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구걸이라면 또 모를까.”
쓰레기부터 구걸까지. 다소 강한 단어 선택에도 팀원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미 결과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기에 초라한 침묵으로 순순히 인정할 뿐.
“그럼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회의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정적을 짓밟아 누르며, 그가 운을 뗐다.
“지금까지 추진해 온 기획안은 오늘부로 파기합니다. 소통이라는 키워드에 근거 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팀원의 얼굴에 절망감이 넘실댔다.
“화려하기만 할 뿐 알맹이는 없는 광고, 일방적이고 주입적인 정보 전달은 결국 과거의 실패만 반복시킬 뿐입니다. 성공적인 마케팅의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잘 새겨두시고, 어떻게 하면 블리뉴를 정말 갖고 싶은 차가 될 수 있도록 고객에게 홍보할 수 있을지.”
의도적으로 멈춘 게 분명한 목소리에 줄곧 시선을 떨구고 있던 팀원들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런 팀원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서야 빙긋 웃으며 그가 뒷말을 덧붙였다.
“직급 상관없이, 다음 주 월요일 퇴근 전까지 각자 기획안 작성해서 팀장실로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차마 한숨을 뱉지 못한 팀원들의 입 안에서 애달픈 곡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 * *
“우리 권 팀장, 결단력이 대단하던데!”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걸쭉한 음성이 그의 등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놓곤 회의 내내 졸고 있던 부서장이란 작자의 목소리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팀원들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야. 젊다고 내심 걱정했더니 기우였어, 기우!”
끝날 때쯤에야 겨우 깨어난 것 같던데 적당히 분위기 맞춰 던지는 입발림 소리가 제대로 듣기는 한 걸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런저런 말을 섞어 봤자 피곤할 건 역시 저일 뿐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그러잖아도 권 전무님께서 말씀 하시던데. 미국 지사에서도 손에 꼽는 에이스였다고.”
적당히 응수하고 돌아서려는 도하의 뒤에서 부서장이 시답잖은 말을 이어갔다.
“하긴 권현준 전무님 조카인데 어련히 잘하겠어. 가끔 전무님이랑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나?”
부임한 첫날부터 사람을 오라 가라 호출하며 업무에 대한 조언은 않고 실없는 소리만 했던 인간이다. 갑자기 살갑게 군 이유가 결국 그 때문인 모양이다.
옹졸한 관상에서부터 이미 싹수가 보이더니.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글쎄요. 아시다시피 전무님께서 워낙 바쁘신 터라.”
“그래. 당연히 바쁘시지. 원래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 다 그렇게 바빠. 돈을 들여도 시간 잡기 힘든 분들 아닌가.”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잡을 생각 또한 있었다는 듯, 그가 허허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혹, 나중에 기회 되거든 자리 한 번 같이 마련해 보게. 내가 우리 부서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들이 좀 있거든.”
아주 대놓고 드러내는 속내에 기가 찼다.
부서 관련한 일이 아니라 제 밥줄과 관련된 얘기겠지.
듣자 하니 이번 인사 발령 때 중역 딱지를 얻지 못하면 바로 책상 빼야 하는 처지라던데.
“네, 알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예의에 맞게 답하고 다시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부서장이 또 다른 용건으로 다시 그를 붙잡았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 오고 아직 환영식을 못했네. 내일모레 어때? 마침 불금인데 술 한 잔씩 기울여 줘야지. 자네도 알지, 불금?”
육중한 몸이 제법 유연하게 들썩였다.
환영식이라. 굳이 그런 걸 해야 하나 싶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 얼굴에서 잠시 생각이 멈추었다.
환영식이면 윤다경도 당연히 참석하는 건가. 그럼 같이 마주 보고 앉아 밥도 먹을 수 있는 거고.
시끄럽고 요란한 건 딱 질색이긴 한데, 이것도 뭐 관습 중 하나니까.
“어때, 시간 괜찮겠어?”
“네, 비워두겠습니다.”
“좋아. 내가 이 차장한테 일러서 회식 잡으라고 할 테니까, 좋아하는 메뉴 있거든 말해두라고!”
그제야 부서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얼굴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별거 아닌 대화의 나열이었음에도 뭔가 한바탕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 정신이 어지러웠다.
숙부님께선 괜히 저 영감탱이한테 혈연은 밝히셔선.
“귀찮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그가 팀장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회의 내내 성에 차지 않는 기획안을 보며 잔뜩 날 서 있던 신경 탓에 피곤함이 더했다.
이 뒤로도 또 경영지원부와 미팅이 잡혀 있던 것 같던데.
자리로 돌아가려 무심코 눈을 돌린 찰나, 직원들 틈에 섞인 낯익은 얼굴 하나가 시선에 잡혔다.
