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98)

 28화.

 그런데 예기치 못하게 며칠을 연달아 못 돕게 생겼으니, 홀로 주방에 가 일하고 있을 엄마가 떠올라 마음이 쓰일 수밖에.

 [오늘도 좀 늦을 것 같아. 장 볼 거 있음 미리 문자로 넣어줘요.]

 메시지를 보내곤 나직한 한숨과 함께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러시아워 탓에 느리게 흘러가는 바깥 풍경이 상념에 젖은 시야에서 가물거렸다.

 이 시간대에 넉넉한 너비의 시트에 앉아 느끼는 이 고요는, 매일을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한 사람들 틈에 끼어 집으로 향하는 그녀로선 좀처럼 느껴볼 일 없는 안락함이었다.

 두 모녀가 밤낮으로 일해도 여전히 녹록지 못한 삶은 이처럼 이 나이대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몇몇 것들을 당연시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다경은 지금의 제 삶에 비교적 만족했다.

 대출 이자니, 월세니 하는 것들에 매일매일 쫓기는 삶을 살면서도 적어도 남들에게 떳떳하지 못할 이윤 더 이상 없었으니까.

 물론 뒤늦게 청산한 과거가 더는 제 발목을 잡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지만, 욕심을 버리면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며칠 전, 그렇게 권도하와 회사에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어딜 가는 거야?”

 정해진 약속대로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당연히 외곽으로 빠져 식당으로 향하리라 생각했던 차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들어섰다.

 “집.”

 묵묵히 앞을 응시한 채 운전하고 있는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집이라니.

 “밥만 먹자고 했잖아.”

 약속과는 다른 행보에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근데 집엔 왜.”

 “거기가 제일 보안이 좋으니까.”

 밥을 먹는 것과 보안이 무슨 관계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뱉은 답이 더 빨랐다.

 “지금 이 시간엔 어느 식당을 가든 사람들 눈 피하기 어려워.”

 새카만 세단이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 사이를 매끄럽게 통과했다.

 “식당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누구 눈에 띌까 봐 제대로 젓가락질도 못 하겠지, 넌. 팀원들이 너랑 내 사이 눈치라도 챌까 봐 회의 중에도 눈 한번 제대로 안 마주치는 게 바로 너니까.”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한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인사기록만 들춰봐도 저희 둘이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혹시나 그 정보가 다른 이들에게 퍼져 괜히 수상한 낌새라도 풍겼다간, 불편한 구설수를 면할 수 없을 게 뻔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권도하는 주변인들의 시선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일개 사원일 뿐인 제 처지는 그완 엄연히 달랐으니까.

 만약 나도 너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이런 걱정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려나.

 “그래도 집은 싫어.”

 “왜 싫은데.”

 무미건조한 반문에 그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집이 싫다기보단, 집처럼 서로의 일상에 불필요하게 침범하게 되는 상황이 싫은 것이었다.

 끝이 정해진 사이에 서로를 떠올릴 만한 것들이 자꾸 늘어나는 건, 그것대로 후회를 야기할 뿐이니까.

 10년 전, 너로부터 너무 많은 걸 받고 또 내어주고 말았던 마음들이 지금에 와서 두고두고 서로를 할퀴는 상처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런 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한숨을 삼킬 즈음 그가 물었다.

 “내가 밥 먹고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비꼬는 게 분명한 말투에 다경이 발끈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

 “걱정 마. 오늘은 너랑 떡 안 쳐.”

 그가 묵묵히 운전대를 움직이며 말을 덧붙였다.

 “너 스스로 홀딱 벗고 달려든다면 또 모르겠지만.”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 내가 너한테 왜!”

 “그러니까 괜히 쫄지 말고 긴장 풀라는 말이야. 밥 한 끼로 퉁치기로 한 약속 어길 생각 없으니까. 내가 또 누구랑은 달리 계산 하난 확실하거든.”

 얼굴이 화끈거린 것도 잠시, 이어진 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교묘하게 저를 책망하는 듯한 그 말이 명치 끝을 불편하게 짓눌렀다.

 다경이 가만히 아랫입술을 이로 물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제가 물러설 자리를 없애버린 채 조여오는 그의 화법이 그녀는 싫었다.

 줄기차게 거절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오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냥 열 번의 섹스로 끝내면 그뿐일 관계에, 넌 왜 자꾸 오늘처럼 이런 불필요한 요구사항들을 덧붙이는 건지.

 “꼭 이렇게까지 해서 같이 밥을 먹어야겠어?”

 “어, 먹을 거야.”

