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에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세요. 과장님은!”
넉살 좋은 미애가 자연스레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큰 회사에 우리가 모르는 윤 대리님 지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거죠.”
“뭐, 그렇기야 하지만···.”
“얼른 가자구요, 얼른! 곧 있음 장난 아니게 막힐 텐데.”
여전히 두 눈을 가늘게 뜨는 송 과장을 향해 미애가 수선을 떨었다.
“이렇게 막히는 시간에 커피 한잔 마시고 가자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그러니까 더 서둘러야죠! 허리업!”
미애가 장승처럼 버티고 선 송 과장을 잡아끌며 서둘러 주차장 출구로 밀었다.
“야, 진미애. 너 내가 하늘 같은 선배님인 거 알긴 하는 거지?”
“그럼요, 과장니임! 오늘도 가시는 길까지 지루하지 않게 모시겠습니다!”
“운전은 내가 하거든?”
“그르니까 정체 구간에서도 지루하지 않게 입 털어 드린다 이 말씀이죠.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대리님!”
어르듯 송 과장의 등을 밀던 미애가 커피를 쥔 손을 살갑게 흔들며 다경을 향해 인사했다.
눈치 빠르고 예의 바른 친구라 아마도 제가 곤란해하는 걸 알고 보인 배려인 듯싶었다.
그건 결국, 미애도 어딘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긴 했다는 건데.
“조심히들 가세요.”
다경이 다소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치 한바탕 쓰나미가 몰고 간 듯 정신이 산란했다.
아무래도 주차장은 정말 아니었나 보다.
이제라도 장소를 바꿀까, 갈등하며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저기 우리 직원들 아냐?”
“···!”
등 뒤에서 흘러든 낮은 음성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미처 거리감을 인지하지 못한 이마가 콩, 상대방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아!”
반동으로 한 걸음 주춤한 몸이 크고 더운 손에 잡혀 가까스로 고정되었다.
“뭐해, 이마까지 박고?”
말초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시원한 체향이 폐부 깊은 곳까지 훅 밀려들었다.
“나 말고 딴 놈이라도 서 있었으면 어쩔 건데.”
깜짝 놀라 들어 올린 시선에 마뜩잖은 기색이 역력한 눈이 내리 닿았다.
어느 틈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권도하가 짧게 혀를 차며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감색 슈트에 그녀가 부딪힌 곳은 화장 자국이 옅게 남았다.
하필 거기에 부딪혀선. 털어줘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무래도 민망해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다경이 멋쩍은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다가 아차 싶어 주차장 쪽을 돌아보았다. 막 차 쪽으로 간 송 과장과 미애가 행여 둘의 모습을 봤을까 봐 염려된 탓이다.
“죄송합니다, 는 또 뭐야.”
다행히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둘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자, 정수리쯤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다경이 미안, 이라고 말문을 뗐다가 굳이 정정한 존댓말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사소한 것까지 조심스러운 저와는 참으로 다른 반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눈치 안 보고 사는 건 참 여전하지.
“차는 어디에···.”
다경이 주변을 살피며 어색하게 말했다.
“저쪽.”
도하가 가벼운 고갯짓으로 그의 차가 주차된 자리를 가리켰다.
다행히 차는 주차장 쪽으로 가는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서둘러 챙길 것만 챙기고 가자 싶어 다경이 그를 앞서 차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볼일을 마치고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혹시 다른 부서 사람들과 또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퇴근 직전에 부서장이 호출하는 바람에 좀 늦었어.”
앞서가는 다경의 옆으로 나란히 걸어 붙으며 그가 말했다. 누군가의 눈에라도 띌세라 다경이 좀 더 속도를 내어 걸었다.
“왜 이렇게 오라는 데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배 안 고파? 여기 구내식당 맛이 영 별로던데. 일단 나가서 밥부터···.”
“같이 밥 먹으려고 보자고 한 거 아냐.”
차 앞에서 발을 탁, 멈추며 다경이 차갑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비교적 유하게 풀려 있던 도하의 날렵한 턱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어련하실까.”
그가 비딱하게 고개를 틀었다가, 다시 표정을 풀곤 말을 이었다.
“바로 어제 그런 소릴 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생각이 바뀌셨을 리가.”
조곤조곤한 어조였으나 그 안에 깃든 냉소는 여전했다. 다경은 굳이 대꾸하지 않으며 차를 돌아 조수석 쪽으로 향했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불안함을 떨쳐버리려면 한시라도 빨리 제 볼일을 마치고 권도하와 떨어지는, 그 방법밖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쇼핑백만 꺼내 들고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차 문 좀 열어줘.”
