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어느 틈에 물기가 차오른 눈 안에서 놀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권도하의 모습이 크게 출렁였다.
“너···.”
하굣길을 걸어 내려오는 아이들의 눈이 둘을 향해 있었다.
“이거 놔.”
누가 볼세라 다급히 눈을 떨군 다경이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팔을 비틀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더러운 소문이 난무하는 와중에 구설수로 삼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이미 사귄다고 소문이야 나 있다지만,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이것 좀···.”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고집부리던 정수리 위에서 씹, 하고 나지막한 욕설이 울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험악하게 미간을 구긴 도하가 붙잡혀 있던 손을 단단하게 깍지껴 잡았다.
“따라와.”
이윽고 권도하가 앞장 서 정문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뿌리쳐도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힌 체온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릿했다.
그렇게 어딘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도하의 커다란 등을 보며, 다경은 차마 그 어떤 저항의 몸짓도 할 수가 없었다.
* * *
도하의 손에 끌려 앉혀진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편의점 앞 파라솔이었다.
다짜고짜 끌고 내려와 “고개 들지 말고 처박고 있어.”라는 괴상망측한 명령을 한 녀석은 편의점에서 티슈와 바나나우유를 사들고 나와 얌전히 앉아있는 다경 앞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눈물 닦아.”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말투완 다른 명령조의 음성이었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티슈를 푹푹 뽑아내 제 손에 쥐여주곤 하씨, 하고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씹어뱉었다.
“머리채 잡혀도 한 번을 안 울던 게 겨우 그런 거 가지고 울고 난리야, 사람 놀라게.”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는지 애꿎은 뒷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아무래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제가 보인 꼴이 적잖이 당혹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미···.”
“그냥 대놓고 말을 하지.”
난처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권도하에게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시험 때문에 기분 별로라고. 웃으면서 너랑 노닥거릴 기분 아니라고 그랬음, 그렇게 눈치 없이 뭐 먹으러 가자는 말 안 하고 그냥··· 하.”
하려던 말을 멈춘 도하가 앞에 놓인 생수병 하나를 까 벌컥벌컥 들이켰다.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려는 것처럼 순식간에 500ml짜리 생수 한 병을 비워버렸다.
그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며 다경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권도하는 지금, 제가 아닌 스스로를 향해 화를 내는 중이었다. 모의고사를 망치고 엉망이었던 제 기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도하, 바로 저 자신에게.
질끈, 입술을 깨문 다경이 소리 없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날 상대로 꼴사납게 자격지심 따윌 느낀 거냐고 질려 해도 모자랄 판에, 도하가 보이는 그 예상을 비껴간 반응이 다경은 당혹스러웠다.
제가 좋아한다는 여자애가. 툭하면 초라한 처지를 핑계로 저를 밀어내기 바쁜 애가, 급기야 오늘은 애꿎은 저를 상대로 추한 자격지심마저 드러냈는데. 그조차 눈치 없는 저 때문이라며 탓하는 그 모습에 다경은 옹졸한 스스로가 한없이 더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쩜 저럴 수 있을까.’
눈앞이 한층 더 뿌예졌다.
‘넌 어떻게 이 순간에도 나만 생각하니. 대체 나 같은 게 뭐라고. 이렇게 꼴사나운 계집애가···.’
“내가 좀 도와줘?”
또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을 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가 맞은 편에서 건너왔다.
“뭐?”
“수리 쪽 잡는 거, 내가 도와주면 되냐고.”
생각지 못한 도하의 말에 다경이 잠시 대꾸치 못하고 멍하니 그를 마주 보았다.
권도하가 이과 탑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조차 어려운 문제가 나올 때면 권도하를 칠판 앞으로 불러들여 직접 풀이를 시키곤 했으니까.
그렇다고, 같은 수험생인데 녀석의 도움을 받으라니.
“됐어, 모르는 거 있음 수학 샘한테 물어보면 돼.”
“수학 샘은, 씹.”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녀석이 다경의 등에 있는 가방을 턱짓하며 말했다.
“야, 너 가방에 시험지 있지? 여기다 꺼내 봐.”
여기서? 라고 물을 뻔했지만 권도하가 당장에 가방을 들춰내 시험지를 꺼내들 것 같아, 다경이 마지못해 고분고분 가방을 열었다.
촥―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는 수리 시험지가 권도하의 손에 잡혀 파라솔 테이블에 넓게 펼쳐졌다.
아··· 쪽팔린데.
마치 눈앞에서 발가벗겨져 해부라도 당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보니까, 네가 도형이 약하네.”
