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다른 새끼들 귀에 네 소리 닿으면, 그놈들 고막을 다 찢어버릴지도 모르니까.”
흡, 반사적으로 씹어 문 여린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품고 있기도 버거운 듯 경련하는 몸이 사정없이 그에게로 달라붙었다.
으, 읍. 다경이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삼켰다.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신음이 악문 입술을 타고 가냘프게 휘돌았다. 덜컹- 이며 얕게 흔들리는 차체가 다경의 젖은 눈 안에서 가물거렸다.
몸이 아니라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도하와 재회한 순간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일상이 바로 이처럼 어지러웠다.
과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열 번의 밤이 끝나면 너와 나 모두, 조금은 홀가분해질까.
행위가 반복될수록 선명해지는 죄책감과 미련이 그 지난 횟수를 채운다고 해서 정말로 말끔히 사라질까.
“입술 더 벌려서 혀 빨아.”
감싸 쥔 뒷목을 바싹 당긴 그가 혀를 얽었다. 숨 한 줌 남기지 않을 기세로 그녀의 입 안을 헝클어놓는다.
어지럽게 쳐올리는 마찰음이 습한 차창 위로 더덕더덕 달라붙었다.
시작점에 느꼈던 수치는 어느새 내던진 채 선명해진 음욕만이 온몸을 들끓게 했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호흡.
한계에 가까워지는 듯 손아귀에 가해지는 악력. 최대치를 향해 달려가는 마찰음.
거부했던 이유도, 목울대를 뜨겁게 했던 원망도, 모두 온몸이 저릿하도록 찾아든 욕망에 새하얗게 바래버리고.
짐승의 그것과 가까워진 짙은 쾌락만이 숨죽인 차 안을 터트릴 듯 에워쌌다.
* * *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문 앞에 섰다.
다경은 길게 뱉은 한숨을 뒤로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나 왔어, 엄마.”
“아이구, 요즘 왜 이렇게 늦는다니?”
거실에 앉아 시금치를 다듬던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가게 문 일찍 닫았네?”
“너 없는 걸 알았는지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더라. 그나저나 뭐 쏟았다더니 옷은 어쨌어?”
“대충 수습했지. 여기, 파랑 이것저것 장 본 거.”
다경이 기진한 표정을 숨긴 채 갖가지 장거리가 든 봉투를 엄마 앞에 내밀었다.
“피곤할 텐데 그냥 오지 뭐하러 장은 봐. 어차피 내일 새벽 장 보러 또 나갈 건데.”
애써 숨긴 피곤함을 눈치챈 엄마가 낮게 혀를 찼다.
“급한 거 없음 주말에 나랑 같이 가. 혼자 장 보려면 힘들잖아.”
“장사하는 집에 냉장고 비면 불안해서 안 돼. 나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꺼.”
무뚝뚝한 말투에서도 딸을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열심히 사시네, 우리 엄마. 하며 픽 웃은 다경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바로 서며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근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하도 소란이길래 어디 덴 줄 알고 걱정했더니.”
감정을 숨긴 얼굴 위로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재빨리 표정을 다잡곤 대답을 피하듯 몸을 돌렸다.
“글쎄, 괜찮다니까. 피곤하다, 엄마. 일단 나 좀 씻고 나올게.”
“그래, 얼른 씻어. 난 시금치 좀 마저 다듬어야겠다.”
다행히 더는 추궁하지 않은 엄마가 다경에게서 건네받은 장거리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 건넛방으로 들어간 다경이 가방을 툭 내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나둘 벗어 던진 옷들이 동그란 빨래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였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서자, 쇄골 아래부터 가슴 여기저기까지 물고 빨려 울긋불긋해진 몸이 유리 너머로 비쳤다.
다경은 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목 아래로 삼키며 제 헐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파정 직전 밖으로 꺼내어 사정하는 바람에 난잡하게 엉겨붙은 점액질의 잔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상태로 샤워기 아래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쏴아아, 쏟아진 물줄기가 머리와 몸을 흠뻑 적셨다.
적시고 또 적셔도 지워지긴커녕 선명해지는 몸의 자국과 기억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 내가 이렇게 삽질이 심해. 우리 둘한테 있을 볼일이 이 짓 말고 뭐 있다고.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아프게 이지러지던 입매가 왼쪽 가슴을 후벼 파는 것만 같다.
― 아무렴, 너보다 나쁠까.
덤덤해서 더 아팠던 도하의 원망이 목구멍을 콱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흡···.”
힘없이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다경이 헐벗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눈가로 흘러내리고 만 눈물이 샤워기를 빠져나온 물에 쓸려 발밑을 적셨다.