 유연하게 돌아가는 핸들을 따라 움직인 차가 건물 중 유독 우뚝 선 빌라 주차장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안 하면 윤다경 너랑 밥 한 끼 먹는 게 하늘의 별따기니 별수 있나. 아쉬운 쪽이 알아서 기어야지.”

 그 제멋대로인 태도의 어디가 대체 알아서 기는 사람의 태도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완고한 옆얼굴과 마찬가지로 이미 건물 안으로 진입해버린 차를 보며 그녀가 체념 어린 한숨을 뱉었다.

 이 이상 실랑이를 해본들 권도하는 제 결정을 바꾸지 않을 터였다.

 이럴 걸 알면서, 왜 매번 난 이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걸까.

 “내려.”

 동호수에 맞게 독립적으로 분리된 개인 차고지에 주차를 마친 뒤 그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다경이 마뜩잖은 얼굴로 포기하듯 차에서 내렸다.

 정말 그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게 옳은 걸까, 고민하며 무심코 든 눈에 로비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던 건물 벽에 박힌 ‘앤탑’이라는 명칭이 보였다.

 ‘저기 저, 태성빌딩 사이에 있는 앤탑빌리지말이에요. 완전 비싸다면서요?’

 언젠가 직원들이 휴게실 창밖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도 들었어. 저기 왜, 유명 연예인들이랑 정재계 인사들 사는 고급 빌라라며.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 걔도 여기 산다던데?’

 ‘부럽네요, 누군 팔 뻗으면 벽 닿을 곳에서 따박따박 월세 내고 지옥철로 출근하는데.’

 ‘부러워해서 뭐하니? 시작점부터 다른 인생인걸.’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곳이 팀의 복지라 불리는 신임 팀장의 거주지였던 모양이다.

 본가도 아니고, 회사 인근이라 택한 숙소일 텐데 이다지도 호화롭다니.

 누구의 말마따나, 시작점은 물론이며 중간 경유지마저 다른 인생이었다.

 다방에서 벗어나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먼지 날리는 건설현장 인근 작은 가건물인 저 같은 인생과는.

 “타.”

 보안이 철저한 곳임을 알려주듯, 금색 카드키를 센서에 가져다 대고서야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가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서 있던 다경이 이내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고속으로 올라가고 있음에도 숨이 답답할 만큼 느리게 느껴졌다. 그와 이렇듯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게 더는 낯선 상황이 아님에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밥이 제대로 입에 들어가기나 할까.

 갑갑증이 밀려들어 한숨을 길게 뱉을 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뭐해, 안 내리고.”

 문이 열린 걸 알면서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다경을 보며 그가 턱짓했다.

 감히 발을 들여놓아선 안 되는 구역의 경계 앞에 선 것처럼, 바닥을 짚는 발끝이 저릿거렸다.

 언젠가 꼭, 이와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10년 전 처음, 도하의 본가에 발을 들였던 그 날의 기억이.

 11. 생초콜릿

 9월 모의고사 후. 함께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용하던 도서관이 리모델링 공사로 휴관에 들어가면서 공부할 장소가 마땅칠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마침 공부하기에 최적인 곳이 있다는 권도하의 말에 별생각 없이 믿고 따라나섰던 건데···.

 “여기가 어디야?”

 우람한 성벽 같은 담이 시야를 불길하게 짓눌렀다.

 “우리 집.”

 설마 싶어 던진 물음에, 너무도 태평한 대꾸가 돌아왔다.

 불안함에 쐐기포를 박는 답을 듣자 다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흐렸다.

 “집으로 간단 말은 없었잖아. 공부하기에 최적이라더니.”

 “왜, 최적 맞잖아. 조용하고, 안락하고. 그거 말고 뭐가 더 필요한데?”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일까.

 어깨를 으쓱하며 묻는 말에 다경은 도리어 제가 망연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집은 아냐.”

 “왜 아니야.”

 여상한 얼굴로 대꾸한 도하가 어느 틈에 인터폰을 눌러버렸다. 삐이―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가 유독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그야.”

 “왜,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진지하지 못한 농담에 반사적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뭔 짓하면 네가 퍽이나 가만히 있겠다.”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반응이 재밌는지 도하가 낮게 웃음을 터트린다.

 짓궂은 것 좀 봐.

 그 얄미운 모습에 뚱한 표정을 짓자 도하가 허리를 슬쩍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걱정 마라, 예쁜아. 네 허락 없인 절대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비스듬히 휘어진 입술이 긴장 어린 눈동자를 뭉근하게 핥는다.

 “물론···.”

 때마침 불어온 가을바람이 한 뼘을 두고 마주 선 둘 사이를 느리게 지나갔다.

 “허락 없인 말이야.”

 은밀하게 덧붙여진 속삭임이 습한 숨결과 함께 입술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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