“그래도 오늘은.”
조수석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등 뒤로 불현듯 열기가 느껴졌다. 발작처럼 돌아본 눈에 마치 차와 저 사이에 다경을 가두듯이 선 그의 가지런한 옆모습이 보였다.
“나랑 같이 저녁 먹어.”
살짝 몸을 기울여 문고리를 잡은 그가 철컥, 소리와 함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몸에서 간밤, 지독하게 저를 몰아세웠던 익숙한 열기가 번져왔다.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연락할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궁상맞게 혼자 테이블 차지하고 앉아 밥 먹고 싶지도 않고.”
답지 않게 어르는 듯한 어조가 퍽 간곡했다.
“안 내키는 거 아는데, 근처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괜찮은 데 있다니까···.”
하지만 다경은 도하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 열린 문틈으로 몸을 숙였다.
차 문을 잡은 채 서 있던 도하가 그런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다경이 서둘러 조수석 아래를 살폈다.
‘정말 버린 건 아니겠지.’
행여나 없어졌을까 봐 노심초사하던 눈에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는 종이백이 눈에 잡혔다.
‘다행이다.’
그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다경이 얼른 백을 챙겨 반쯤 들어가 있던 몸을 차 밖으로 다시 뺐다.
그 순간.
“···뭐냐, 그게?”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하의 미간이 싸늘하게 굳어 내렸다.
서릿발처럼 날 선 동공이 다경의 손에 들린 종이백을 가리켰다. 다경은 그제야 아차 싶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백을 얼른 허리 뒤로 감췄다.
“빌린 옷이라서 돌려 드려야 하는데 어제 깜박하고 네 차에 두고 내렸어. 번거롭게 부탁하느니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설명이랍시고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도하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대체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걸까, 메시지를 받고부터 종일 부풀었던 기대가 흔적조차 없이 증발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퇴근하고 나더러 보자고 한 게···.”
나랑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박 과장 새끼 옷 때문이었다?
기가 찬 나머지 더 이상 잇지 못한 말을 그대로 실소와 함께 삼키고 말았다.
근데 그것도 모르고 난, 윤다경이랑 뭘 먹을까. 10년이 흐른 지금 윤다경은 대체 뭘 좋아하려나. 병신같이 들떠서 여태 고민한 거였고?
“미안한데 저녁은 너 혼자 먹어야 할 것 같아. 난 선약이 있어서 이만.”
“윤다경, 너.”
도망치다시피 몸을 돌리는 다경의 팔을 도하가 거칠게 붙잡았다.
“박 과장 그 새끼랑 정확히 무슨 관계야.”
음성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음산한 어조가 둘 사이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겼다. 백을 쥔 가느다란 손끝이 잘게 떨렸다.
“새끼라니, 말 가려서 해. 아무리 직급은 낮아도 너보다 연장자한테···.”
“시답잖은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말고.”
손아귀에 든 가는 팔을 생채기가 날 정도로 움켜쥐며 그가 거칠게 읊조렸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미쳐 돌아 버리기 전에.
차마 뱉지 않은 뒷말을 삼켜낸 목울대가 무겁게 꿈틀댔다.
“말해. 무슨 관계인지.”
새카만 밤을 삼킨 듯 서늘한 눈이 다경을 몰아갔다.
제발,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해.
맞물린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거짓말이라도 제발 그리 말해주길 바랐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종일 삽질한 것도 화가 뻗치는 마당에, 저 야속한 입에서 수틀리는 소리라도 나왔다간 그대로 눈이 뒤집혀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알면서 뭘 물어.”
하지만 다경은 한번을 제 원대로 해주는 법이 없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거 아냐?”
굳이 빤한 물음을 던진다는 듯 예쁜 입술로 싸늘한 반문만 내뱉을 뿐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거 아니냐고.
그녀의 말을 곱씹던 도하가 이내 잔인하게 입가를 비틀었다.
그러니까 박 과장 그 새끼랑 썸타는 중이 맞다고.
붙어먹긴 나랑 붙어먹었지만, 딴 놈이랑은 마주 보고 앉아 웃으며 밥 먹는 그 빌어먹을 썸을 타는 중이라고.
적당히 아니라고 잡아떼도 될 텐데, 그럴 여지조차 남길 생각이 없다고.
너한테 난 고작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라고, 씨팔.
“윤다경답네.”
허탈하게 입술을 비집고 나와버린 실소가 적막에 휩싸인 주차장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썸은 박 과장이랑, 섹스는 나랑.”