시험지를 한 장 두 장 넘기던 녀석이 틀린 문제 유형을 분석하며 말했다. 창피한 마음에 다경이 변명이라도 하려 입술을 방긋댔다.
“약한 게 아니라 이번에 유독 도형 쪽이 어렵게 나와서.”
“여기 봐. 일단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틀렸잖아. 이 문제에서는···.”
다경의 필통에서 샤프 하나를 꺼내어 슥슥 좌표를 그린 도하가 본격적인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x축을 포함하는 평면에서 이렇게 구를 자르면, 이 내린 정사형이 타원이 된단 말야. 이때 x축 점을···.”
문제를 낸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등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다경이 틀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권도하의 설명은 놀랍게도, 수학 선생님은 물론이며 방송에서 나오는 일타 강사들보다도 이해하기 쉽게 귀에 쏙쏙 박혔다.
어느덧 둘이 학교 밖 편의점 앞에 앉아 문제를 풀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설명에 집중할 정도였다.
역시 이과 탑은 다르구나. 이래서 이 녀석이 수업 시간이면 항상 지루하다는 듯이 앉아 창밖만 보고 있었나 보다.
조금 전까지 시험을 망친 불안감으로 넘실대던 눈을 반짝이며 도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가, 막 풀이를 마친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뭐냐, 그 표정은?”
녀석을 보는 눈에 안 어울리는 존경심이라도 묻어 있었던 건지, 권도하가 거만하게 물었다.
당황하여 순간 대꾸할 말을 못 찾고 두 눈을 깜박대자 이내 장난스레 눈가를 휘며 물음을 덧붙였다.
“왜. 새삼 잘생겨 보여?”
“뭐라고?”
다경이 황당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이 촌구석에 처박혀 있을 인물은 아니긴 하지.”
되물은 말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도하가 이때다 싶어 거들먹거렸다. 진지하게 문제 풀이를 듣던 와중에 흐름이 확 깨지고 말았다.
하여간에 한시도 진지하게 구는 법이 없지.
다경이 못 말린다는 듯 얕게 고개를 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윤다경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인물이 아닌데.”
도하가 돌연 왼손으로 턱을 괸 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싶어, 다경이 무시로 일관한 채 풀이를 마친 시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 나온 김에 이건 어때?”
탁, 하고 미처 집어 들지 못한 시험지가 권도하의 커다란 손에 짓눌렸다.
“내가 남은 수능까지 너 공부 봐줘서, 우리 둘이 같이 손잡고 대학 가는 건.”
같이 손잡고 대학이라. 그 해맑은 딜에 다경은 문득 웃음이 샜다.
같은 대학은 고사하고 현재로선 대학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건만, 도하가 건넨 말에 돌연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이래서 내가, 너한테 다 얘기를 할 수 없는 거야. 권도하. 너와 난, 아예 삶의 기준 자체가 다르니까.
“나 너랑 같은 대학 갈 성적 아니야.”
애써 씁쓸함을 감춘 채 뱉은 답에 권도하가 골똘한 얼굴로 여상히 말했다.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자 이거지. 정 힘들면, 내가 너 가는 대학에 맞춰서 가도 되고.”
“네가 왜?”
“어차피 나야 어느 대학 어느 과 나오느냐가 딱히 중요한 건 아니거든. 그거 때문이었으면 굳이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고. 그리고 뭣보다···.”
잠시 말을 멈춘 도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연한 눈가를 검지 끝으로 슥 문질렀다.
“윤다경 너 혼자 어떻게 딴 데로 보내냐? 보나 마나 더러운 파리 새끼들 꼬여들 게 뻔한데.”
수려한 입매 끝이 기다랗게 말려 올라갔다. 도하의 손끝이 스치듯 지나간 곳을 기점으로 따끔한 불꽃이 이는 것만 같았다.
“아마···.”
다경이 울컥 뜨거워지는 목울대를 깊게 들이쉰 숨과 함께 눌러 앉히며 피하듯 눈을 돌렸다.
“우리 둘이 같은 대학에 갈 일도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 간다고 해도 그때 되면 너도 달라질걸?”
“뭐가?”
“그냥, 여러 가지로.”
노는 물도 그렇고, 살아가는 방식도 그렇고, 좋아하는 여자 취향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겠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명치 아래로 눌러 삼킨 채 도하의 손에 짓눌린 시험지를 그 사이에서 빼내었다.
“아니, 안 달라져.”
제대로 접기도 전, 시험지를 낚아채 간 권도하가 각을 맞추어 단정하게 접었다.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린데, 내가 보기보다 눈이 꽤 높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