다경이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 속에서, 저를 마주할 때와는 다른 평온한 얼굴로 해사하게 웃고 있는 윤다경.
“하. 분위기 좋으시고.”
짧게 실소를 뱉은 입매 끝이 가느스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통유리를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다경의 티 없이 맑은 피부를 눈부시게 에워쌌다.
10년 전, 항상 교실 한 자리에 홀로 앉아 있던 것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그때와 달리 회사 사람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모습에 다행이다 싶은 한편, 도하는 괜히 마음 한구석이 뒤틀렸다.
재회 이후 내 앞에선 가식으로나마 미소조차 보여준 적 없으면서.
난 아직도 10년 전 그때의 기억 속에 매몰되어 있는데, 넌 거기서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듯 그렇게 웃고 있단 말이지.
“예쁘네.”
와득, 손에 쥐고 있던 빈 종이컵이 형체를 잃고 구겨졌다.
“울리고 싶게.”
처참히 일그러진 종이컵을 휴지통으로 내던지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단축 번호 1을 길게 누른 손끝을 타고 곧 신호음이 울렸다. 희희낙락거리며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얼굴이 액정을 확인하기 무섭게 입꼬리를 내렸다.
별것 아닌 윤다경의 문자 한 통에 종일 입꼬리가 내려갈 일이 없었던 저와는 아주 판이한 반응이다.
받아, 윤다경.
맞물린 턱에 바짝 오기가 섰다. 한참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눈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여실히 전해졌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끈질기게 수화음을 이어가자 다경이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허공에서 얽히고만 둘의 눈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
“···.”
어지러운 소란 속에 둘만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끝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도하가 받기 전까진 끊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 끝을 비딱하게 까닥였다.
일(一)자로 굳은 코랄색 입술이 질끈 깨물린다.
나쁜 놈, 이라고.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지.
“뭐해, 윤 대리?”
같이 담소 중이던 여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다경을 바라보았다.
“아···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결국 무시로 일관해 봤자 이 상황을 끝낼 수 없다 판단한 듯 휴대폰을 들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저와 관련된 것이라면 꼭 마지막까지 가서야 마지못해 선택을 하는 그 행동이 그를 더 열 받게 했다.
애초에 그냥 받으면 될걸. 꼭 그렇게 별것도 아닌 걸로 매번 사람 속을 긁지, 넌.
― 무슨 일이야?
팀원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지고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사 생활이 재밌나 봐?”
돌아서 있는 등 뒤로 빤히 시선을 박은 채, 도하가 이죽거렸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사람들 속에서 웃는 널 다 보고. 10년 전엔 매일 교실 한구석에 처박혀서 아무하고도 안 섞이고 고고하게 책만 보고 있었는데.”
차마 날 보고도 좀 웃어달란 말은 못 하고, 유치한 시비조의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구차했으나, 단단히 수틀려버린 입에선 도무지 고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한 한숨이 돌아왔다.
― 괜히 시비 걸지 말고 용건있음 말해. 없으면 끊고.
선을 긋듯 냉담히 말하며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고작 며칠 새 너무나 당연해진 반응이라, 새삼 상처받고 발끈할 것도 없었다.
그래. 너와 나 사이엔 항상 그게 존재해야 했지. 계산이든, 용건이든. 서로의 관계에 핑곗거리로 붙일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그딴 게 정 그렇게 필요하다면 만들어주지. 까짓거.
“매일매일이 바쁘시던데. 오늘도 또 선약이 있나?”
― ···.
대답 대신 공허한 침묵이 돌아왔다. 애초에 답이 필요해 물은 말이 아니기에, 그는 기다리지 않고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끝나고 저녁 먹어, 나랑.”
― 권···, 아니. 저기.
권도하도 아니고, 팀장님도 아니고, 저기라.
부를 때마다 바뀌는 호칭이 참 기가 차다. 회사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갑지 못한 반응에 짜증이 치미는 것 또한 막을 수가 없었다.
“호칭 한 번 다양하네.”
― 같이 밥 먹을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더 말해야 해?
예상을 비껴가지 않은 신경질적인 답이 차갑게 귓바퀴를 긁는다.
애당초 넙죽 알겠다는 대답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딱히 거절에 대한 타격은 입지 않았다.
다만, 당하고 또 당해도 더러워지는 기분엔 면역이 없을 뿐.
― 자꾸 입 아프게 하지 마. 난 그냥 네가 말한 계산만 충실하게 이행···.
“남은 여덟 번 중의 한 번.”
넌덜머리 나는 계산 타령을 차갑게 끊어낸 그가 씹어 뱉듯 뒷말을 덧붙였다.
“밥 한 끼로 퉁쳐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