왜 하필 난 너를 만나서. 왜 하필 넌 나를 만나서. 우리는 이토록 서로에게 못된 짓만 하게 되는 걸까.
그토록 사무치게 후회해놓고도 학습되지 않는 미련이 창백한 발아래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잠겨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깊고 짙은 미련의 웅덩이를.
10. 구차한 오기
신임 팀장과 잡힌 첫 전략회의.
“저희가 보고 드릴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팀장님.”
기존 기획안에 대한 팀원들의 브리핑이 끝나자, 회의실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회의에 앞서 신임 팀장이 과장 이상급을 호출해 이미 한 차례 판을 뒤집은 바 있다는 소문이 팀 내에 파다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표정할 뿐이었다.
유학파긴 하나 젊은 나이의 팀장이라 내심 군기가 풀려 있었던 팀원들의 낯에 긴장감이 어렸다.
모두가 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고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숨 막히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몇몇이 생수병을 손에 쥐려고 할 즈음. 굳게 잠겨 있던 입술 사이로 냉소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몸값 비싼 월드스타에 기대서 홍보하는 게 우리 2팀의 마케팅이다, 이거네요.”
생수병의 뚜껑조차 돌리지 못한 손들이 그대로 조용히 탁자 위로 떨어졌다.
한 손에 든 태블릿 화면을 무성의하게 슥슥 넘기던 그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돈 많이 썼습니다 티만 팍팍 내는 이게.”
미소 탓에 더욱 싸늘하게 느껴지는 입매가 사악한 악동처럼 비딱했다.
나름 창의적인 광고 카피도 잡았고, 업계 최고의 스타와도 신속하게 접선해 계약 준비를 마친 건이었다.
만약, 여기서 팀장이 기획안을 뒤엎는다면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네, 팀장님. 그게.”
결국, 최종 브리핑을 맡았던 강유석 차장이 총대를 메고 말문을 뗐다.
“몸값 비싼 월드스타에 기댄다기보단, 아무래도 영향력있는 유명인사를 내세우면 그만큼 상품에 대한 홍보 효과도 크기 때문에···.”
“그러니까요.”
탁,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태블릿이 테이블 위로 밀려났다.
“몇십억 들여 모셔 온 그 셀럽에게 요구하는 게 고작, 차에 타서 멋있는 시늉이나 하는 게 전부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전.”
희미하게 어려 있던 웃음기마저 싸늘하게 거둔 채 그가 제가 한 말의 의도를 명확히 되짚었다.
억양의 고저가 없이도 충분히 전해지는 위압감이 회의실 전체를 휩쓸었다.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못한 강 차장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젊은 팀장의 기세에 압도당한 다른 팀원들 또한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마치, 모두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정적이 이어지길 한참.
“여기 한 번 보시죠.”
팀장의 말과 함께 회의실 스크린 위로 짤막한 시 구절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팀원들의 낯에 씻지 못한 당혹감이 스쳤다.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우리 삼호자동차의 결함을 풍자한 시입니다. 재작년에 신차 애비뉴 출시를 앞두고 공식 계정에서 연 삼행시 이벤트의 결과물이라던데. 맞습니까?”
무색함에 고개를 떨군 직원들의 눈이 대꾸 없이 데스크 위로 처박혔다. 그 모습을 시선만으로 빙글 훑어본 그가 비릿하게 입매를 당겨 웃었다.
“SNS로 신차를 홍보하려 했던 게 오히려 조롱하는 시들 때문에 역풍을 몰고 왔던 쓰·레·기 마케팅의 선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굳게 다물린 팀원들의 입 안에서 끙, 땅 꺼지는 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방금 전 권 팀장이 화면에 띄웠던 그 우스꽝스러운 삼행시는, 재작년 삼호의 신차를 홍보하기 위해 2팀에서 진행했던 이벤트 응모작 중 하나였다.
현 팀원들 중 당시 저 기획에 대해 의견을 내고 함께 계획했던 이들도 있었기에, 분위기가 한층 더 얼어붙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소셜 미디어 활용에, 고객들의 참여를 유도한 이벤트 개최. 분명 성공적이어야 할 요소들을 두루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가비처럼 다물린 입들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주변 눈치만 살폈다. 실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화면이 꺼진 벽을 등진 채 회의실의 정중앙에 섰다.
“이 마케팅엔 소통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도 단호한 평가가 긴장감이 감도는 테이블 위로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객과의 소통은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보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경품을 앞세워, 고객에게 호갱임을 인증하라 요구하는 이따위 작위적인 이벤트는 절대 제대로 된 소통이라 할 수가 없죠.”
장신의 몸을 바로 세우며 그가 싸늘한 뒷말을 덧붙였다.
“구걸이라면 또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