

 에코백을 쥔 두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솟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든 순간, 어떤 눈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10여 년간 다방 마담의 딸로서 살아오며 뼈저리게 경험해 온 것들이 있었기에.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런 어색한 인사 또한 엄격한 잣대를 지닌 상대에겐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비칠 수 있을 테니까.

 그만 고개라도 들자.

 “윤다경.”

 눈치를 살피던 끝에 막 허리를 세운 순간, 불현듯 이름이 불리었다.

 청아한 목소리를 타고 퍼져 나온 제 이름 석 자가 낯설다 싶을 만큼 생소했다.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네요.”

 때마침 정면을 향한 시선에 예상 밖의 다정한 눈이 온화한 빛을 띠며 맞닿았다.

 “···네?”

 “안 그래도 얘기 많이 들었는데.”

 상냥한 웃음이 외려 낯설어 다경은 문득 제 눈이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지금··· 도하 어머니께서 날 보고 웃으신 게 맞나?

 “어디서요?”

 도하가 의아한 얼굴로 제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어디긴.”

 장난칠 때의 권도하처럼 한쪽 입매만 가늘게 말아 올린 그녀가 힐긋 아들을 돌아보았다.

 “학교를 그렇게 떠들썩하게 다녀놓고 네 엄마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니, 아들?”

 나긋한 어조에 은근한 놀림이 묻어나 있었다. 권도하가 아, 하고 시선을 돌리며 멋쩍은 제스처를 취한다.

 그와 함께 잠시 긴장이 풀렸던 다경의 얼굴에도 다시금 불편함이 엄습했다.

 그녀가 들었다는 말들이 결코 좋은 뜻으로 전해졌을 리 없다는 걸 제가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떤 내용으로, 어떤 정보들과 함께 그녀의 귀에 닿았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러니까 누가 말한 건데요. 정훈 삼촌?”

 “네 외삼촌이 말할 사람이야? 보는 눈이 몇인데.”

 쯧, 혀 차는 소리에 백을 거머쥔 손아귀로 다시금 힘이 실렸다.

 지금이라도 바쁜 일이 생겼다고 하고 그냥 나가버릴까. 치열한 갈등이 발아래서 넘실댔다.

 그조차 본데없고 예의 없다 여기시려나. 정말 어떡하면 좋지.

 차마 앞을 볼 용기가 안 나서 애꿎은 입술만 씹고 있던 순간.

 “어떤 친굴까 계속 궁금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좋네요.”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담은 채 나부대던 눈이 기품있는 홈드레스를 거슬러 올라와 그녀와 맞닿았다.

 “우리 아들이 왜 그런 소란을 떨었는지, 이해도 되고.”

 나붓하게 휘어든 눈매가 움츠려 있던 가슴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다경은 문득 목울대가 시큰거렸다.

 이 집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분명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저를 맞이하리라 확신했었다.

 주방에서 걸어 나오는 도하의 어머니를 볼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처음 마주쳤던 그 눈빛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주듯 따사로운 눈빛에 불안감으로 일렁이던 다갈색 눈이 얕게 흔들렸다.

 “아, 엄만 자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멋쩍은 표정의 도하가 무뚝뚝한 어조로 툴툴댔다.

 “왜? 새삼 쑥스러운가 보다, 아들?”

 “···하, 쪽팔리게 진짜. 야, 윤다경. 가자!”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몸을 확 계단 쪽으로 돌려버렸다.

 그런 아들을 보곤 쿡쿡 웃은 도하의 어머니가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고 서 있는 다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불편해 말고 어서 가 봐요. 난 먹을 것 좀 챙겨서 곧 올라갈 테니까.”

 상냥한 말과 함께 에코백을 쥔 채 잔뜩 경직되어 있는 가느다란 팔을 작게 토닥여 주었다.

 그제야 다경은 줄곧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겪고도 믿기지 않는 반응에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처음이었다.

 ‘윤다경? 아, 그··· 화 다방··· 큼.’

 제 이름을 들은 친구의 부모님이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은 채 저를 반겨준 것은.

 ‘마담 딸이라더니 분위기가 영 그렇네. 어린 애가.

 두려움을 품고 마주한 상대의 눈에서, 저를 향한 경멸과 멸시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그 어떤 어른들도, 하다못해 선생님들마저도. 제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가정사에 불편한 기색을 쉽게 숨기지 못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좋네요.’

 정말 이분이 날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다른 이도 아니고, 권도하의 엄마가.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거기 서서 뭐해? 가자니까.”

 하마터면 눈물이라도 고일 뻔한 눈자위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도하의 채근에 가까스로 추슬러졌다.

 고개를 들자 어느 틈에 계단을 타고 올라간 도하가 까딱 2층을 향해 턱짓했다.

 “그만 멍 때리고 올라와. 수능 100일도 안 남은 수험생이 군기 빠져 가지곤.”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는 미소가 제 어머니와 똑 닮아있었다.

 덕분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마지막 바리케이트마저 무너져버렸다.

 넌 대체 왜, 나 같은 걸 좋아하는 걸까.

 항상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궁금증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아무래도 네 어머니에게 있었나 보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저런 부모님 아래서 나고 자란 너라, 이렇게 결점투성이인 날 좋아해 줄 수 있었나 보다고.

 “갈게.”

 5분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인사 속에서 느낀 온정을 곱씹으며, 다경은 비로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도하에게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갈 수 있었다.

 * * *

 익숙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막 문제 하나를 풀었을 무렵, 도하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공부할 땐 당 충전이 필수잖아요.”

 접시를 내려놓는 손짓마저 기품있고 우아한 그녀가 상냥히 웃으며 다과를 챙겨주었다.

 달그락, 소리조차 내지 않고 놓인 고급스러운 접시엔 쿠키니, 초콜릿이니 하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류가 소담히 담겨 있었다.

 “이 초콜릿은 잘 녹으니까 가급적이면 빨리 먹고.”

 “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포크로 콕 찍어 건네주는 초콜릿을 다경이 양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도하 너, 다경 학생 귀한 시간 뺏기지 않게 집중해.”

 “시간을 뺏다뇨. 얘만 수험생인가? 엄마야말로 자꾸 올라오심 얘 신경 쓰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아무튼, 녀석. 말하는 것 좀 봐.”

 서로 툴툴대지만 격 없는 애정이 묻어나는 대화였다. 지켜보는 다경의 입가로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

 아들을 흘겨보던 그녀가 이내 다경을 향해 상냥히 당부했다.

 “더는 안 올라 올 테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먹을 거 먹어 가면서 쉬엄쉬엄 공부해요.”

 “감사합니다.”

 다경의 등을 한 번 작게 토닥여 주는 것을 끝으로 그녀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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